마당에 오래된 오동나무 한 그루,
줄기가 구름 속까지 솟았네.
庭除一古桐, 聳干入雲中.
정원 오동나무 아래에서 더위를 식히던 설운薛鄖이 문득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그러자 이제 겨우 여덟 살 난 그의 딸 설도薛濤가 아버지의 시에 금세 대구를 내놓았다.
가지는 이곳저곳 새 다 맞아들이고,
나뭇잎은 오가는 바람 다 배웅하네.
枝迎南北鳥, 葉送往來風.
설운은 몹시 기뻤다. 어린 딸의 타고난 천재가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운은 자못 걱정스러웠다. 대구로 내놓은 시의 내용이 딸의 앞날을 스스로 예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뒤, 사람됨이 강직하여 바른말을 마다 않던 설운이 조정 대신들의 미움을 받으며 사천 지방으로 폄적되었다. 집안 식구들은 번성하고 화려한 도성 장안을 떠나 산 넘고 물 건너 멀고 먼 성도로 내려왔다. 그로부터 몇 해 지나지 않아 설운은 외교 사절의 신분으로 남조南詔 땅에 갔다가 그만 악성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세상을 버리고 말았다. 그때, 설도의 나이 겨우 열네 살, 집안은 그대로 곤경에 빠졌다.
그녀는 음률을 잘 알고 시와 부에 능한 데다 남의 말을 잘 알아듣는 총기까지 있었다. 게다가 용모까지 비길 데 없을 만큼 아름다웠던 그녀는 열여섯 살 나는 해에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관기官妓가 되었다. ‘이곳저곳 새 다 맞아들이고,/오가는 바람 다 배웅하는’ 기녀가 된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설운의 예감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이것저것 앞뒤를 셈하며 얻은 결론보다 이렇게 직관이 승리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전문가들은 중국 역사에서 말하는 기녀를 크게 보아 두 가지로 나눈다. 예기藝妓와 색기色妓가 바로 그것이다. 예기는 주로 시나 음악 등 예술 활동에 종사하지만 색기는 주로 용모를 바탕으로 몸을 파는 일에 종사하는, 오늘날 말하는 창기娼妓를 가리킨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설도는 예기 중에도 시기詩妓였다.
과거를 통하여 벼슬길에 오른 당시 많은 선비들은 문화적 바탕이 결코 낮지 않았다. 이들은 여인의 미모보다는 예술적인 재능을 더 사랑하고 아꼈으며, 말귀에 밝은 여인의 재치와 식견을 높이 샀다. 예술적인 재능과 재치, 그리고 높은 식견은 설도가 다른 누구보다도 더 우위에 있었다. 그녀가 머무는 곳에 드나들었던 인물 가운데 백거이白居易, 장적張籍, 왕건王建,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장호張祜 등 당시 시단의 거물들이 이름을 올린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사실 설도 자신이 지은 시도 500여 수, 이 가운데 겨우 90여 수만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예기로서의 그녀의 면모를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성당 시 최대 강역을 역사 지도로 보면, 당시 이 나라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이 기세처럼 당나라의 역사는 곧 당시唐詩의 역사이기도 했다. 당시를 빼놓고 당나라 역사를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설도를 비롯한 여러 여류시인도 이런 역사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탄생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높낮이는 그들이 가진 재능의 크고 작음에 결코 비례하지 않았다. 여성에게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제대로 조성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도 제공되지 않았다. 이것이 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재능이 넘쳤던 여성들의 비극이었다.
하늘이 설도에게 내린 시적 재능은 이곳 절도사로 부임한 위고韋皐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정원貞元 원년, 그러니까 기원후 785년, 위고는 첫 번째로 베푼 잔치에서 설도에게 즉석에서 시 한 수를 내놓도록 했다. 손에 붓을 잡고 종이를 앞으로 당겨 놓은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침착하게 한 편의 시를 써내려갔다.
고당高唐 가는 길 들어서자 날뛰는 원숭이 울음소리,
계속 나아가니 끝없이 이어지는 멋진 풍경에 들꽃 향기.
무산巫山 경치는 아직 송옥宋玉의 묘사처럼 아름다운데,
흐르는 물소리는 초양왕楚襄王이 흐느껴 우는 소리 같아라.
날이면 날마다 양대陽臺 아래,
운우雲雨 즐기다 초나라 망했네.
슬프도다, 사당 앞 수많은 버들가지가
봄이 왔다며 미인의 눈썹과 아름다움 견주다니.
亂猿啼處訪高唐, 一路煙霞草木香.
山色未能忘宋玉, 水聲尤是哭襄王.
朝朝夜夜陽臺下, 爲雨爲雲楚國亡.
惆悵廟前多少柳, 春來空鬪畵眉長.
‘고당高唐’은 무산巫山 매신媒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을 가리킨다. 사천 지방의 문화 수준은 당연히 장안에 견줄 바 못 되었다. 위고는 이곳에 정신 문화를 높여 건설하고 싶었다. 그는 이미 설도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터, 그녀를 불러 시문의 수준을 직접 알아보려고 마음먹었다. 설도를 앞으로 부른 위고는 제목도 주지 않고 시 한 편을 요구했다. <알무산묘謁巫山廟>, 시를 본 위고는 깜짝 놀랐다. 이 멋진 시를 금세 만들어 내다니, 위고는 손바닥으로 앞에 놓인 잔칫상을 치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위고는 당장 그녀에게 공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겼다. 이런 일이라면, 설도에게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다. 문예 방면의 재능에다 꼼꼼하고 빈틈없는 성격까지 더해져서 아무런 잘못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공문서가 처리되자, 위고는 큰 재목이 작은 일에 쓰인다고 생각했다. 그는 덕종德宗에게 설도를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문턱은 높았다. 종9품에 지나지 않은 자리였지만 과거를 통과한 진사 출신이라야 이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여성이었다. 여성이 이 직책을 맡았던 전례가 역사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일러 ‘여교서女校書’라 부르며 그녀의 학식을 높여 우러렀다.
그러나 위기는 항상 자신이 높여졌을 때 시작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오만이 흔들림 없이 버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위고의 총애를 한껏 받고 있던 설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천 지방에 파견된 관원들이 위고를 만나기 위해 설도를 연줄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이 빌미였다. 단호하게 물리쳤어야 마땅했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감히 내게 뇌물을 건넨다고? 그래, 나도 담 크게 받을 테다, 그녀는 이렇게 받은 뇌물을 한 푼도 자기 손에 넣지 않고 몽땅 다 위로 바쳤다. 그러나 그녀가 벌인 소란은 너무 지나쳤다. 위고가 잔뜩 불만을 품고 마침내 크게 노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위고는 그녀를 송주松州(지금의 쓰촨성四川省 쑹판현松潘縣)로 내쳤다. 서남쪽 변경, 이곳은 난리로 항상 어수선한 곳이었다. 덜컥 두려움에 빠진 그녀는 자신의 경솔함과 우쭐했던 지난날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연작시 ‘십리시十離詩’는 이런 상황에서 나온 작품이다. ‘십리시’란 시의 격식 가운데 하나로 모두 열 수로 제한된다. 열 수 모두 시의 제목에 ‘이離’자를 공통적으로 가진다. <견리주犬離主>, <필리수筆離手>, <죽리정竹離亭>, <마리구馬離廐>, <앵무리롱鸚鵡離籠>, <연리소燕離巢>, <주리장珠離掌>, <어리지魚離池>, <응리구鷹離鞲>, <경리대鏡離臺>, 이 열 수가 모두 그렇다. 각 수의 ‘離’자 앞부분은 설도 자신을, 뒷부분은 자신이 의지했던 위고를 견주어 나타낸 시어이다. 그 가운데 <어리지>, 곧 ‘연못 떠난 물고기’를 한번 감상해 보자.
늦가을 깊은 연못에서 몸을 솟구치며 뛰어놀았고,
언제나 붉은 꼬리 흔들며 낚싯바늘 가지고 놀았지요.
무단히 뽐내며 연꽃송이 끊어버린 뒤에는,
이제 다시 맑은 물에서 노닐 수 없어요.
跳躍深池四五秋, 常搖朱尾弄綸鉤.
無端擺斷芙蓉朵, 不得淸波更一遊.
‘십리시’ 열 수를 받아 읽은 위고의 마음은 다시 따스해졌다. 설도는 다시 성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의 모습을 다시 찬찬히 살핀 그녀는 기적에서 빠져나와 자유의 몸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녀는 이제 성도 교외 완화계浣花溪 주변에 거처를 정하고 뜰 가득 비파를 심었다.
가슴을 흔드는 사랑이 예고도 없이 설도를 찾아온 건 원화元和 4년(기원후 809년) 3월 어느 날이었다. 당시 시인으로서 인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원진元稹이 감찰어사의 신분으로 이곳에 들렀다. 그도 설도의 이름을 들은 지 이미 오래였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는 재주梓州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기로 특별히 그녀와 약속을 잡았다. 이제 겨우 서른한 살 난 젊은 시인 원진의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재치에 그녀는 그만 첫눈에 빨려들었다. 그녀의 나이 벌써 중년에 접어들었지만 사랑의 불꽃은 열한 살이라는 나이의 차이를 뛰어넘으며 활활 타올랐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했던 격정이 그녀를 휩쌌던 것이다. 내가 몽매에도 그리던 이가 바로 이 남자 아닌가, 그녀는 불길을 향해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사랑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 자신의 참되고 애틋한 사랑을 담은 <지상쌍조池上雙鳥>는 이때 만들어진 작품이다.
푸른 연못가 오리 한 쌍,
온종일 내내 함께하지요.
장차 태어날 아기 생각하며,
한마음으로 연잎 사이 노닐지요.
雙棲綠池上, 朝暮共飛還.
更憶將雛日, 同心蓮葉間.
행복했다. 함께 나서면 이 지방의 풍광에 잠겨 돌아올 줄 모를 정도였다. 설도에게는 그녀의 한평생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행복은 언제나 짧았다. 이 해 7월, 원진이 낙양으로 전임되었던 것이다. 손꼽아 헤아리니, 원진과 함께했던 기간은 불과 석 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원진은 돌아오지 않았다. 원진에게는 설도가 한 번 스쳐지나가는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도에게는 원진이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사무치는 그리움은 한이 되어 <춘망사春望詞> 네 수로 탄생했다. 그 중 첫 수를 한번 보자.
꽃 피어도 함께 볼 수 없고,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수 없네요.
임 계신 곳 어디인가요,
꽃 피고 꽃 지는 때이지요.
花開不同賞, 花落不同悲.
欲問相思處, 花開花落時.
덧붙이면, <춘망사> 네 수 가운데 한 수는 김소월의 스승인 김안서가 번안하여 지금 이 땅에서 <동심초>라는 가곡으로 널리 사랑을 받고 있다. 어떻든 그녀는 그토록 사랑하던 다홍색 치마를 벗어던지고 잿빛 도포로 갈아입었다. 그녀가 거처하는 완화계 주변은 여전히 사람들이 오가며 시끄러웠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오히려 청정함이 자리를 잡았다.
늘그막에 이른 그녀는 완화계를 떠나 벽계방碧鷄坊(지금의 성도 진쓰가金絲街 부근)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 음시루吟詩樓를 세우고 홀로 마지막 남은 세월을 보내다가 기원후 832년 여름,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으면서도 그녀는 끝내 돌아오지 않은 그녀의 '한마음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설도를 생각하며 조선시대 황진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도 많다. 황진이도 음률에 능했던 천재로서 당시 선비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다. 그런데 나는 술잔 주고받으며 시로써 수작했던 임제林悌와 한우寒雨의 사랑을 머릿속에 지울 수 없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언제나 아픈 그리움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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