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의 도교 사원 함의관의 여도사 어현기는 장안의 광대 집안 딸로서 자는 유미이다. 그녀의 아리따운 용모는 임금이 혹할 만큼 뛰어났으며, 생각은 절묘하였다. (西京咸宜觀女道士魚玄機, 字幼微, 長安倡家女也. 色旣傾國, 思乃入神.)
당唐 나라 말엽 황보매黃甫枚가 편찬한 <삼수소독三水小牘> 가운데 '어현기가 녹교綠翹를 매질로 죽이다' 꼭지에서 맨앞 두 문장을 가져왔다.
버들 푸른 빛 쓸쓸한 물가까지 이어지고,
늘어진 버들가지 사이로는 멀리 누각 보이네.
물위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그림자,
꽃잎은 어옹의 머리 위로 떨어지네.
버드나무 뿌리는 물고기 숨는 곳,
나무밑동에는 객선이 묶였네.
비바람 소슬한 밤,
놀라 깨어나니 시름 더욱 깊어라.
翠色連荒岸, 烟姿入遠樓.
影鋪春水面, 花落釣人頭.
根老藏魚窟, 枝底繫客舟.
蕭蕭風雨夜, 驚夢復添愁.
이 시를 읊었을 때, 그녀의 나이 겨우 열두 살, 이름은 어유미魚幼薇였다. ‘입을 열면 문장이요, 세 발자국 떼면 시 한 수’라는 어린 그녀의 명성에 스물여덟 살 난 온정균溫庭筠이 그대로 지나치지 않았다. 그녀의 재능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을 도시 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봄도 깊어가는 어느 날, 온정균은 장안성 평강리 부근, 낡고 허름한 집 안뜰로 그녀를 찾아왔다.
‘강변류江邊柳’[강가 버드나무], 온정균이 그녀에게 제시한 단 세 글자의 시제였다.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어유미는 단숨에 이렇게 오언의 율시를 내놓았다.
‘과연 명성 그대로 재녀로다!’
그러나 이곳 평강리는 기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생활하는 곳이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이곳으로 와서 기녀들의 옷을 짓는 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온정균은 생각할수록 가슴이 저리고 아팠다. 그녀의 천부적 재능이 이런 고달픈 생활환경과 너무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정균은 그녀가 내놓은 시구를 몇 번이고 거듭 읊었다. 과연 세상의 평판은 과장이 아니었다. 시어의 선택이 예사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평측에도 어그러짐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멋진 시가 이제 겨우 열두 살 난 어린 소녀의 손에서 나왔다. 온정균은 또 한 번 소리 낮추어 읊으며 이 어린 재동에게 깊고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이때부터 온정균은 이 집을 종종 드나들었다. 어린 어유미의 시 작품을 돌보기 위해서였다. 학비도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 집안을 위해 약간의 재정적인 도움을 보태기까지 했다. 이 둘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인 듯, 아버지와 딸인 듯했다.
오래지 않아 온정균은 장안을 떠나 먼 곳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다. 가을바람 쌀쌀해지며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때, 어유미는 멀리 떨어진 그를 그리워하며 『요기비경遙寄飛卿』이란 제목의 시 한 수를 적어 보낸다. ‘비경’은 온정균의 자이다.
섬돌엔 귀뚜라미 어지러이 울고,
정원 나뭇가지엔 안개 차갑습니다.
달 아래 이웃의 음악소리 들리는데,
누각에 올라 멀리 밝아오는 해 기다립니다.
階砌亂蛩鳴, 庭柯烟霧淸.
月中隣樂響, 樓上遠日明.
현격하게 벌어진 나이 차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스스로 부끄러워할 만큼 못생긴 용모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어유미의 타고난 재능을 참으로 아끼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온정균은 이제 막 사랑에 눈뜨기 시작한 어유미의 이런 사랑 고백을 애써 받아들이지 않고 끝내 회신을 보내지 않았다. 이 뒤에도 어유미는『동야기온비경冬夜寄溫飛卿』을 보냈다. 한겨울밤, 그를 그리워하며 쓴 이 작품에 깔린 한 소녀의 한을 온정균이 어찌 헤아리지 못했으랴. 만약 그녀가 보낸 이 시에 따뜻한 마음으로 응대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쩌면 어유미는 온부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온정균은 이미 세운 자기 원칙을 끝내 허물지 않았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어유미는 실연의 아픔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때에 맞추어 바람기 잔득 든 한량들이 매파를 앞세워 어유미가 살고 있는 곳으로 문간이 닳도록 드나들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그들이 자기의 재능보다는 미색에 눈이 어두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연의 아픔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가슴 속에는 온정균에 대한 그리움이 무시로 찾아들곤 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때, 온정균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꿈이 아니었다. 정 깊은 웃음을 가득 띤 그의 모습은 분명 앉으나 서나 잊지 못하던 바로 온정균이었다. 그러나 그는 홀로 온 게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또 다른 건장한 사내가 있었다.
“난 이미 결혼했네. 현숙한 아내에 귀여운 아들까지 두었네.”
눈물 가득 괸 그녀를 바라보며 온정균이 잇달아 내놓은 말도 그녀를 깜작 놀라게 만들었다.
“여기 이 양반, 참 괜찮은 사람일세, 이름은 이억李億이고.”
이것도 운명일까? 그럴 수도 있다. 이미 어유미는 선택의 기능이 마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것은 ‘기회’가 아니라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이억이 그녀에게 운명으로 다가왔다. 단정한 외모에 대범한 행동거지, 말쑥하고 시원스런 모습이 그녀를 지배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의 씨앗은 깊이 숨었다가 어느 날 문득 모습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억은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전도양양한 젊은이였지만 그는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진상을 알게 된 어유미는 당장 등을 돌렸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 한 마디에 그녀는 녹아내렸다. 이억이 자기를 사랑한다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러나 환상이 깨지는 데 필요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첩이면 어때, 이억의 사랑만 있다면.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야 했다. 이억의 본처 배씨의 거칠고 사나운 매질을 견딜 수 없었던 데다 울고불고 죽느니 사느니 악을 쓰는 본처 앞에 이억은 끝내 어유미 쪽에 서지 않았다.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당률唐律에 따르면 첩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다. 이억에게 내쳐진 그녀는 도교 사원으로 들어가 여도사가 되었다. 이제 그녀는 어유미가 아니라 어현기였다. 도관에서 그녀에게 준 법호가 ‘현기’였기 때문이다. 이제 생각하면, 이억의 본처 배씨에게 잘못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이억에게도 무슨 잘못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잘못이라면 사랑에 눈이 멀었던 자신의 선택이 잘못이었다.
어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녀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 이억도 온정균도 그녀의 우주 속에서 철저하게 소멸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녀는 이제 낡은 건축물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행동에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적막한 도교 사원에는 주지와 어현기,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두 사람뿐이었다. 얼마 뒤 주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현기는 더욱 외롭고 쓸쓸했다. 그녀는 절망했다. 그리고 분노했다. 절망과 분노는 그녀를 삶의 극단으로 몰아갔다. 천사였던 그녀는 잠깐 사이에 마귀로 변했다. 자포자기한 그녀는 세상의 모든 남성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새파랗게 벼리기 시작했다.
어현기는 외로움과 쓸쓸함을 달래기 위하여 잔심부름을 할 몸종을 두었다. 그녀는 이어서 사원 문간에 공고문을 한 장 내붙였다.
-시문을 함께 토론하고 연구할 멋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광고였다. 그것도 장안에서 이름을 날리던 어현기 아닌가? 자그마한 도시의 젊은 시인들이 이 공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는 여인을 농락할 마음으로 들뜬 젊은이도 있었다. 어현기의 도교 사원 문 앞은 그야말로 저잣거리처럼 흥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아닐세. 이러다가는 자칫 끝장날 수도 있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온정균이 간절한 마음으로 달랬지만, 그녀는 돌아선 채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이제 저는 어유미가 아니어요, 어유미는 벌써 죽었답니다.”
그녀는 저 멀리 사라지는 온정균의 뒷모습을 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현기는 사랑 따위는 믿지 않기로 작정한 지 벌써 오래였다. 지금의 그녀는 아름다운 천사가 아니라 타락한 천사였다.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자기를 찾아온 이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문학을 이야기하고 예술을 논했다. 그러면서 이 사나이들이 몽땅 다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이들이 자기 치마 아래 무릎을 꿇는 모습을 보며 영광으로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어현기는 잠시 나들이에 나서며 몸종인 녹교綠翹에게 신신당부했다.
“만약 손님이 오시거든 잠시 나갔다고 일러라.”
그녀가 돌아오자 녹교는 이렇게 아뢨다.
“진위陳韙 어른께서 오셨다가 아씨께서 외출했다 아뢰니 아무 말씀 안 하시고 돌아갔습니다.”
진위는 당시 어현기의 연인이었다. 그녀는 외출했다는 말 한 마디에 그냥 발길을 돌렸다는 녹교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사람 발길 적적한 사원에서 두 남녀가 몰래 정을 나누지 않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등롱을 내걸고 큰문을 닫은 뒤, 그녀는 녹교를 침실로 불러들였다.
“그래, 사실을 바른대로 말하렷다!”
녹교를 바라보는 어현기의 눈빛에는 벌써 무서운 기운이 번득이고 있었다. 그러나 녹교는 오히려 차분했다.
“마님을 모신 지 여러 해, 저는 언행을 신중하게 다잡으며 마님께 누가 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푸소서.”
그러나 어현기는 의심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화를 내며 녹교의 옷을 벗겼다. 그리고 발가벗긴 녹교의 몸에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그 남자와 정을 나눈 일이 결코 없습니다.”
모진 매로 쓰러지면서도 녹교의 말은 처음과 다름이 없었다.
“저는 이렇게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하늘이 있다면 오히려 마님께서 뭇 사내들과 맺은 음란한 성관계를 나무랄 것입니다. 저는 정말로 깨끗합니다, 이는 하늘이 아는 일이옵니다.”
이 말을 마치자 녹교는 숨을 거두었다. 덜컥 겁이 난 어현기는 어둠이 내리자 세상을 버린 녹교의 주검을 뒤뜰에 묻었다.
때는 기원후 868년 정월, 사원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녹교에 대하여 물으면, 어현기의 대답은 이랬다.
“봄비 내리자 어딘가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몇 달 뒤, 어현기가 마련한 잔치에 참석했던 어떤 이가 잠시 소피하러 뒤뜰에 나갔다가 땅바닥에 파리떼가 윙윙거리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며 자세히 살피니 핏빛이 보이고 피비린내까지 나는지라, 집으로 돌아와 황급히 관아에 이 사실을 알렸다.
결국 사건은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당률에 따르면, 주인이 자기 몸종을 죽이는 방법으로 징벌했다면, 많아야 벌금 몇 푼이면 끝이었다. 몸종의 지위는 ‘가축’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심리한 관리는 어현기에게 사람을 죽인 죄를 물어 사형으로 언도했다. 살인죄를 적용한 것이었다. 경조부로부터 이 사건의 심리 결과를 보고받은 당의종唐毅宗은 딱 한 마디만 했다.
“당장 집행하라.”
이때, 그녀의 나이 겨우 스물넷. 바람 서늘한 그 가을, 그녀의 우주는 막을 내렸다.
‘여성’, 이것이 어현기에게는 아픔의 시작이었다. 어현기만이 아니라 여성으로 태어난 당시 모든 이에게 이는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여성은 남성이 아니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천대받아야 하는 세상이었다. 하늘의 뜻을 가장 높이 받들던 이 시대를 가만히 돌아보면, 이야말로 모순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성의 선택은 결코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하노니, 비단옷으로 시구를 가리고,
머리 들어 급제한 이의 이름을 못내 부러워합니다.
自恨羅衣掩詩句,
擧頭空羨榜中名.
그녀가 읊은 주옥같은 시들이 문인의 추앙을 받았지만, 그녀는 결코 과거에 급제할 수 없었다. 아니 과장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이유는 단 하나,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시대를 풍미하던 천재 시인이 급제한 이들을 못내 부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안타까움이 눈에 잡히는 듯하다.
또 하나, 지금은 어현기가 녹교의 주인마님이었지만, 그 이전에 어현기는 이억의 정실 배씨의 몸종이나 다름없는 첩실의 신분이었다. 같은 여성이라도 정실과 첩실의 신분 차이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어현기는 자기가 겪었던 아픔을 녹교에게 그대로 안겼다. 깨려야 깰 수 없었던 시대의 한계 앞에서, 그녀는 피해자이면서 또 가해자였다.
혁명을 꿈꾸기에는 뛰어넘어야 할 벽이 한없이 높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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