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동아시아 최초의 여장군 부호富好

촛불횃불 2021. 9. 15. 13:51

 '부호富好'라는 이름은 상商 왕조 무정武丁 때의 갑골문에 보인다. 그녀는 살아생전에 제사를 주관했을 뿐만 아니라 정복 전쟁에도 참여하는 등 지위가 돋났다. 부호의 묘는 이른 시기 은허殷墟에 속하여 무정의 시기와 일치한다. 이 묘의 주인 부호는 당연히 무정의 배우자이다. 

 

 위의 글은 중국측 포털사이트 '소우거우[搜狗]'에서 가져왔다. 

 한평생 장렬한 삶을 살았던 이 사람 '부호富好', 3천 몇백 년 전, 세상을 떠나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이 여성을 다시 우리 눈앞에 불러낸 이도 또한 여성이다. 사라진 역사를 복원하기 위하여 발굴 현장을 지휘하던 마흔일곱 살의 고고학자 정전샹鄭振香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서른세 살 부호를 우리 눈앞에 다시 불러낸다.  

 

청동 도끼를 든 부호의 모습. 상나라 군주 무정의 왕후로서 이른 시기 중국의 여성 정치가요 군사 전문가이자 중국 최초의 여장군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3천 6백여 년 전, 그러니까 기원전 1,600년,  역사에 기록으로 알려진 중국 두 번째 왕조 상商이 박亳(지금의 허난성 상치우)을 도읍으로 삼으며 나라를 열었다. 그 뒤, 상은 몇 번이나 도읍을 옮긴 끝에 은殷(지금의 허난성 안양)을 마지막 도읍지로 삼았다. 지금 우리가 이 왕조를 은 또는 은상殷商으로 이르는 까닭도 마지막 정착했던 도읍의 이름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전국시대 초기, 칠웅 가운데 위세를 떨쳤던 위魏 나라 세 번째 군주 위혜왕魏惠王을 양혜왕梁惠王이라 일컫는 경우와 비슷하다. 그가 위나라의 도읍을 양[大梁]으로 옮겼던 것이다. 

 기원전 1,300년을 전후한 시기, 상나라 군주 반경盤庚이 도읍을 은으로 옮겼다. 그에 앞서 벌써 다섯 번이나 도읍을 옮겨야 했던 상나라였다. 왜 이렇게 자주 옮겼을까? 학자들의 견해는 여러 가지이다. 그곳에 진즉부터 똬리를 틀고 있었던 귀족들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는 요구가 지나쳤기 때문이라는 견해, 농경 사회였던 당시, 한 곳에 계속된 연작으로 땅심이 낮아졌기 때문에 새로운 옥토를 찾아야 했다는 견해, 홍수의 범람으로 훼손된 땅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지를 찾아야 했다는 견해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왕위를 둘러싼 귀족 간의 투쟁 때문이었다는 견해가 제법 설득력이 있는 듯하다. 어떻든 상의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이 기원전 1045년 경 주周의 문왕文王에게 나라의 열쇠를 넘겨주기까지 약 250년 동안 상의 서울은 은이었다.

 반경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소신小辛과 소을小乙 등 두 임금의 40년 남짓한 치세를 거친 뒤 자리에 오른 이가 바로 무정武丁이다. 그리고 무정 곁에 있었던 예순 명 남짓한 여인 가운데 첫 번째 왕비가 바로 여기서 소개하는 부호이다. 

 

상왕조 스물세 번째 군주 무정의 모습

 

 부호가 역사의 무대에 다시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 계기도 많은 부분을 앞서 소개한 정전샹에게 돌려야 할 것이다. 반경이 은으로 도읍을 옮긴 뒤 그를 포함하여 모두 열둘이나 되는 군주가 바로 이 땅 은에 묻혔으나 이들 무덤은 하나같이 도굴꾼들이 이미 거쳐 간 뒤였기에 공식적으로 발굴에 참여했던 학자들을 빈손으로 돌려세웠다. 그런데 부호의 묘는 아니었다. 도굴꾼들의 눈길조차 닿지 않았기에 무려 2천여 점에 가까운 부장품이 쏟아졌다. 청동기와 옥기, 그리고 갑골과 큰도끼와 비녀 등이 발굴 팀을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기물 등에 새겨진 명문銘文은 이 무덤의 주인이 여성으로서 결코 예사롭지 않은 인물임을 말해 주었다. 기전체라는 역사 서술의 독특한 경지를 연 사마천도 자신보다 1천여 년 전을 살았던 무정의 이야기를 <은본기殷本紀>에 기록하며 그의 첫 번째 왕비 부호의 존재를 풍문으로나마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중시하는 정통 역사가의 입장에서 풍문을 기록으로 담기에는 부족한 그 무엇을 느꼈기에 이 여성의 존재는 <사기> 어느 쪽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사마천이 세상을 떠난 지 2천여 년이 흐른 지난 1976년 부호는 마침내 세상에 부활했다. 

 이 세상에 옹근 1백 년을 살면서 쉰아홉 해나 군주의 자리에 있었던 무정은 첫 번째 왕비 부호를 일찍 떠나보내면서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 아팠을까? 부호가 세상을 떠난 지 3천 몇 백 년, 마침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부호묘는 이들 두 사람이 전설 속의 새 비익조처럼 금슬 좋은 부부였음을 잘 보여준다. 무정이 상왕조 중흥의 위업을 이룰 수 있었던 데에는 부호의 헌신적이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부호묘에서 출토된 청동기

 

 부호, 그녀는 1만 3천 명이나 되는 병력을 앞서 이끈 장군이었다. 

 어느 해 한여름, 북쪽 변경에서 전쟁이 터졌다. 양쪽은 서로 버티며 승부를 내지 못했다. 이때, 부호가 자진하여 앞으로 나섰다.

 "제가 병사를 이끌고 싸움터로 나아가겠습니다."

 "아니, 당신이 어떻게...... ."

 무정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멈칫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게다가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는 왕비였다. 미래를 예측하지 못할 때, 옛적 왕실에서는 점복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점괘는 부호의 결심을 응원했다.

 "좋소, 부디 하늘의 가호가 있기를 빌겠소."

 부호는 군사를 이끌고 북쪽 변경 싸움터로 나아갔다. 결과는 큰 승리였다. 그 뒤, 통수권을 위임받은 그녀가 동정서벌하며 무릎을 꿇린 나라는 모두 스무 개가 넘었다. 당시 싸움터에 나서는 병사는 일반적인 경우 많아야 몇 천 명이었다. 그런데 부호가 강羌을 공격할 때 거느린 군사는 모두 1만 3천 명이 넘었다고 하니, 이는 정말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무정이 은상을 통치한 시기를 역사에서는 '무정중흥'이라고 찬사를 보낸다. 무정이 상왕조의 중흥을 이루는 데 부호의 역할이 참으로 컸음을 알 수 있다. 무정이 통치하는 동안 동남쪽은 물론 서북쪽 여러 부족들을 무릎 끓리며 상왕조의 판도를 넓히는 데 기여한 부호의 공은 결코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부호묘에서 출토된 옥기

 

 당시 도성에서 북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에 유목 생활을 하는 토방土方이라는 부족이 있었다. 억세고 사나운 이들 부족은 걸핏하면 상왕조의 변경을 집적거렸다. 때로는 갑자기 밀려들어와 재물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잡아갔다. 상왕조에게는 자나깨나 마음속에 떨칠 수 없는 화근이었다. 무정은 이들을 그대로 두고는 왕조의 안녕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대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이들을 물리쳐야겠소."

 무정의 이 말을 들은 부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변경 깊숙이 넘어온 토방을 국경 너머로 밀어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승리의 여세를 몰아 끝까지 추격하여 철저하게 깨뜨렸다. 그 뒤, 토방은 두 번 다시 변경을 넘볼 마음조차 먹지 않았으며, 결국은 상나라 판도에 편입되었다. 

 부호는 남편 무정과 함께 서남쪽 부족 파방巴方을 물리칠 때도 멋진 전술을 구사했다. 파방과 맞붙기에 앞서 부부는 촘촘하게 작전 계획을 세웠다. 

 "나는 정예부대를 이끌고 나아가 적들의 동쪽에서 기습하겠소. 그럼 그대는 서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양쪽에서 몰아붙입시다."

 부호는 이때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무정과 부호가 이끄는 병사들이 양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오자 파방은 어쩔 줄 모르고 헤매다가 결국은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섬멸될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까마아득한 옛적으로 달려가면, 자기가 살던 도성에서 1천여 리나 떨어진 적진을 행해 내달렸을 부호의 늠름한 모습이 떠오른다. 대평원을 달리는 말발굽 소리에 초원 가득 푸른 풀들이 한쪽으로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는 모습도 떠오른다. 중국 역사에서 여성이 큰 권력을 움켜쥐었던 때는 많지 않았다. 서한의 개국 황제 유방의 정실이었던 여치呂雉, 당나라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 그리고 청나라 말엽을 주름잡았던 서태후가 있었지만 이들은 역사의 전면에 서기는 했어도 감추어야 할 흠결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지난 세기 70년 대에 무덤에서 뛰쳐나와 역사의 무대에 다시 선 부호는 전혀 다르다. 전국시대 중기, 조趙 나라 무령왕은 겨우 몇 사람만 거느린 채 중산국中山國 깊숙이 잠입하여 야대野臺 높은 곳에 올라 중산국을 바라보았다. 무령왕의 야심과 지모가 크게 번득이는 대목이다. 자신이 멸하려는 나라 심장 깊숙이, 그것도 몇 안 되는 측근과 함께 들어갔으니, 이는 웬만한 배짱 없이는 감히 시도조차 못할 일이다. 그런데 이보다도 1천 년도 더 앞서 부호는 1만 3천 명이 넘는 병사들을 이끌고 도성에서 1천여 리 떨어진 적진을 향해 내달았으니, 그 모습은 상상만 해도 눈앞을 향해 밀려오는 거센 파도처럼 세차다. 가히 여치나 측천무후, 그리고 서태후 등을 크게 압도하는 모습이다. 

 

부호묘에서 출토된 청동 큰도끼

 

 부호묘에서 나온 부장품 가운데 청동 큰도끼는 그 무게만 해도 9kg이다. 나는 부호가 싸움터에서 오른손에 이 청동 큰도끼를 들고 적과 맞붙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부호가 남성 못지않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측하지만, 나는 이 청동 큰도끼가 오늘날 전쟁터에서 휘날리는 사단의 깃발 역할을 했으리라 추측한다. 그러나 이런 점이 부호의 담대함과 넘치는 지략을 낮보아야 할 요소로 작용할 리 없다. 만약 옛적에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이 갖가지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역사의 지평은 훨씬 넓게 열렸을 게 분명하다. 상왕조 중흥의 영예에 큰 공을 세운 여성 부호의 경우가 이를 충분히 증명하지 않는가.

 동아시아 최초의 여장군, 부호, 그대 영원하시라! 

 

 중국 여성 남달리 가득한 포부,

 화사한 옷차림보다 군복을 사랑하네.

 

 中華女兒多奇志,

 不愛紅裝愛武裝.

 

 마오쩌둥毛澤東의 <여성 인민병사를 위하여[爲女民兵題照]> 가운데 한 구절이다. 자못 교조적인 냄새가 풍기기는 하지만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사족 하나 - '부호富好'는 달리 '부호婦好'로 이르기도 한다.

 

이 글은 '촛불횃불'의 창작품입니다. 무단 복제나 전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