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하께서는 귀하신 천자의 몸, 못 하실 일 없사오니, 그저 뜻대로 마음껏 즐기소서."
북송의 여덟 번째 황제 휘종徽宗을 곁에서 모시던 간신 고구高俅가 이렇게 부추겼다. 그러지 않아도 몸과 마음이 함께 근질근질하던 휘종은 흥성거리는 저자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짐이 궁궐에 갇혀 일반 백성이 어떻게 즐기는지 모르니, 오늘 이들이 사는 저자에 한 번 나가고 싶소."
간신은 예나 이제나 나라의 안녕보다는 황제의 굄을 차지하여 제 이익을 손에 넣는 데 온갖 힘을 쏟는다. 고구는 서생의 의복을 즉시 휘종 앞에 내놓았다.
미복을 입은 이들 일행이 궁문을 빠져나와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어둠이 내리자 이른 곳은 금환항金環巷, 북송의 도성 변경汴京(지금의 허난성 카이펑開封)에서도 기녀가 남자들을 맞아들이는 집들이 잇대어 늘어선 거리였다.
북송의 여덟 번째 황제로 자리에 오른 조길趙佶은 사치를 즐기는 데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외교에도 힘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나라의 마지막 날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형으로서 아들을 남기지 않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철종 조후趙喣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조길의 천부는 정치보다는 오히려 예술 쪽이었다. 글씨와 그림, 이른바 서화에 천부를 보인 그의 작품은 인터넷에 ‘휘종의 작품’으로 검색하면 수도 없이 만날 수 있다. 황포는 그에게 맞는 옷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을 진즉 깨달았을까, 그가 황제의 자리를 아들에게 넘겼을 때는 그가 자리에 오른 지 이미 스물일곱 해가 지난 뒤였다. 그것도 북쪽에서 새로이 일어난 강한 세력 금金의 말발굽이 도성 변경으로 물밀듯이 밀려들어올 때였다. 하지만 늦었다. 나라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나라가 금의 손에 들어가기 몇 해 전, 그는 군사를 정비하고 흩어진 민심을 한데 모으는 데 힘을 기울여야 했다. 하지만 그는 미복을 입고 기루를 찾는 즐거움에 한껏 빠져들었다. 이사사를 만났던 것이다.
간신 고구는 벌써부터 이곳을 드나들었기에 여러 기녀 가운데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이사사를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고구는 이 여인이라면 황제의 마음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고구는 황제를 이사사에게 인도했다. 아름다웠다. 황제의 마음은 첫눈에 그녀에게 기울었다. 뒷날, 명나라 말기에서 원나라 초엽을 살았던 시내암施耐庵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한 수의 시로써 묘사했다. 칠언율시 가운데 마지막 두 구절만 보이면 이렇다.
복사꽃이 얼굴 되고 옥구슬이 피부 되었으니,
고운 색깔 다 써도 그려낼 수 없어라.
桃花爲臉玉爲肌,
費盡丹靑描不得.
이사사는 북송의 도성 변경에서 염색집을 운영하던 왕인王寅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세 살이 되던 해에 절집에 이름을 올리며 그곳 스님의 제자가 되게 했다. 이날, 나이든 스님이 머리를 어루만지자 그녀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절집에서는 불문에 든 제자를 '사師'라고 불렀기에 그녀는 그 자리에서 왕사사王師師가 되었다. 그 다음해, 그녀의 아버지가 큰 죄를 짓고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는 일이 발생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길거리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그녀의 남다른 용모를 눈여겨본 이온李蘊이라는 자가 그녀를 자기가 운영하는 기루妓樓로 거두어들였다. 왕사사가 이사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금기서화琴棋書畵는 물론 노래와 춤, 그리고 손님을 맞아들이는 방법 등을 익혔다. 그뒤, 그녀는 변경에서 이름을 날리는 청루의 여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인 묵객과 왕손들이 그녀를 차지하려고 앞을 다투는 일이 날마다 벌어졌다.
청루로 그녀를 찾아온 사내는 장사꾼 조을趙乙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나 옥처럼 하얀 얼굴에 품위 있는 태도, 게다가 신기로운 기운까지 뿜어내는 눈빛은 그녀를 속일 수 없었다. 휘종 조길이었던 것이다. 이제 궁중에 수없이 많은 여인은 휘종 조길의 눈 밖이었다. 황제는 틈만 나면 미복을 하고 이사사를 찾았다. 꿈같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이 꿈은 오래가지 않았다. 북쪽에서 세력을 불린 금나라가 도성 변경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역사에서는 이를 일러 '정강지난靖康之難'이라고 이른다. 기원후 1126년, 흠종欽宗 정강 2년의 일이었다. 금은 도성을 무너뜨린 뒤 그 이듬해 괴뢰정권을 세우고 북쪽으로 철수했다. 앞 황제 휘종과 당시 황제 흠종은 물론 황실의 가족, 비빈, 대신 등 3천여 명이 이들의 포로로 끌려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휘종은 오국성五國城(지금의 헤이룽장성)에서 한많은 한평생을 마쳤다. 끝내 따스한 남쪽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한때 휘종 조길이 사랑했던 이사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알 수 없다. 역사에 남겨진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런저런 설만 어지럽게 춤춘다. 한때 그녀와 연인 사이였던 시인 주방언周邦彦을 따라갔을 거라는 설, 아니 휘종을 따라 북쪽으로 함께 갔을 거라는 설, 아니 시중들라는 금나라 장수의 윽박을 물리치며 금비녀로 제 목을 찔러 스스로 자결하려다 미수에 그치자 금비녀 조각을 삼켜 한생을 마쳤다는 설 등이 그렇다. 여기에 더하여 남송이 선 뒤, 다시 기루에 들어가서 노래와 춤을 팔며 남은 생을 근근히 이어갔다는 설까지 보태진다.
그런데 북쪽으로 끌려간 휘종 조길이 사랑했던 이사사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읊었다는 시 한 수가 전한다. 그렇다면 이사사는 휘종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났음이 분명하다. 물론 '사실이라면', 이런 단서가 필요하겠지만. 역사 기록을 보면 중국 역대 황제 가운데 아들딸을 가장 많이 둔 이가 바로 휘종 조길이다. 아들 서른하나에 딸 서른넷, 무려 예순다섯이다. 황후 다섯에 귀비 넷, 여기에 더하여 비빈도 스물일곱이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사랑했던 이는 기루의 여인 이사사였다. 그 많은 여인 가운데 오직 하나 기녀 이사사만이 휘종 조길의 여인이었던 셈이다.
장맛비 가을바람에 내 처지 한탄하는데,
아름답고 젊은 그대 떠났다니 슬픔에 잠기네.
홍안은 끝내 비굴한 놈 되어 부끄러운데,
영원히 청루에서 가장 뛰어난 그대일세.
苦雨西風嘆楚囚,
香銷玉碎動人愁.
紅顔竟爲奴顔恥,
千古靑樓第一流.
마지막으로 휘종 조길이 남긴 서예 작품 한 점을 여기에 데려온다. 이사사도 이런 독특한 필체의 작품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기원에서 교육받은 기녀는 금기서화에 능한 예기藝妓였기에 이들 두 사람도 이로써 마음을 주고받았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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