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는 한나라의 사위가 되기를 원한다고 아뢰었다. 원제는 후궁의 좋은 집안 출신 왕장, 곧 왕소군을 선우에게 내렸다. 선우는 기뻐하며, …….
(單于自言愿婿漢氏以自親. 元帝以後宮良家子王墻字昭君賜單于. 單于歡喜, …….)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
가을날 숲은 우거져도 온 산엔 나뭇잎 누렇게 시드나니,
산속 새들은 뽕나무에 모여 목청껏 노래하누나.
고향 산천이 길러낸 풍만한 깃털 반짝반짝 매끄럽구나.
흘러온 구름 따라 궁중 규방으로 데려가도다.
행궁은 넓고 넓지만 외롭고 쓸쓸하여 가냘픈 몸뚱이 햇빛도 못 보리니,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아 도무지 버틸 재간 없네.
예물을 보냈을지라도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하네.
어찌하여 나 홀로 이리 사나운가, 멋진 팔자 돌아오지 않으니.
훨훨 나는 제비는 멀리 서강西羌으로 날아가는데,
눈앞에는 우뚝우뚝 높은 산, 넘실넘실 굽이치는 황하.
아버지 어머니, 시집가는 이 길은 멀고도 멀어,
오! 비통하여라,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누나.
秋木萋萋, 其葉萎黃, 有鳥處山, 集于苞桑.
養育毛羽, 形容生光, 旣得行雲, 上游曲房.
離宮絶曠, 身體摧藏, 志念沒沈, 不得頡頏.
雖得委禽, 心有徊惶, 我獨伊何, 來往變常.
翩翩之燕, 遠集西羌, 高山峨峨, 河水泱泱.
父兮母兮, 進阻且長, 嗚呼哀哉, 憂心惻傷.
보통 백성으로서 여염에 살던 앳된 처녀 왕소군王昭君이 서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기원전 38년)에 궁녀로 뽑혀 황궁에 들어온다. 몇 해 뒤, 흉노 선우의 왕비로 선택된 그녀는 사막을 넘어 낯선 땅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는다. 이 노래 <원사怨詞>는 그녀가 모래바람 흩날리는 변새를 넘으며 불렀을 게 분명하다.
기원전 60년을 전후하여 흉노는 허려권거虛閭權渠 선우가 세상을 떠나자 권력 쟁탈 과정에서 내부 분열을 일으키며 선우가 다섯이나 생기는 상황이 발생했다. 혼란스런 전쟁이 일어났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호한야呼韓邪 선우와 질지郅支 선우가 서로 공격하며 맞붙는 지경까지 왔지만, 호한야가 밀리는 형국에 이르렀다. 그러자 호한야 선우는 서한에 귀부하기로 결정했다. 서한 황제는 호한야의 귀부를 받아들이고 그의 세력이 미치는 곳을 남흉노라 일렀다.
경녕竟寧 원년(기원전 33년) 정월,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서한 황궁으로 발걸음을 했다. 서한 황제 원제를 배알하는 자리에서 호한야는 이렇게 아뢰었다.
“궁녀 하나를 제게 내려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서한의 변새를 굳게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황제는 몇 해 전 궁녀로 뽑혀 황궁에서 생활하고 있던 왕소군을 호한야에게 내렸다. 호한야는 흉노의 선우로서 서한 황궁에 발걸음을 한 하나뿐인 인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왕소군은 이렇게 궁녀에서 흉노 선우의 연지閼氏가 되었다. 연지는 흉노의 군주 선우의 비妃를 가리키는 말이다.
역대 황제 대부분이 그랬듯이 원제도 자기 곁에 수없이 많은 궁녀를 거느렸다. 원제는 새로 뽑힌 궁녀들을 빠짐없이 하나하나 다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재주 넘치는 화공들을 궁중에 두고 궁녀들의 얼굴을 그리도록 명령했다. 원제는 궁녀의 얼굴이 그려진 화첩을 살피다가 그저 손짓만 하면 끝이었다. 황제의 총애를 얻지 못한 궁녀는 구중궁궐에서 외롭고 쓸쓸하게 지내다 늘그막에 이르러 스러지는 한 송이 꽃일 따름이었다. 황제의 총애는 자신만이 아니라 그녀의 가족에게도 부귀와 영화를 한 아름 안기는 ‘로또’였기에 궁녀로 뽑혀 화공 앞에 선 이들은 붓을 든 화공이 바로 하늘일 수밖에 없었다. 운명인가, 기회인가? 자신이 선택할 수 없으면 운명, 선택할 수 있으면 기회 아닌가. 이들은 화공 앞에서 운명을 기회를 만들려고 했다. 여기에서도 뇌물이 이들에게 운명을 기회로 바꿀 수 있는 열쇠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기회를 택하지 않았다. 운명에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맡겼다. 그녀는 뽑혀 들어온 궁녀들이 뇌물을 들고 길게 늘어선 행렬 뒤에 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왕소군을 궁정화가 모연수毛延壽가 곱게 보았을 리 없다. 사실을 왜곡하는 데 익숙한 사람은 자기가 저지른 악을 악이라 생각하지 않고 관행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옛날이라고 달랐을까. 그렇지 않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예나 이제나 똑같은 패턴의 반복, 그대로이다. 어떻든 모연수는 아무것도 챙겨주지 않은 왕소군의 얼굴 한 쪽 뺨에 붓끝이 거의 다 꺾일 만큼 거칠게 상흔 하나를 콱 찍었다. 현대판 사진 편집 프로그램인 포토샵은 주름살도 펴고 주근깨도 없애지만 모연수의 인물 편집 붓끝은 미녀도 추녀로 만드는 포토샵이었다.
그날, 왕소군이 흉노 땅으로 출발하려고 나섰을 때, 그녀를 본 서한 황제 원제는 눈이 뒤집혔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궁녀를 내가 어찌 몰랐던가!’
아름다운 외모만이 아니었다. 기품까지 넘치는 모습이었다. 얼굴도 아름다웠지만 몸매도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였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없던 일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흉노 선우 호한야와 맺은 약속을 엎을 수는 없었다. 까닭을 따지던 황제는 화공이 부린 장난질 때문임을 알았다.
“저놈들 머리를 당장 내리라!”
모연수와 진창陳敞을 비롯한 수많은 화공들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1천 년의 세월이 지난 뒤, 북송 고문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던 구양수歐陽修는 <명비곡재화왕개보明妃曲再和王介甫>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명비는 물론 왕소군을 가리키며, 왕개포는 북송의 사상가요 개혁을 이끌었던 왕안석을 말한다.
한 나라 궁중에 절세미인 있는데,
황제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네.
어느 날 사신 따라,
먼 곳 흉노 땅 선우에게 시집간다네.
천하에 둘도 없이 뛰어난 용모,
한번 보내면 다시 얻기 힘들다네.
화공은 죽일 수 있을지라도,
이게 어찌 위안이 될라나.
漢宮有佳人, 天子初未識.
一朝隨漢使, 遠嫁單于國.
絶色天下無, 一失難再得.
雖能殺畵工, 於事竟何益.
예부터 지금까지 왕소군을 노래한 시가 모두 7백여 수에 이르고, 희곡이나 소설 등의 작품도 40여 종에 달한다니, 그녀가 뒷사람에게 남긴 느낌이나 작용의 크기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변경을 넘어 흉노에 이른 왕소군은 영호연지寧胡閼氏에 봉해졌다. 그녀는 호한야 선우와 세 해 동안 함께하며 아들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이미 나이 많았던 호한야가 세상을 뜨자 왕소군은 원제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성제成帝에게 글을 올렸다.
“이제는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하소서.”
그러나 성제가 내린 칙령은 짧았지만 강력했다.
“그곳 습속을 따르라.”
거의 70년 전, 오손으로 시집갔던 화번공주 세군의 눈물어린 청원에 서한 황제 무제가 내렸던 칙령과 하나도 다름이 없었다. 오손이나 흉노 모두 혼인 습속이 한나라와는 달랐던 것이다. 유목민족의 혼인 습속에 따라 왕소군도 호한야의 맏아들 복주루復株累 선우에게 다시 시집갈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복주루 선우와 11년을 함께 살며 딸 둘을 낳았다.
기원전 20년, 복주루 선우도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홀로 살던 왕소군도 몇 년 뒤 한 많은 삶을 마쳤다. 그녀의 주검은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수도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남쪽, 황하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묻혔다. 뒷날 사람들이 그녀의 무덤을 일러 ‘청총靑冢’이라고 부르게 된 데에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영회고적5수詠懷古迹五首> 가운데 세 번째 수에서 읊은 이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궁전 떠나 북쪽 사막을 넘고 나니,
홀로 푸른 무덤[靑冢]만이 황혼 속에 남았네.
一去紫臺連朔漠,
獨留靑冢向黃昏.
서한 시기의 왕소군은 춘추시대의 서시西施, <삼국연의> 속의 인물 초선貂蟬, 그리고 당나라 현종의 귀비 양옥환楊玉環과 더불어 중국 4대 미녀로 많은 이들은 기억하고 있다. 그녀가 황궁을 떠나 변새를 지나며 비파를 안고 <비파원琵琶怨>을 타자 구슬프고 애절한 곡조에 귀를 기울이며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넋을 잃은 기러기들이 그만 날갯짓을 잊고 사막의 모랫바닥으로 잇달아 떨어졌다는 옛 이야기에서 유래하여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는 성어가 탄생했으니, 이는 아름다운 미녀의 맵시를 비유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당나라 때 시인 동방규東方虯의 <소군원3수昭君怨三首> 가운데 한 부분을 보자.
흉노 땅에는 화초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아라.
자연스레 허리끈 느슨해지는 건,
가는 허리 몸매 가꾸기 때문이 아니라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화초가 만발한들 고향 떠난 여인의 마음에 봄이 들어올 자리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리움도 병이 되어 몸도 야위었을 터, 허리끈이 느슨해진 까닭을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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