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晉 나라 군주 평공平公이 대종을 주조한 뒤 악공들에게 그 소리를 듣게 하니 모두 음률이 고르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사광은 이렇게 아뢨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주조해야겠습니다.”
평공이 말했다.
“다들 음률이 고르다고 하지 않소?”
사광이 다시 아뢨다.
“훗날 음률을 아는 이가 있어 이 대종의 음률이 고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면, 저는 임금께서 이 때문에 치욕스러울세라 염려합니다.”
晉平公鑄爲大鐘, 使工聽之, 皆以爲調矣. 師曠曰 : “不調, 請更鑄之.” 平公曰 : “工皆以爲調矣.” 師曠曰 “後世有知音者, 將知鐘之不調, 臣竊爲君耻之.”
-『여씨춘추呂氏春秋』「중동기仲冬紀」
종자기 갑자기 세상을 뜨니,
유백아 역시 끝이로다.
거문고 줄 끊고 세상 사람과 멀리했네,
지음이 이로부터 사라졌다며.
호파가 줄을 뜯자 물고기 뛰어오르니,
이 일은 책에도 보이네.
사광이 한 곡 타기 시작하니,
학의 무리 허공에서 춤을 추었네.
鍾子忽已死, 伯牙其已乎.
絶弦謝世人, 知音從此無.
瓠巴魚自躍, 此事見於書.
師曠嘗一鼓, 群鶴舞空虛.
이 시는 북송 때 구양수歐陽脩가 읊은 『야좌탄금유감2수정성유夜坐彈琴有感二首呈聖兪』 가운데 한 부분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유백아, 호파, 그리고 사광은 모두 소리에 예민한 감각을 지닌 악사였다.
종자기는 악사는 아니었지만 소리를 듣는 데 남달리 예민한 감각을 지녔던 듯하다. 유백아가 높은 산의 우람한 모습을 연주하자, 한낱 나무꾼에 지나지 않았던 종자기는, ‘태산이로다, 우뚝 솟은 태산이로다.’, 이렇게 감탄했으며, 양자강의 푸른 물결을 연주하자, ‘푸른 물 넘실넘실 장강이로다.’, 이렇게 마음속 깊이 느끼어 탄복했다. 두 사람은 나이 차를 뛰어넘어 곧장 마음을 주고받는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종자기가 세상을 떠나자 유백아는 자기 소리를 알아줄 사람이 이제는 사라졌다고 탄식하며 거문고 줄을 제 손으로 끊어버리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일화로 남아 전한다. 마음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벗을 이르는 ‘지음知音’은 이렇게 생긴 낱말이다. 이 둘은 전국 시대 인물이다.
학의 무리를 춤추게 할 정도로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사광師曠은 이 두 사람보다 앞선 춘추 시대 진晋 나라 때 인물이다. 사광은 기원전 572년에 태어나 기원전 532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세상에 겨우 마흔 해, 그러나 그가 남긴 수많은 일화는 뒷사람의 마음을 감동으로 출렁거리게 만든다.
사광, 그는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그는 아예 ‘눈 먼 신하’라고 자처하였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무슨 까닭으로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을까? 세 가지 의견이 있다.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다는 의견이 그 하나이다. 그가 눈에 보이는 것들 때문에 한 가지 일에 마음을 쏟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쑥을 태워 그 연기로 자기 눈을 쓰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의견이 또 다른 하나이다. 이로부터 그의 마음이 한없이 맑아졌다는 이야기가 두 번째 의견 뒤에 항상 따라붙는다. 마지막 의견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몹시 사랑했다. 게다가 보통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 총명함에다 천성으로 생각한 바를 곧장 몸으로 옮기기를 좋아했다. 위衛 나라 궁정 악사 고양高揚에게 거문고를 배울 때, 보통 바늘보다 바늘귀가 큰 자수바늘로 스스로 제 두 눈을 찔렀다는 것이다. 분발하여 열심히 노력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그의 거문고 연주 능력은 스승을 훌쩍 뛰어넘게 되었다. 문자 그대로 청출어람靑出於藍이었다.
눈먼 장님은 세상을 전혀 보지 못할까? 나는 눈먼 장님이 눈 밝은 사람보다 세상을 훨씬 더 깊이 꿰뚫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 못하는 벙어리는 서울을 못 가지만 눈먼 장님은 서울을 간다는 우리 속담에 벙어리보다는 장님이 더 나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고 사전에서는 한정하여 풀이했지만 나는 그 이면에 눈먼 장님의 혜안을 깊이 감추어 두었다고 믿는다.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의 끝장을 보노라면 눈을 뜨고도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청맹과니 그대로이다. 눈은 멀었지만 바깥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는 이미 세상의 참모습을 누구보다 잘 보아 판단할 수 있다. 사광이 바로 그랬다.
사광은 진나라 도공悼公 때 궁정에 들어가 평공平公 때까지 두 임금의 신임을 단단히 받았다. 처음에는 궁정 음악을 관장하는 임무를 수행했지만 나중에는 백관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태재太宰의 자리에 이르렀다. 예술에 대한 깊은 조예는 물론 차곡차곡 쌓인 높은 학식과 경륜, 그리고 뛰어난 말재주로 두 임금의 신임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뛰어난 음악가이면서 이름을 날린 정치가의 대열에도 낄 수 있었다. 그가 정치가로서 이름을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뛰어난 귀가 한 몫을 단단히 했다고 믿는다. 소리를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일이 눈을 통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일보다 더 정확하고 분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평공은 앞 못 보는 사광을 볼 때마다 사뭇 안타까웠다.
“어두움 속에서 당해야 할 고통이 얼마나 크겠소!”
귀 밝은 사광이 이 말을 지나칠 리 없었다.
“이 세상에는 다섯 가지 어두움이 있습니다. 신하가 뇌물을 챙긴다는 소문이 파다하고 백성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임금이 알지 못하면 이게 바로 어두움입니다. 임금이 인재를 바로 골라 쓰지 못하면 이것도 어두움이며, 임금이 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분별하지 못함도 어두움입니다. 또 임금이 병력을 함부로 동원하여 마구 전쟁을 일삼는 일도 어두움이고, 임금이 백성의 편안한 삶을 위해 아무런 생각도 없음이 또한 어두움입니다.”
평공은 더 할 말이 없었다. 단지 조리정연한데다 강건하여 힘이 넘치는 그의 정치적 견해에 깊이 감동할 뿐이었다. 사광은 이런 인물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바로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가 담긴 『맹자』의 첫 꼭지가 그렇다. 조곤조곤 타이르듯이 낮은 목소리로 이르는 공자를 읽다가 폭포수처럼 힘이 넘치는 맹자에 이르면 갑자기 화면이 일순간에 바뀌는 느낌이다. 그런데 사광에 이르면 그 도저한 기상이 자못 거침없이 몰아치는 물결이다. 200년쯤 뒤, 전국시대를 살았던 맹자가 사광의 이런 모습을 읽었을 게 분명한즉, 맹자의 말에 넘치는 힘도 사광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겠구나, 생각해 본다.
사광은 청각이 지극히 예민하고 밝은데다 소리를 분별하는 능력이 보통 사람과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게다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걸출한 연주 능력까지 있었다. 그러기에 수없이 많은 일화가 그의 모습에 신비로움을 더했다.
사광이 평공 앞에서「청치淸徵」를 연주한 적이 있다. 거문고를 앞으로 당긴 사광이 줄을 가만히 타기 시작하자 검은 빛깔의 학이 날아왔다. 잠시 숨을 고른 그가 다시 연주를 계속하자 이 학들이 나란히 벌여 섰다. 잠시 뜸을 들였던 그가 세 번째로 거문고 줄을 당겼다 놓으며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란히 벌여 섰던 학들이 목을 빼고 울더니 이제 날개를 펼치고 춤을 추었다. 천오백 년 뒤, 북송의 구양수는 이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이 꼭지 앞에 든 시를 노래했을 터이다.
이뿐이 아니었다. 사광은 이 자리에서 또 다른 곡「청각淸角」까지 연주했다. 연주가 시작되자 북서쪽에서 검은 구름이 일더니 비바람이 궁궐 안으로 몰아쳤다. 잇달아 휘장이 찢어지고 연회를 열 때 쓰이는 그릇들이 왈가닥달가닥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바닥으로 떨어지며 깨졌다. 기왓장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임금은 물론 곁에 있던 여러 신하들도 가슴이 마구 떨렸다. 공포로 심장이 마구 뛰었던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광의 연주 능력을 과장되게 묘사한 점이 있다. 그러다 보니 억지로 끌어다 맞추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미신이나 뜬소문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그의 심오한 예술적 경지와 깊이 있는 기예를 반영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도 사광이 연주했다는 누대가 카이펑開封에 유적으로 남아 있다고 하니, 그는 당시 여러 지방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사랑했던 예술가였음이 분명하다. 그가 거문고를 연주할 때면 말들이 풀 뜯기를 그만두고 고개 들어 귀를 기울였으며 먹이 찾으러 나섰던 새들이 날갯짓을 멈추고 귀 기울이다 입에 물었던 먹이를 땅에 떨어뜨렸다는 이야기도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사광의 남다른 재능을 눈여겨본 평공은 그를 ‘장악태사掌樂太師’에 봉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늘그막에 이른 평공이 사광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 나이 벌써 일흔이오. 공부를 좀 더 하려고 해도 때가 늦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소이다.”
사광이 머뭇거리지 않고 당장 대꾸했다.
“왜 촉에 불을 붙이지 않습니까?”
멀쑥해진 임금이 내받았다.
“아니, 신하된 자가 어떻게 군주인 나와 농담을 한단 말이오?”
사광도 지지 않았다.
“두 눈이 다 먼 제가 어떻게 감히 임금님을 가지고 놀 수 있습니까? 신이 일찍이 들은 바가 있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학문을 좋아하는 모습이 막 떠오르는 태양과 같고, 중년에 이르러서는 학문을 좋아하는 모습이 한낮의 태양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학문을 좋아하는 모습이 촉에 불을 댕겨 환하게 하는 모습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촉에 불을 밝히는 것과 캄캄한 밤에 길을 가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문득 깨달은 평공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좋은 말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사광은 이렇게 옳은 일을 두고 몸을 사리지 않았다. 임금 귀에 달콤한 말로 아첨하며 꼬리치는 무리와는 아예 함께 두고 이야기할 수도 없는 곧은 인물이었다.
어느 날, 평공이 잔치를 베풀었다. 많은 신하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물론 사광도 이 자리에 있었다. 그것도 임금 곁에. 예나 이제나 잔치에는 언제나 술잔이 돌았고 음악도 빠지지 않았다. 주흥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평공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높였다.
“하하하, 나보다 더 기분 좋게 사는 이는 없을 거외다. 내 말을 거역할 자 없기에 더욱 그렇소이다.”
임금의 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바로 곁에 있던 사광이 거문고를 들고 임금을 향해 내려쳤다. 평공이 옷깃을 다잡으며 재빨리 몸을 피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거문고는 벽에 부딪치며 박살이 났다.
“아니, 태사, 태사께서는 누구를 쳤소이까?”
사광이 짐짓 이렇게 대답했다.
“방금 어떤 소인배가 허튼소리를 하기에 화가 나서 혼내려고 했습니다.”
임금이 정색을 하고 다시 물었다.
“허튼소리를 한 이가 바로 나 아니오?”
사광은 이렇게 눙쳤다.
“아이고, 임금께서 그런 허튼소리를 할 리 있겠습니까?”
곁에 있던 신하들이 사광이 범한 잘못을 지나칠 수 없다며 벌을 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평공은 손사래를 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오히려 내가 거울삼을 일이외다.”
『한비자韓非子』「난이難二」에 기록으로 남아 전하는 이야기이다. 사광도 대단하지만 평공도 임금으로서 평범한 수준을 훨씬 높이 뛰어넘는 인물임이 분명하다. 비범한 인물 곁에는 언제나 비범한 인물이 함께하는 법이다.
마지막으로『맹자孟子』「고자장구상告子章句上」에 등장하는 ‘사광’에 관한 부분만 잘라서 여기 보인다.
-귀도 또한 그러하니, 소리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사광에게 기대한다.
(惟耳, 亦然, 至於聲, 天下期於師曠.)
이야기 밖의 이야기 하나
‘사광은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나는 이 문장을 두고 옹근 하루 속을 태웠다. ‘장님’ 때문이었다. 먼저 이 낱말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았다.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올림말 ‘장님’에 대한 풀이였다.
‘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세상에!’, 가볍게 몸이 떨렸다.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제공하는 ‘한국어 사전’에서 ‘장님’을 찾았다.
-‘시작 장애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
나의 머릿속에 ‘장님’은 ‘눈이 먼 사람을 높이어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음’도 앞의 ‘표준국어대사전’과 거의 다름이 없었다. 안 되겠다, 옆 동네로 가 보자,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국어사전’을 찾았다.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과 판박이 풀이였다. ‘이런, 나만 몰랐네. 나만 이 뜻을 모르고 정반대 쪽에 있었네.’, 생각하며 갑자기 부끄럼이 밀려 왔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재로 달려가 종이로 된 국어사전을 몽땅 다 꺼냈다.
먼저, 국어사전으로는 발간된 지 가장 오래된 ‘우리말 사전’, 문세영 지음, 단기 4285년, 누렇게 바랜 책갈피에서 곰팡이 냄새가 풍겼다.
-‘소경’을 높이는 말.
다음으로 신기철, 신용철 형제가 함께 땀 흘리며 펼쳐낸 ‘새 우리말 큰 사전’, 컴퓨터를 쓰지 않던 시절에 손에 넣은 책이라 손때 묻은 낱장을 보며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소경을 높이어 일컫는 말.
한글학회에서 어문각을 통해 발간한 ‘새 우리말 큰 사전’.
-‘소경’의 높임말.
‘그러면 그렇지’, 내친 김에 금성교과서에서 내놓은 ‘뉴 에이스 국어사전’,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새 국어사전’ 등 다 펼쳤지만 한결같이 ‘소경을 높이어 일컫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이제 ‘소경’을 찾아야 했다. 국립국어원, 다음, 네이버, 모두 하나같았다.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얕잡아) 이르는 말.
‘어허, 참!’, 그럼 ‘맹인’은? 이건 한자말인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시각 장애인’을 달리 이르는 말.
포털 사이트 ‘다음’.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사람.
포털 사이트 ‘네이버’.
-‘시각 장애인’을 달리 이르는 말.
국립국어원과 글자 하나 틀림이 없이 같다.
이렇게 한참을 헤매듯이 이 사전 저 사전을 뒤지며 시간을 보냈다.
언제부터 ‘장님’이 눈 먼 사람을 얕잡아보는 말이 되었을까? 이 사전 저 사전 뒤지며 문장 안에 들어가서 온전히 제 역할을 맞갖게 해낼 낱말을 찾다가 결국에는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기대곤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장님’의 경우 도무지 마음속으로 승복이 되지 않았다. ‘장님’도 ‘소경’도 모두 ‘시각 장애인’을 얕잡아(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니…….
‘사광은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사광은 앞 못 보는 소경이었다.’
이 두 문장이 처음부터 접전을 벌였던 게 사실이다.
‘사광은 앞 못 보는 맹인이었다.’, 이 문장을 생각하기는 했지만 앞의 두 문장과 벌인 초반전에서 아예 탈락이었다. 그런데 ‘장님’도 ‘소경’도 얕잡아(낮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풀이에 그냥 마음 편하게 지날 수는 없었다.
북쪽에서 펼친 ‘우리말 글쓰기 연관어대사전’을 펼쳤다. 표제어로 등록된 ‘장님’ 항목에는 동의어로 ‘소경’과 ‘맹인’을 올렸고, 잇달아 ‘장님’과 관련을 맺은 예문을 서른 개쯤 풀이했다. 그러고 보니 북쪽에서는 ‘시각 장애인’이라는 말이 없는 듯하다.
결국 나는, ‘사광은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이 문장을 쓰기로 했다.
‘사광은 앞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이었다.’을 택하기에는 도무지 내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민을 하면서 사전 순례를 했다. 그러나 나는 ‘장님’을 ‘시각 장애인을 얕잡아(낮잡아)이른 말’이라는 풀이에 승복할 수 없다. ‘시각 장애인’, 새로 만든 이 말이 오히려 ‘장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그럴까? 이 글을 읽으며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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