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년은 중산국中山國 사람이다. 그는 부모, 형제, 자매와 함께 모두 다 광대였다. 이연년은 법을 어겨 부형腐刑을 받은 뒤 구감狗監 일을 맡았다. ……이연년은 노래에 능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래도 만들었다. 당시 황제는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내는 데 음악에 어울리는 노랫말을 만들어 연주하고 노래를 부를 작정이었다. 이연년은 황제의 뜻을 잘 받들어 새로운 노랫말을 만들어 연주하였다. 그의 누이도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에 이연년은 2천 석의 인수를 차고 협성률로 불렸다.
李延年, 中山人也. 父母及身兄弟及女, 皆故倡也. 延年坐法腐, 給事狗中. …… 延年善歌, 爲變新聲, 而上方興天地祠, 欲造樂詩歌弦之. 延年善承意, 弦次初詩. 其女弟亦幸, 有子男. 延年佩二千石印, 號協聲律.
『사기史記』「영행열전佞幸列傳」
북방에 아리따운 여인 있는데,
세상에 하나뿐인 뛰어난 미인,
한 번 눈길 주니 성이 기울고,
다시 눈길 주니 나라가 기우네.
성이 기울고 나라 기우는 줄 어찌 모르랴만,
아리따운 여인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리.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처음부터 끝까지 이연년李延年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던 한무제漢武帝가 곁에 있던 평양공주平陽公主에게 물었다.
“그래,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진짜 있단 말이오?”
평양공주가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방금 이 노래를 부른 이언년의 누이가 그렇지요.”
한무제는 손위 누이 평양공주의 말을 듣고 당장 그 자리에서 이 여인을 불러들였다. 참으로 절세미인이었다. 젊고 아름다운 데다 춤까지 잘 추었다. 황제의 굄을 한껏 받게 된 이 여인을 역사는 ‘이부인李夫人’이라 부른다. 누이가 황제의 굄을 받자 오라비인 이연년에게도 부귀와 영화가 아름으로 안겨졌다. 황제는 이연년을 협률도위協律都尉에 봉했다. 악부, 곧 음악을 관장하는 관청의 우두머리 자리에 앉힌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한 해 2천 석의 봉록까지 내렸다. ‘황제와 함께 잠자리에 들고 함께 일어나기까지 했다.’는『사기』「영행열전」 의 기록은 그가 황제의 남총이었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이연년은 노래와 춤을 생업으로 하는 집안 출신이었다. 부모와 형제자매가 모두 하나같이 음악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노래와 춤으로써 밥 먹고 사는 광대였다. 그도 광대의 피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노래와 춤뿐만 아니라 노랫말에 곡을 붙이는 데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젊은 시절, 그는 법을 어긴 죄로 궁형을 받았다. 그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역사에는 기록이 없다. 단지 궁형을 받은 그가 궁중에서 개를 돌보는 일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음을 잘 아는 데다 노래와 춤에도 능했기에 그는 황제의 호감을 샀다. 이는 그의 누이 이부인이 황제의 총애를 받기 전이었다. 물론 황제의 남다른 관심을 받기 시작한 때는 이부인이 입궁한 뒤부터였다.
이연년이 죄를 지어 벌로써 받았다는 궁형 이야기를 지나칠 수 없다. 궁형은, 옛날, 생식기를 거세하는 형벌이었다. 궁형은 ‘대벽大辟’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사형’ 다음으로 가혹한 형벌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생식기를 제거하는 궁형은 벌써 은상 시대에도 있었으며 진한 시기에는 음경과 고환을 제거하는 기술도 상당히 완전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궁형은 애초에 남녀 사이의 바르지 못한 성관계를 예방하고 꾸짖기 위하여 마련된 형벌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자가 자신의 권위를 온전하게 유지하려는 데로 목적이 이동하기도 했다. 사마천司馬遷, 장하張賀, 이연년 등이 모두 한무제 때 궁형을 받은 것은 한무제의 타고난 잔혹함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사마천의 경우를 보면 더욱 그렇다. 기원전 99년, 이광李廣의 맏손자 이릉李陵이 한무제의 명을 받들어 겨우 보병 5천 명을 이끌고 흉노와의 전투에 나섰다가 준계산濬稽山 골짜기에서 8만 명이나 되는 흉노 병사와 맞서 용감히 싸우다 결국은 투항한 사전이 발생했다. 한무제는 이릉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던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며 하늘을 찌를 듯이 분노했다. 조정의 문무백관이 모두 황제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지만 오로지 사마천이 앞으로 나서며 이릉 편에 섰다.
“이릉은 겨우 보병 5천으로 흉노 깊숙이 들어가 고군분투하며 수많은 적의 목을 내렸습니다. 그가 비록 어쩔 수 없는 형편으로 투항했지만 이는 뒷날 맞갖은 기회를 찾아 한왕실에 보답하기 위한 행동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사마천의 이 말은 흉노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이사장군 이광리가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이사장군 이광리가 누구인가? 바로 황제가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는 이부인의 친정 오라비가 아닌가. 사마천의 직언은 황제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황제의 말 한 마디가 그대로 법이었던 때, 황제는 사마천의 남성을 거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글을 읽은 선비들은 자존심 하나로 세상을 버텼다. 이 때문에 궁형을 당한 이는 대부분 제 목숨 스스로 끊음으로써 하나밖에 없는 존엄을 지키려고 했다. 하지만 사마천은 이 치욕을 참았다. 머릿속에 가득한 『사기』 원고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연년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죗값으로 궁형을 받았는지 역사에는 기록이 없다. 내시가 된 그가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할 정도로 큰 굄을 받았지만 그의 끝장은 참혹했다. 광대 집안 출신이었지만 맏형 이광리는 무관으로서 이사장군貳師將軍이라는 호칭까지 얻었다. 병사들을 이끌고 저 먼 서쪽 대원국大宛國의 이사성貳師城을 정복한 공을 인정받으며 얻은 칭호였다. 이 집안의 둘째 이연년은 비록 궁형을 당하고 내시로 입궐하긴 했지만 타고난 끼를 발휘하며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할 정도였다. 그는 그가 짓고 곡을 붙인 노래로써 누이 이부인을 최고 권력자 황제 곁으로 데려왔다. 게다가 이부인은 황제에게 아들을 안겼다. 나중에 창읍왕昌邑王에 봉해진 유박劉髆이 바로 이 사람이다. 또 한 사람 막내 이계李季가 있다. 이계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역사에서 찾을 수는 없지만, 올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후궁들과 음란한 행위를 함으로써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다는 짤막하고 단편적인 기록이 보인다. 어떻든 후궁들과 벌인 음란한 행위로 촉발된 황제의 노여움은 막내 이계의 목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형제들이 몽땅 다 연좌되어 목을 내려야 했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맏형 이광리는 흉노를 치기 위하여 장안을 떠나기 전 승상 유굴모劉屈氂와 남몰래 만나 창읍왕 유박을 태자로 만들 모의를 했다. 그가 떠난 뒤 이 사건이 발각되어 유굴모는 허리를 베어 죽이는 형벌, 요참을 받으며 세상을 버렸다. 그리고 이광리는 흉노에게 투항했다가 결국은 그곳에서 피살되며 한 생을 마쳤다. 그의 가족은 하나도 빠짐없이 이에 연좌되어 몰살당했다.
한때 이연년의 음악적 재능에 푹 빠진 한무제는 흥이 날 때면 이연년과 손을 맞잡고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였다. 당시 한나라 궁중에서 사용하던 대부분의 악곡들은 모두 이연년의 손을 거쳐 창작될 만큼 그의 천부는 대단했다. ‘북방에 아리따운 여인 있는데, …….’는 『가인곡佳人曲』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이연년이 자기 누이를 궁중에 데려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든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어떻든 이 곡 때문에 이부인은 궁궐로 들어와서 황제의 굄을 받으며 비가 되었고, 뒤따라 이연년도 황제의 총애를 한껏 받았다.
그는 이제 자기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큰문을 활짝 열어젖히기 시작했다. 황궁에서 쓰일 경축 음악은 물론 제사 음악까지 악보로 만들었다. 이연년은 융통성이 대단한 음악가였음이 분명하다. 작곡의 풍격도 변화무쌍하여 서로 다른 악기로써 서로 다른 악곡을 변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사마상여司馬相如 등 여러 문인들의 작품을 바탕으로 편곡하는 데 능했다. 이연년이 곡을 붙이면 문인들의 작품이 또 다른 예술적 경지에 이르렀다.
이부인이 한무제의 총애를 받을 때가 광대의 피를 받으며 함께 자란 이들 형제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이부인이 병을 얻어 끝내 세상을 떠나자 꼭짓점에 이르렀던 이들의 시대도 끝장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하여, 막내 이계가 후궁과 벌인 음란한 짓거리는 결정적 한 방이었다.
“감히 궁녀와 사통하다니!”
이계는 자기 누이 이부인의 권세가 대단할 때처럼 제 멋대로 행동했다. 자신을 절제할 줄 모르고 궁녀들과 내통하며 못할 짓을 마구 벌였던 것이다. 어쩌면 황제는 이연년이 자기 아우 이계를 감싸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더욱 노여워했을지도 모른다.
“두 놈의 목을 몽땅 내려라.”
황제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게 끝이었다. 음악에 큰 재능을 보였던 이연년의 우주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현종은 남달리 미색을 좋아하여 나라 기우는데,
여러 해 세상 다스려도 미인 얻지 못했네.
漢皇重色思傾國,
御宇多年求不得.
이언년이 세상을 떠난 지 900여 년 뒤,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현종과 양귀비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장한가長恨歌』로 노래했다. 이 칠언고시의 첫 머리에 쓰인 ‘경국傾國’은 바로 이언년의 『가인곡』을 다시 읊으며 끌어왔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원형,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을 향한 그리움이다.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라 망쳤다는 이야기는 중국 고대사에 수도 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나는 여인의 아름다움 때문에 나라가 기울었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옛적에 나라를 주도적으로 이끈 이는 거의 다 남성이었으며, 권력을 손에 쥔 이 곁에 알짱거리며 자기 손에 쥐어질 권력의 고물을 차지하려고 기를 썼던 이도 거의 다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역사를 기록한 이도 남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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