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토번吐蕃으로 간 당나라의 화친공주-문성공주文成公主

촛불횃불 2022. 4. 2. 19:00

 나라의 기운이 한창 번성하던 시대에는 최고 통치자의 위세에 전혀 막힘이 없었다. 당나라 태종 이세민이 그랬다. 그가 나라를 이끄는 힘이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우렁찼다. 당의 북쪽에 동서로 제법 큰 세력을 펼치던 동돌궐과 서돌궐도 이세민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네 해만에 무릎 꿇렸고, 십 년도 채 안 된 정관 9(AD 635)에는 당의 왼쪽 옆구리를 집적거리던 토욕혼土谷渾을 물리쳤다. 몇 해 뒤, 정관 12(AD 638)에는 송주松州(지금의 스촨성四川省 쑹판현松潘縣)에서 벌어진 큰 싸움에서 토번에게 큰 패배를 안겼다.

 

당태종 때의 강역

 당시 송주를 미리 점령했던 토번의 군주는 쑹짼감뽀松贊干布였다. 그는 젊은 나이에 칭장고원靑藏高原에 여기저기 흩어진 부족들의 잦은 내란을 잠재우고 이들을 하나로 모아 왕국을 건설한 인물이다. 그는 태종 이세민이 홍화공주弘化公主를 토욕혼의 카한 낙갈발諾曷鉢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송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당에게 패배한 쑹짼은 당에 복속하는 길만이 자기 왕국을 보존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사신을 장안으로 보내 정식으로 공주를 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장안에는 각국에서 온 구혼 사신들이 줄을 이었다. 대당 성세의 진면목은 이런 점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화친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사신들에게 시험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토번에서 보낸 사신은 황금 5천 냥과 진귀한 물건 수백 점을 가지고 장안으로 왔다. 이 사신은 토번에서 두 번째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대상大相 까르동짠噶爾祿東贊이었다. 그는 참으로 지혜가 넘치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 태종 이세민이 제시한 자못 험난한 여섯 고개를 무사히 넘었다. 라싸에 있는 포탈라 궁에는 이 험난한 과정을 벽화로 남겨 옛날을 증언하고 있다.

 

포탈라궁 벽화(부분)

 -좌우 양쪽 굵기가 같은 나무 막대기를 보고 뿌리 쪽을 찾으라는 것이 첫 번째 문제였다. 이 문제를 세밀하게 분석하던 까르동짠의 머릿속에 한 점 빛이 반짝 켜졌다. 그는 당장 이 막대기를 물속에 집어넣었다. 한쪽이 물속으로 기우뚱 기울었다. 뿌리 쪽이었다. 다른 쪽보다 밀도가 더 높았던 것이다.

 -당 태종은 가운데에는 어지럽게 여러 갈래로 갈라져 섞갈리기 쉬운 좁은 길이 이리저리 미로처럼 뚫렸지만 겉에는 이쪽과 저쪽에 각각 구멍이 하나씩 뚫린 옥덩어리를 내놓았다. 그리고 가느다란 실을 이쪽 구멍에 넣어 저쪽 구멍으로 빼내라는 게 두 번째 문제였다. 까르동짠이 이 문제를 푼 방법은 보는 이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경이로웠다. 먼저 그는 한쪽 구멍에 벌꿀을 살짝 발랐다. 그리고 개미 한 마리를 잡아 그 허리에 실을 동이더니 다른 한쪽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개미는 벌꿀의 단맛에 이끌려 여러 갈래로 어지럽게 갈라진 좁은 길을 통과하여 다른 쪽 구멍으로 무사히 나왔다.

-당 태종은 1백 마리 암말과 이들이 이제 막 낳은 망아지 1백 마리를 한데 마구 섞은 다음 어미와 새끼를 제대로 짝짓는 문제를 세 번째로 내놓았다. 여기에 참여한 많은 사신들이 털 색깔이나 무늬 등을 근거로 분별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까르동짠이 꺼낸 묘수는 달랐다. 그는 1백 마리나 되는 망아지를 울안에 가두고 옹근 하루 아무 먹이도 주지 않았다. 이튿날, 고픈 배를 참을 수 없었던 망아지들은 울타리를 풀기 바쁘게 어미에게 달려가 배를 채웠다. 당 태종이 낸 문제를 정확하게 해결한 까르동짠은 다음 문제를 기다렸다.

-병아리 1백 마리와 이들을 품에 안고 부화시킨 암탉 1백 마리를 한데 섞은 다음 병아리와 어미를 짝짓는 문제가 네 번째로 까르동짠 앞에 나왔다. 그는 이들의 생활 습성을 면밀히 생각하며 문제 해결의 열쇠로 삼았다. 병아리는 먹이를 주거나 위험이 눈앞에 닥치면 하나같이 어미 쪽으로 달려간다는 사실을 그는 평소에 눈여겨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먹이가 있어도 어미 쪽으로 달려가지 않는 병아리가 있기 마련이었다. 이때, 까르동짠은 솔개 따위의 천적이 우는 소리를 흉내 냈다. 그러자 말 안 듣던 병아리들이 깜짝 놀라며 어미 품으로 뛰어들었다.

 

구혼사절단의 모습

-당 태종은 양 한 마리와 술 한 동이를 하루에 다 먹고 마신 뒤 거처로 돌아가라는 문제를 다섯 번째로 냈다. 많은 사신들이 술 한 동이를 다 마시기도 전에 취하여 쓰러졌다. 술 한 동이를 다 마시고 양 한 마리를 다 먹은 이는 자기 거처로 갈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쓰러졌다. 그러나 까르동짠은 술과 고기를 입에 대기 전에 거처에서부터 술 마시고 고기 먹는 곳까지 끈으로 연결해 놓았다. 술 한 동이 다 마시고 양 한 마리 다 먹고도 이 끈을 따라 순조롭게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문제도 참으로 까다로워서 풀기 힘들었다. 당 태종이 5백 명이나 되는 궁녀 가운데 문성공주를 섞어 넣은 뒤, 진짜 문성공주를 찾아내라고 일렀던 것이다. 똑같은 옷에 하나같은 분장도 그랬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색깔의 쓰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신들이 문성공주를 가려내려고 갖은 방법으로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까르동짠은 미리 준비를 완전하게 갖추었기에 단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문성공주에게는 꿀벌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향내가 난다는 사실을 어느 궁녀의 어머니로부터 알아냈던 것이다. 이날, 까르동짠이 꿀벌 여러 마리를 날리자 이들은 어느 궁녀 어깨 위에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바로 문성공주였다. 마지막 한 문제까지 다 알아맞힌 사신은 까르동짠 한 사람밖에 없었다.

 

당태종 이세민

 당 태종은 사촌 이도종李道宗을 강하왕江夏王에 앉히고, 이도종의 딸을 문성공주에 봉했다. 그리고 쑹짼감뽀를 부마도위 겸 서해군왕西海郡王에 책봉했다. 토번의 도성 라싸까지는 7천 리가 넘는 멀고 먼 곳이었다. 이제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멀고 먼 이 길을 떠난 문성공주는 쉰다섯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옹근 마흔 해를 낯설고 물선 타향에서 당나라와 토번 사이의 화친과 평화를 위해 바쳤다.

 쑹짼감뽀가 문성공주를 아내로 맞은 뒤, 중원과 토번 사이에 사신과 상인들의 왕래도 잦았다. 쑹짼감뽀도 중원의 문화를 앙모한 나머지 갖옷을 벗어던지고 명주로 만든 옷을 입기 시작했다. 게다가 토번의 귀족 자제들을 장안으로 보내 그곳 문물을 배우고 익히게 했다.

 

토번으로 가는 문성공주

오늘날 라싸 관광에 나선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포탈라 궁이다. 이 궁전은 현숙한데다 지혜가 넘치는 문성공주를 마음속 깊이 사랑한 쑹짼감뽀가 오로지 그녀를 위해 건축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이 궁전은 자연 재해와 전쟁 등으로 훼손되었지만 17세기에 두 차례에 걸친 확장 공사로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렀다. 이 궁전의 본채는 13층으로 높이만 해도 117m에 달하고 차지한 면적도 36가 좀 넘을 정도로 기세가 당당하다.

 영휘永徽 원년(AD 650), 서른세 살 한창 나이에 쑹짼감뽀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에도 문성공주는 30년이나 토번에서 계속 생활하며 당 왕조와 토번의 우호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였다. 포탈라 궁에는 그녀가 중원에서 라싸에 도착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온갖 간난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벽화로 남아 있다. 여기에는 토번의 사신으로 장안에 온 까르동짠이 당 태종이 내놓은 여섯 고개를 넘은 지혜가 이들 벽화 속에 한 부분을 차지한다.

영륭永隆 원년(AD 680), 문성공주도 세상을 떠난다. 그녀의 나이 쉰다섯, 꽃다운 나이 열여섯에 화친공주로 토번에 온 지 옹근 마흔 해, 한 여인으로서는 참으로 힘든 세월이었을 것이다. 다른 화친공주처럼 그녀에게도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전설이 된 문성공주

 그해, 문성공주는 아버지 어머니와 헤어지며 장안을 떠난 뒤, 산 넘고 물 건너 간난과 신고를 겪으며 거칠고 을씨년스런 고원에 이르렀다. 사랑하는 가족과 고향 땅이 점점 멀어지자 멀리 떨어진 장안에 계신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밀려왔다.

, 생각이 나면 이 거울을 보라고 했었지!’

그때, 어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던 것이다.

얘야, 그리울 때면 이 거울을 보아라, 네 어미가 거기 있을 터이니.”

일월보경日月寶鏡이라 이름 붙여진 이 거울을 얼른 꺼낸 문성공주는 두 손으로 가만히 들고 들여다보았다. 순간 깜짝 놀란 그녀는 이 거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문성공주가 거울을 통해 본 것은 수심이 가득하여 까칠해진 제 모습이었던 것이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거울은 그 자리에서 우뚝 높은 산으로 변했다. 훗날, 사람들은 이 산을 일러 일월산日月山이라 불렀다.

 또 하나, 토번의 사신으로서 여섯 고개를 넘은 까르동짠의 지혜에 감탄한 당 태종이 그에게도 낭야장공주琅琊長公主의 외손녀 단씨段氏를 내리려고 했다. 당 태종은 이로써 당 왕조에 그의 힘을 보태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까르동짠은 태종의 호의를 완곡한 언사로 거절했다.

저는 본국에 부모님께서 정해준 아내가 있습니다. 눈치 빠르고 영민한 이 아내를 차마 멀리 내칠 수는 없습니다.”

그 마음, 참으로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시간과 공간을 셈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쑹짼감뽀松贊干布

 문성공주는 당시 한족으로서는 변새의 평화 유지를 위한 화친공주로서 정치적으로도 대단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 더하여 한족과 장족의 문화 교류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러나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489백여 수에 이르는 작품 가운데 문성공주의 화친 사건을 직접적으로 읊은 시가 한 편도 없다. 일월산의 신기한 전설도 당나라 시인들의 시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문성공주가 세상을 떠난 지 15십여 년 뒤, 시인 진도陳陶농서행隴西行중에 이런 구절이 있을 뿐이다.

 

이들 군주와 화친한 뒤에야,

절반의 오랑캐 풍속 한족을 닮았네.

 

自從貴主和親後,

一半胡風似漢家.

 

시인 진도陳陶

  토번이 문성공주를 받아들인 뒤에 그들의 문화와 습속이 한족에게 동화된 상황을 묘사했을 따름이다. 당나라 시인들에게 문성공주는 서한 때 서쪽 오손으로 간 화친공주 세군이나 해우, 그리고 북쪽 흉노 땅으로 간 화친공주 왕소군처럼 시적인 흥취를 일으키기에는 무언가 부족함이 있었던 듯하다. 그것은 어쩌면 연약한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슬픔의 농도 때문에 생긴 부족함일지도 모른다. 기쁨이나 행복보다는 슬픔이나 불행이 인간에게 주는 감정의 울림이 언제나 더 크고 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