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오손烏孫에서 눈물 흘리며 시를 읊은 공주-세군細君

촛불횃불 2022. 4. 3. 07:24

 오손烏孫이 말 1천 필을 건네고 한나라 딸을 맞이하려고 하자, 한나라는 종실의 딸인 강도옹주江都翁主를 오손왕의 아내로 보냈고, 오손왕 곤모昆莫(그녀를) 우부인으로 삼았다.

 

 烏孫以千匹馬聘漢女, 漢遣宗室女江都翁主往妻烏孫, 烏孫王昆莫以爲右夫人.

사기史記』「대원열전大宛列傳

 

 

한고조 유방 흉노를 치다가 포위되었는데,

어느 날 곤경에서 벗어나려 화친을 도모했네.

그때에도 날카로운 검 있었는데,

어찌하여 봉춘군을 죽일 이 없었던고.

 

漢帝西征陷虜塵,

一朝圍解議和親.

當時已有吹毛劍,

何事無人殺奉春.

 

 서한의 개국 황제 고조 유방이 백등산에서 흉노의 선우單于 묵돌冒頓에게 밤낮 이레 동안 포위되었다가 겨우 빠져나와 조정으로 돌아왔다. 아직도 강대한 묵돌의 군대가 북쪽 변경을 걸핏하면 넘보는 상황에서 평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이를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겠소?”

 이때 앞으로 나서며 계책을 내놓은 이가 이 시 속에 등장하는 인물 봉춘군 유경劉敬이다.

백등산 전투의 한 장면-유방은 흉노의 선우 묵돌에게 이레 동안 갇혔다가 겨우 탈출했다.

 

 “우리 한 왕조는 이제 막 천하를 평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들은 아직 쌓인 피로를 풀지 못했기에 흉노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묵돌은 제 아비를 죽이고 군주의 자리에 올라 아비의 수많은 희첩까지 차지한 인물입니다. 그자는 무력으로 위세를 올렸기에 인의와 도덕으로 무릎 꿇릴 수 없습니다. 오로지 화친을 도모하여 뒷날 그자의 후손이 우리 한 왕조에 신복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그렇게 하지 않을세라 두려울 뿐입니다.”

 유경이 이야기한 화친은 황실의 공주를 흉노의 선우 묵돌에게 시집보냄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 평화를 도모하자는 말이었다. 이로부터 1천 년도 더 지나 당나라 때 시인 호증胡曾은 역사적 사실을 회고한 이 시 평성平城을 통하여 화친을 굴욕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흉노의 선우 묵돌

 한 고조 유방은 유경이 내놓은 대책에 고개를 끄덕이며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묵돌 선우에게 보내려고 마음을 굳혔다. 노국공주가 누구인가? 정실부인 황후 여치呂雉와의 사이에 낳은 하나뿐인 공주였다. 유방의 결정을 알게 된 여치는 기절할 지경이었다. 더구나 당시 노국공주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결국 울고불고 매달리는 여치를 이기지 못하고 노국공주를 대신하여 왕실의 다른 여인을 묵돌에게 시집보냈다. 이것이 서한 시대 화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200, 한 고조 유방이 묵돌에게 보낸 공주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뒷날 사람들은 이민족 군주에게 화친을 위해 시집보낸 공주를 화번공주和蕃公主라 일렀는데, 서한 때에는 이런 공주가 모두 열여섯 명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있는 공주는 겨우 셋, 세군공주細君公主가 그 첫 번째이다.

 

세군공주

 서한 왕조에서 가장 오랫동안 황제의 자리를 지켰던 무제武帝가 통치하던 시절. 앞서 문경의 치세를 거치며 한껏 커진 국력은 야심이 넘쳤던 무제를 그냥 두지 않았다. 무제는 그동안 국경을 넘보며 수없이 집적거렸던 흉노를 그대로 두고는 안정을 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손烏孫과 손을 잡고 함께 흉노를 견제할 계책을 세웠다. 이 계책은 장건張騫이 무제의 명을 받들어 서역으로 간 역사적 사건과 관계 깊다.

 당시 무제는 흉노가 일으키는 소요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밤잠을 제대로 못들 정도로 골머리를 앓았다. 흉노가 한나라 군대의 몇 차례에 걸친 타격으로 저 멀리 고비사막 북쪽으로 물러서긴 했지만 언제 또 다시 일어설지 알 수 없었다. 무제는 서역의 여러 나라와 어깨를 겯기로 했다. 여기에는 오손과 손을 맞잡고 흉노의 오른팔을 잘라야 한다는 장건의 건의가 큰 작용을 했다. 중랑장에 임명된 장건은 3백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다시 서역으로 향했다. 오손에 이른 장건은 이 나라 곤막昆莫에게 이렇게 일렀다.

장건

우리 한 왕조와 손을 잡고 흉노를 멀리 몰아냅시다. 결맹의 조건으로 우리 한 왕조의 공주를 임금께 시집보내리다.”

곤막은 흉노가 두려웠다. 성급하게 허락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뒤 오손은 한 무제 원정元鼎 2(기원전 115), 장건이 장안으로 돌아가려 할 때 수십 명의 사신에게 예물을 갖고 장건과 함께 한의 도성으로 가도록 했다. 장안에 온 오손의 사신들이 휘황찬란한 궁전과 한의 문물에 눈이 휘둥그레졌음은 물론이다. 오손으로 돌아간 사신들은 그들이 본 장안을 곤막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한과 어깨를 결으려는 마음을 드디어 강하게 굳히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이제는 오손이 한나라에 먼저 손을 내밀었다. 사신을 보내 말을 바치며 화친을 원한다는 의사를 강하게 전달하며 황실의 공주를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무제는 당장 여러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런 뒤,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좋소이다. 다만 먼저 예물을 보내도록 하시오. 그런 뒤에야 공주를 보내겠소.”

 

서한 무제 때의 강역

 오손은 좋은 말 1천 필을 한나라 조정에 예물로 올렸다. 한나라 조정에서는 강도왕江都王 유건劉建의 딸 세군을 오손의 곤막 엽교미獵驕靡에게 보냈다. 푸짐한 혼수는 물론 그녀를 돌볼 환관에 몸종까지 수백 명 넘게 딸렸다. 게다가 수레와 말, 그리고 황실에서나 사용하는 갖가지 세간까지 함께 보냈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흉노는 오손이 한 왕조에 기울세라 겁을 먹고 자기 딸을 똑같이 오손의 곤막 엽교미에게 시집보냈다. 엽교미는 세군을 우부인으로, 흉노의 딸을 좌부인으로 삼았다.

시집올 때 함께 온 목수들이 세군을 위해 궁실을 지었다. 거처가 마련된 세군은 곧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치적 활동이라 이를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맛있는 요리를 손수 만들어 잔치를 베풀고 왕과 가까운 귀인들에게 비단 따위를 선물로 내렸다. 이로써 오손 귀족들의 환심을 널리 얻었다. 하지만 엽교미는 이미 늘그막이었고 언어마저 서로 통하지 않았기에 세군공주는 아픈 마음을 달래기 힘들었다. 서로 다른 생활 습관도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오손의 곤막 엽교미는 손자 군수미軍須靡에게 세군을 안길 생각을 했다. 오손의 풍속은 형제가 홀로 된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들일 수 있었다. 아들도 생모가 아니라면 홀로 된 계모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더구나 할아버지가 아직 세상을 떠나지 않았어도 손자가 할아버지의 새로 맞은 아내를 취할 수 있었다. 오손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이 풍속을 세군공주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군수미

우리 한 왕조는 오손과 어깨를 겯고 흉노를 무릎 꿇릴 작정이니, 공주는 오손의 풍속을 따르라.”

 군수미에게 시집갈 마음이 전혀 없었던 세군이 한 무제에게 글을 올렸지만 돌아온 답은 이렇게 싸늘했다.

군수미는 세군을 아내로 맞았다. 곧이어 엽교미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군수미가 오손의 곤막이 되었다. 세군은 군수미에게 딸을 안겼다. 공주의 이름은 소부少夫로 붙여졌다. 오손에 온 지 다섯 해가 지난 어느 날, 세군은 세상을 떠났다. 박학다식하고 다재다능했던 그녀는 격에 맞으면서도 다정다감한 언행으로 오손에 온 뒤에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세군공주의 운명은 출발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 유건은 강도왕이었지만 모반을 획책하다 사전에 발각됨으로써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는 이 때문에 법 앞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세군은 나이 어리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화를 면하긴 했지만 영락한 신분으로 민간에 섞여 살아야 했다. 이런 세군을 다시 찾아 공주로 봉했던 건 한 무제의 외교 전략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오손의 왕비가 됨으로써 한 왕조 변방은 오랫동안 평화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세군은 유목으로 생활하던 그곳에 중원의 선진된 문화의 씨를 뿌리는 데 일조했다.

 

오손으로 가는 길

 그러나 습속이 전혀 달랐던 그곳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리고 얼마나 외롭고 슬펐을까? 날마다 동쪽 벌판 저 멀리 하늘과 맞닿은 곳을 바라보며 또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을까? 생각하면, 가슴 저리도록 애잔하다. 그녀의 작품으로 알려진 비수가悲愁歌가 여기 있다.

 

한 왕조가 나를 하늘 저쪽 끝으로 시집보내어,

멀리 이국 오손왕에게 맡기었네.

천막이 집이 되고 깃발이 담장 되고,

고기로 밥을 삼고 양젖으로 음료 삼네.

앉으나 서나 고향 생각에 멍든 내 가슴,

백조 되어 고향으로 가고 지고.

 

吾家嫁我兮天一方,

遠托異國兮烏孫王.

穹廬爲室兮旃爲墻,

以肉爲食兮酪爲漿.

居常土思兮心內傷,

愿爲黃鵠兮歸故鄕.

 

영벽수인

 슬픈 역사에는 언제나 가슴 저린 전설이 따르게 마련이다. 앞서 세군이 강도국에서 장안으로 오는 길에 일행이 안휘성安徽省 영벽靈璧을 지날 때, 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세군은 멀리 고향 하늘을 바라보며 큰 바위를 손으로 짚고 차마 발걸음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도 오래오래. 그러다 바위 위에 깊이깊이 손자국을 남겼다. 이 손자국을 뒷날 어떤 장인이 그대로 본떠서 새기니 바로 영벽수인靈璧手印이다. 꽃다운 나이 열일곱에 저 멀고먼 이국 땅 오손으로 떠나는 세군의 아픈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었으랴.

 참으로 슬픈 이야기이다. 뒷사람은 슬픈 이야기를 아름다움으로 자리바꿈하여 가슴에 간직한다. 슬픔도 아름다움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