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진晉 나라 악사 사광師曠은 날 때부터 앞을 못 보았다. 그는 앞을 못 보았지만 당시 이 나라 군주 평공平公 앞에서도 거침없이 시비를 따지며 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한 편의 글을 쓰기에 넉넉한 글감이었다. 그런데 나는 첫 문장부터 속앓이를 해야 했다.
"사광은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한 편의 글을 위해 맨 앞에 내세운 이 문장에서 낱말 하나가 옹근 하루 내 속을 태웠다. '장님' 때문이었다. '장님'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본 게 속앓이의 머리였다. 먼저 국립국어원에서 인터넷에 올린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았다.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올림말 '장님'에 대한 풀이였다.
'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세상에!', 가볍게 몸이 떨렸다. '소경'이나 '봉사'라는 낱말과 똑같이 풀이하다니!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제공하는 '한국어 사전'에서 '장님'을 찾았다.
-'시각 장애인'을 얕잡아 이르는 말.
내 머릿속에는 '장님'은 '눈이 먼 사람을 높이어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다음'도 앞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다름이 없었다. 안 되겠다. 옆 동네로 가 보자.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국어사전'을 찾았다.
-'시작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과 판박이였다. '이런 나만 몰랐네. 나만 이 뜻을 모르고 정반대 쪽에 있었네.', 생각하니 갑자기 부끄럼이 밀려 왔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서재로 달려가서 종이로 된 국어사전을 몽땅 다 꺼냈다.
먼저, 국어사전으로는 발간된 지 가장 오래된 '우리말 사전', '훈민정음이 발표된지 사백 아흔 돐을 맞는 병자년 시월 스무 여드렛날', 지은이 문세영 선생이 '지은이 말슴'을 한 날짜까지 새겨진 이 책, 누렇게 바래고 곰팡이 냄새까지 풍기는 이 책에서 올림말 '장님'을 찾았다.
-'소경'을 높이는 말.
다음으로 신기철 신용철 형제가 함께 땀 흘리며 펼쳐낸 '새 우리말 큰 사전', 가난한 시절, 일정 금액을 다달이 나누어 내면서 내 손에 넣은 책, 손때 묻은 낱장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장님'을 찾았다.
-'소경'을 높이어 일컫는 말.
이제 한글학회에서 어문각을 통해 발간한 '우리말 큰 사전'.
-'소경'의 높임말.
'그러면 그렇지.', 내친 김에 금성교과서에서 내놓은 '뉴 에이스 국어사전',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새 국어사전' 등을 다 펼쳤지만 한결같이 '소경을 높이어 일컫는 말'이라고 풀이했다.
어쩔 수 없는 일, 이제 '소경'과 '봉사'를 찾았다. 인터넷 사전이나 종이 사전이나 모두 하나 같았다.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얕잡아) 이르는 말.
'어허, 참!', 그럼 '맹인'은? 이건 한자말인데.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시각 장애인'을 달리 이르는 말.
포털 사이트 '다음'.
-눈이 멀어 보지 못하는 사람.
포털 사이트 '네이버'.
-'시각 장애인'을 달리 이르는 말.
국립국어원과 글자 하나 틀림이 없이 같다.
이렇게 한나절을 헤매듯이 이 사전 저 사전을 뒤지며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 '장님'이 눈 먼 사람을 얕잡아보는 말이 되었을까? 문장 안에 들어가서 온전히 제 구실을 맞갖게 해낼 낱말을 이 사전 저 사전 뒤지며 찾다가 결국에는 국립국어원에서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에 기대곤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장님'의 경우 도무지 마음속으로 승복이 되지 않았다. '장님'도 '소경'이나 '봉사'처럼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얕잡아) 이르는 말이 되고 말았으니...... .
'사광은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사광은 앞 못 보는 소경이었다.'
이 두 문장이 처음부터 접전을 벌이긴 했지만 '소경'은 악사 사광의 인품에 아예 어울리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고백하거니와 '장님'이나 '소경'을 대체할 낱말을 생각하면서 '시각 장애인'이라는 낱말은 아예 머릿속에 떠올리지도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북쪽에서 펼친 '우리말 글쓰기 연관어 대사전'을 펼쳤다. (이 책은 우리쪽 '황토출판사'에서 출간했다. )표제어로 등록된 '장님' 항목에는 동의어로 '소경'과 '맹인'을 올렸고, 잇달아 '장님'과 관련을 맺은 예문을 서른 개쯤 벌여 놓았다. 그러고 보니 북쪽에는 '시각 장애인'이라는 낱말이 아예 없는 듯하다.
어떻든 나는, '사광은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이 문장을 쓰기로 했다.
'사광은 앞 못 보는 시각 장애인이었다.'를 택하기에는 도무지 내 마음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나절을 사전 순례를 했지만 '장님'을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얕잡아) 이르는 말'이라는 풀이에 승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각 장애인', 새로 만든 이 말이 '장님'을 높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할 분도 있을 테지만, 나는 이 낱말이 오히려 '장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한다. 나만 그럴까? 한국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대다수의 언중은 어떻게 느낄까? 궁금하다.
'소경', '귀머거리', '벙어리'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각 장애인', '청각 장애인', '언어 장애인'이라는 이 낱말의 경우는 어떨까?
*이 글은 '촛불횃불'의 창작품입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