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적에 기린을 본 적이 없는 이가 일찍이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기린은 어떻게 생겼소?”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린은 꼭 기린처럼 생겼소.”
물었던 이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린을 진즉 보았더라면 그대에게 묻지도 않았을 거외다. 그런데 그대가 기린은 꼭 기린처럼 생겼다고 말하니, 어떻게 알 수 있겠소?”
그러자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이가 이렇게 일렀다.
“기린은요, 몸은 사슴의 몸이요, 꼬리는 소의 꼬리이며, 발굽은 사슴의 발굽이고, 등은 말의 등입니다.”
물었던 이가 그제야 알아들었다.
모자牟子의 『모자 이혹론牟子理惑論』가운데 한 부분을 가져왔다.
기린을 본 적 없는 이에게 ‘기린은 꼭 기린처럼 생겼다.’는 설명은 듣는 이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오리무중五里霧中’에 빠진 이에게 필요한 조치는 안개를 걷어내는 일이다.
남을 가르치는 일도 예술이다. 기린은 보지 못했지만 사슴이나 소, 그리고 말을 늘 보아서 익히 아는 이에게는 앞의 예처럼 이르면 되겠지만, 사슴이나 소, 그리고 말도 본 적이 없는 이의 기린에 대한 물음이라면 또 다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다.
듣는 이의 눈높이 가늠하기는 이런 상황에서 항상 앞세워야 할 기준이다. 자칫 잘못하면 ‘오리무중’이 ‘십리무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昔人未見麟, 問嘗見者 : “麟何類乎?” 見者曰 : “麟如麟也!” 問者曰 : “若吾嘗見麟, 則不問子矣. 而云麟如麟, 寧可解哉?” 見者曰 : “麟, 麋身牛尾, 鹿蹄馬背.” 問者霍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