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제물론齊物論
『제물론齊物論』은『장자莊子·내편內篇』가운데 두 번째 편이다. 이 편은 모두 다섯 개의 상대적이고 독립적인 이야기를 잇달아 병렬하여 엮었다.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는 비록 관련된 구절이나 단락의 표시가 없을지라도 내용은 통일된 주제와 사상이 관통하고 있다. 게다가 개괄한다는 점에서, 또는 사상의 깊이라는 면에서 한 걸음 더 깊이 나아가며 이어지면서도 이어지지 않는 것 같고 끊어질 듯 이어질 듯 앞뒤가 관통하고 서로 호응하는 멋진 짜임을 보인다.
‘제물齊物’은 그 어떤 차별도 시비도 미추도 선악도 귀천의 구분도 없이 모든 사물의 근본은 모두 똑같다는 뜻이다. 장자는 만물은 모두 혼연일체가 되어 끊임없이 대립하면서 변하기 때문에 구별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장자의 이런 견해는 사물의 한쪽만 붙안고 강조하기에 자못 한쪽으로 치우친 면이 있다. 문장 속에도 변증법적인 관점을 보일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형이상학적인 관점에 빠져든다. 그러나 그의 논리적인 서술 중에서 심오한 사고와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우주관과 인식론 문제를 언급하고 있으며, 이는 중국 고대 철학 연구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제물론齊物論』은 곧 만물은 가지런하다는 주장을 펼치는 글이다. 장자는 만사만물萬事萬物을 하나로 가지런하게 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세상 만물은 평등하다. 사람과 동물도 차이가 없고 정확과 착오도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물이 모두 이와 같다고 본다.
이 편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는 장자의 세속에 대한 부정이며 차별 없는 자유로운 경지에 대한 동경이다. 장자는 차별 없는 정신적 자유의 경지에 도달하려면 세속에서 생각하는 관념적 속박을 벗어나 외물과 자아의 차이는 물론 시비의 차이까지도 잊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국시대는 백가쟁명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유세객들은 모두 웅변술에 뛰어나서 서로 자기 관점에 집착하여 아옹다옹 다툼을 벌여 해치는 일을 예사로 했으니 참으로 ‘도道’의 마음을 진정으로 체득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태연하게 뜻을 밝히며 스스로 기쁨을 터득하는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수많은 이들은 생활 태도에서 이미 ‘도道’와는 등을 지고 떠나고 말았다. 장자는 이들을 매섭게 풍자했다. 지식인이라는 세객說客들이 기뻐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환희했지만 그들의 우려와 감탄은 그치지 않았으며 불안과 공포는 잇달았다. 이는 마치 음악이 허공의 어떤 곳에서 울려오는 것과 같았다.
이런 갖가지 정서와 심리 상태는 밤낮으로 자기 앞에서 뒤바뀌며 변화했지만 이런 것들이 어떻게 싹을 틔우는지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했고 입을 열 때마다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리는 멀어지고 있었다.
장자는 인간의 감정과 사상을 포함한 온갖 사물이 천차만별이라는 점을 인정했지만 근본적으로 제일齊一이라고 보았다. 도道의 관점에서 본다면 만물은 일체로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것이다.
장자는 시是와 비非,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는 데 집착하는 고집불통을 비판한다. 그는 ‘도道’ 자체는 언어로서 드러낼 수 없는 자연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기에 진리를 추구하고 ‘도道’를 찾는 이는 아무런 속박도 없이 유유자적하며 기쁨 넘치는 마음으로 ‘소요逍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장자는 이런 배경 아래, 마음의 족쇄를 풀어제끼고 집착을 깨뜨려 없애고 자유로운 세계에 이르려고 시도했다. 장자가 이렇게 절박하게 ‘제물론齊物論’을 내세운 것은 당시 논객들의 논변이 외적 요소에 의해 좌우된 데다 여기에서 소외된 장자의 가슴 아픈 사회적 존재 때문이었다.
내가 나를 잃어버렸다
성곽 남쪽에 사는 자기子綦가 탁자에 기대어 앉아서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는데 그 모습이 제 몸과 마음을 다 잃은 것 같았다. 앞에서 모시고 서 있던 제자 안성자유顔成子遊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몸은 정말로 마른나무 같게 할 수 있고, 마음은 아예 식어버린 재와 같게 할 수 있습니까? 지금 탁자에 기대어 앉아 있는 이는 예전에 탁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기가 말했다.
“언偃아, 훌륭하구나, 그대 물음이! 지금 나[吾]는 나[我]를 잃었는데, 자넨 이 뜻을 아는가? 그대는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었을 테지만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겠지. 또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었을 테지만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겠지.”
南郭子綦隱几而坐,仰天而噓,嗒焉似喪其耦。顏成子游立侍乎前,曰:「何居乎?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今之隱几者,非昔之隱几者也。」子綦曰:「偃,不亦善乎而問之也!今者吾喪我,汝知之乎?女聞人籟而未聞地籟,女聞地籟而未聞天籟夫!」
앞 편은 북명, 이 편은 남곽으로 북과 남이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물고기와 사람이 등장하여 대조를 이루지만 ‘변화’을 이야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앞 편은 외형적 변모인데 반해 이 편은 내면적 변혁을 말한다. 남곽자기가 ‘나는 나를 잃었다’는 말은 ‘나를 일음, 나를 비움’의 상태에 들어갔음을 뜻한다.
하늘의 퉁소 소리
2. 자유가 말했다.
“감히 그 이치를 알고 싶습니다.”
자기가 대답했다.
“무릇 큰 땅덩어리가 내뿜는 기운을 일러 바람이라고 하네. 이 바람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어나면 수많은 구멍이 울부짖네. 그대는 휙휙 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않았는가? 높고 험한 산림에 백 아름드리 큰 나무에 난 구멍이 더러는 코처럼, 더러는 입처럼, 더러는 귀처럼, 목이 긴 병처럼 더러는 바리때처럼, 더러는 절구처럼, 더러는 웅덩이처럼, 더러는 연못처럼 제각기 콸콸 흐르는 소리, 화살이 씽씽 날아가는 소리, 큰 소리로 꾸짖는 소리, 숨을 들이쉬는 소리, 크게 부르짖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깊이 가라앉는 소리, 새가 우는 듯한 애절한 소리 들을 내네. 바람이 앞에서 우우- 소리를 내면 뒤따라 우우- 소리를 내고, 가벼운 바람에는 자그마하게 화답하고, 거센 바람에는 크게 화답하고, 사나운 바람이 그치면 온갖 구멍이 잠잠해진다네. 그대도 바람 불면 나무들이 흔들흔들 또는 한들한들 움직이는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子游曰:「敢問其方。」子綦曰:「夫大塊噫氣,其名為風。是唯无作,作則萬竅怒呺。而獨不聞之翏翏乎?山林之畏佳,大木百圍之竅穴,似鼻,似口,似耳,似枅,似圈,似臼,似洼者,似污者;激者,謞者,叱者,吸者,叫者,譹者,宎者,咬者,前者唱于而隨者唱喁。泠風則小和,飄風則大和,厲風濟則眾竅為虛。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
3. 자유가 말했다.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온갖 구멍에서 나는 소리이고 사람이 내는 퉁소 소리는 서로 모양이 다른 죽관竹管에서 나는 소리군요. 이제 감히 하늘이 내는 퉁소 소리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자기가 대답했다.
“하늘이 내는 퉁소 소리는 비록 다름이 있을지라도 모두 제 소리를 내고 그치게 하나니, 소리를 내게 하는 건 누구이겠는가?”
子游曰:「地籟則衆竅是已,人籟則比竹是已。敢問天籟。」子綦曰:「夫吹萬不同,而使其自已也,咸其自取,怒者其誰邪!」
큰 지혜와 잔꾀
4. 큰 지혜는 여유롭고 느긋하지만, 잔꾀는 자질구레하고 좀스럽다. 큰 말은 넘실거리는 물이지만, 작은 말은 쉬지 않고 재잘거린다. 잠을 잘 때에도 혼魂과 백魄이 뒤엉켜 뒤숭숭하고, 깨어 있을 때에는 감각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접촉하는 것마다 얽히고설키니, 날마다 마음은 싸움질이다. 더러는 속셈이 교활하고, 더러는 덫 놓기를 잘하고, 더러는 살그머니 숨어서 보이지 않는다. 작은 두려움에는 걱정으로 편안치 않고, 큰 두려움에는 놀라 정신을 잃는다. 시비를 엿볼 때는 마치 쇠뇌에서 발사된 화살 같다. 마음을 가슴에 담아두는 데는 그 맹세 굳어서 변하지 않을 듯하니 마음 단단히 먹고 승리할 기회를 노리는 것이다. 그들이 쇠미해짐은 가을날이나 겨울철의 초목과 같으니 날마다 사그라짐을 말한다. 그들은 하는 일에 빠져들어 다시는 원래 모습으로 회복될 수 없다. 그들의 영혼은 밧줄로 매인 듯 꽉 막혔으니 죽음이 가까이 다가와서 다시는 생기를 회복할 수 없음을 말한다.
5. 희로애락, 염려와 슬픔, 경박함과 방종, 터놓음과 꾸밈, 이런 것들이 마치 음악이 빈 구멍에서 나오고 팡이는 땅의 기운이 뜨겁게 솟는 데서 생기는 것과 같다. 이런 모습이 눈앞에서 밤낮으로 이루어지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알지 못한다. 되었다, 그만 두어라! 어느 날 아침에 이 모든 것이 생기는 이치를 깨달으면 이런 갖가지 모습이 생겨나고 이루어진 원인을 알 수 있지 않을까!
大知閑閑,小知閒閒;大言炎炎,小言詹詹, 其寐也魂交,其覺也形開,與接爲構,日以心鬭. 縵者,窖者,密者。小恐惴惴,大恐縵縵. 其發若機栝,其司是非之謂也;其留如詛盟,其守勝之謂也;其殺如秋冬,以言其日消也;其溺之所爲之,不可使複之也;其厭也如緘,以言其老洫也;近死之心,莫使複陽也. 喜怒哀樂,慮歎變慹,姚佚啟態;樂出虛,蒸成菌。日夜相代乎前,而莫知其所萌. 已乎已乎!旦暮得此,其所由以生乎!
참주인[眞宰]
6.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나 자신이 있을 수 없고, 나 자신이 없으면 이런 것들이 나타날 리 없다. 이런 인식은 사물의 본질에 이르렀지만 이 모든 것이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지 모른다. ‘참주인’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모습은 볼 수 없다. 그 존재를 믿게 해야 하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뼈마디, 이목구비 등 아홉 개의 구멍, 그리고 심폐간신 등 여섯 가지 장기가 우리 몸에 갖추어져 있는데, 우리는 이 가운데 어떤 것을 특별히 더 좋아해야 하는가? 그대는 이것들을 다 좋아하는가? 아니면 그 가운데 어떤 하나를 특별히 더 좋아하는가? 그러면 나머지는 모두 신첩臣妾처럼 머슴이나 종이 된단 말인가? 신첩과 같은 종이나 머슴은 서로 지배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그것도 아니면 돌아가면서 임금과 신하 역할을 하는가? 과연 거기에 ‘진군眞君’ 있기는 한가? 그 실체를 만나든지 만나지 못하든지 실질적 존재에 무슨 보탬도 덞도 있을 리 없다.
非彼無我,非我無所取. 是亦近矣,而不知其所為使. 若有真宰,而特不得其眹. 可行已信,而不見其形,有情而無形. 百骸、九竅、六藏,賅而存焉,吾誰與為親?汝皆說之乎?其有私焉?如是皆有,為臣妾乎,其臣妾不足以相治乎. 其遞相為君臣乎,其有真君存焉. 如求得其情與不得,無益損乎其真.
7. 일단 하늘과 땅의 기운을 받아서 몸을 이루면 그것을 잃지 않고 저절로 쇠잔할 때까지 기다린다. 바깥 환경과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순응하기도 하면서 빨리 달리는 말처럼 내달리기만 할 뿐 이들을 멈추게 할 어떤 힘도 없으니 참으로 슬프지 않은가! 사람들은 죽을 리 없다고 말하지만, 이것 또한 도움이 될 게 없다. 몸은 점점 쇠잔해지고 마음 또한 그렇게 되니, 정녕 슬프기 그지없는 일 아닌가? 사람의 삶이란 것이 진실로 이처럼 엉망진창이란 말인가! 나만 홀로 이러한가, 사람들 중에는 이렇지 않은 이도 있단 말인가!
一受其成形, 不亡以待盡. 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
‘굳어진 마음[成心]’
8. 이미 ’‘굳어진 마음’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삼는다면, 누군들 스승이 없겠는가? 하필이면 지혜와 계략이 깊고 뛰어난 사람만이 그렇겠느냐? 우둔한 사람도 그렇지. 아직 일정하게 굳어진 마음이 없어도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오늘 월越 나라로 떠났는데 어제 그곳에 이르렀다는 것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다고 한다면 이는 참으로 지혜로운 우禹 임금조차도 알 수 없을 텐데 내가 또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夫隨其成心而師之,誰獨且無師乎?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是今日適越而昔至也. 是以無有為有. 無有為有,雖有神禹,且不能知,吾獨且柰何哉!
말을 한다는 것은
9. 말을 한다는 것은 그저 숨을 내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하는 이는 뜻을 말하는데, 그 뜻이 흐리멍덩하다면 참으로 말을 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말은 알에서 갓 깨어난 새끼 새의 소리와는 다르다는데, 정말 다른가, 아니면 다름이 없는가? 도道는 무엇에 가리어 참과 거짓이 생긴 것일까? 도는 또 어디로 달아나서 이제는 존재하지 않을까? 말은 어디에 있기에 시비만 남았는가? 도는 자질구레한 이룸에 가려지고 말은 화려한 꾸밈에 가려진다. 그러기에 유가儒家와 묵가墨家가 시비를 벌이며 한쪽에서 옳다고 하면 다른 쪽에서는 그르다 하고, 한쪽에서 그르다 하면 다른 쪽에서는 옳다고 한다. 그른 것을 옳다고 하거나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려면 가려진 것을 걷어내고 숨겨진 것을 드러낼 수 있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
夫言非吹也. 言者有言,其所言者特未定也. 果有言邪?其未嘗有言邪?其以為異於鷇音,亦有辯乎,其無辯乎?道惡乎隱而有真偽?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往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儒、墨之是非,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
‘이것’과 ‘저것’
10. 사물은 모두 그 자신과 대립하는 ‘저것’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고, 동시에 그 자신과 대립하는 ‘이것’이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다. 대립하는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보이지 않으니 대립하는 이쪽에서 보아야만 이해하고 인식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렇게 이르노니,
“사물의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 때문에 생긴다. 바로 이것이 서로 존재하게 하는 것, 곧 ‘방생方生’이라는 것이다.”
비록 그러할지라도 막 태어나자마자[生] 그만 죽어버리고[死], 죽자마자 곧 태어난다. 될 수 있음이 있기에 될 수 없음이 있고, 될 수 없음이 있기에 될 수 있음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이 때문에 성인은 옳음과 그름, 될 수 있음과 될 수 없음 등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물 본연[天]의 빛에 비추어 본다. 그러면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저것’에도 옳음과 그름이 동시에 있고, ‘이것’에도 옳음과 그름이 동시에 있다. 사물에는 과연 ‘이것’과 ‘저것’이 따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이것’과 ‘저것’이 구분되어 존재하는가? ‘이것’과 ‘저것’이 상대적으로 대립되지 않는 상태를 일러 ‘도의 지도리[道樞]’라고 한다. 지도리는 ‘도道의 핵심’이기에 사물의 무궁무진한 변화에 순응한다. 옳음도 무궁무진한 변화의 하나요, 그름도 또한 무궁무진한 변화의 하나이다. 그러기에 ‘사물의 본연[天]에 비추어 숨겨진 것을 알아낼 수 있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
物無非彼,物無非是. 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 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彼是,方生之說也. 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因是因非,因非因是. 是以聖人不由,而照之于天,亦因是也. 是亦彼也,彼亦是也. 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 果且有彼是乎哉?果且無彼是乎哉?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以應無窮. 是亦一無窮,非亦一無窮也. 故曰「莫若以明」.
손가락과 말[馬]
11. 손가락을 가지고 그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못하다. 말[馬]을 가지고 그 말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이 아니라고 하는 것만 못하다. 하늘과 땅도 하나의 손가락. 만물도 하나의 말.
되는 것은 됨이라 이르고 되지 않는 것은 되지 않음이라 이른다. 길은 다녀서 이루어지고 사물은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다. 어째서 그렇게 되는가?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된다. 어째서 그렇지 않게 되는가? 그렇지 않게 하니까 그렇지 않게 된다. 사물은 본시 그렇게 될 까닭도 있고, 그렇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 않은 것도 없고 그럴 수 없는 것도 없다.
以指喻指之非指,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
可乎可,不可乎不可. 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 惡乎然? 然於然. 惡乎不然?不然於不然. 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 無物不然,無物不可.
12. 그러기에 작은 풀줄기든 큰 기둥이든, 나병환자이든 서시西施든, 사물은 아무리 엉뚱하고 괴상하더라도 도道로써 보면 모두가 통하여 하나가 된다. 나누어지면 또 이루어지고, 이루어지면 다시 훼손된다. 모든 사물은 이루어지는 것도 훼손되는 것도 따로 있지 아니하고 다시 통하여 하나가 된다. 오로지 통달한 자라야 모두 통하여 하나가 됨을 알기에 자기의 편견을 고집하지 않고 보편적인 이치에 기탁한다.
보편적인 이치는 쓸모 있음을 이른다. 쓸모 있음이란 통함을 말하고, 통함이란 만족함이다. 만족함이란 도에 가까운 것이며, 있는 그대로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줄 모르는 것, 이것을 일러 도道라고 한다.
故為是舉莛與楹,厲與西施,恢恑憰怪,道通為一. 其分也,成也;其成也,毀也..凡物無成與毀,復通為一. 唯達者知通為一,為是不用而寓諸庸. 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 適得而幾矣. 因是已. 已而不知其然,謂之道.
조삼모사朝三暮四
13. 사물이 본시 동일한 성상과 특징을 가진 하나임을 모르고 죽도록 한쪽에만 집착하는 것을 일러 ‘조삼朝三’이라고 한다. ‘조삼’이 무슨 뜻인가? 원숭이 기르는 이가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마’라고 하자 원숭이들이 하나같이 화를 냈다. 그러자 이 양반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마’라고 하자 원숭이들은 하나같이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서 아무런 다름이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화를 내다가 다시 기뻐했으니 바로 이런 이치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옳음과 그름을 조화롭게 만들며 ‘천균*天鈞’의 경지에서 유유자적했으니, 이를 일러 ‘양행**兩行’이라고 한다.
*鈞은 ‘均’과 통용된다. 그러니까 ‘천균天鈞’은 ‘자연自然’이면서 ‘균형均衡’된 상태를 말한다.
**物과 我, 즉 자연계와 자아의 정신 세계가 모두 각자 자기가 있을 자리에 있어서 스스로 변화 발 전함을 말한다. ‘그가 옳다고 주장하면 그런 대로 맡겨두고 그가 그르다고 주장하면 그런 대로 맡 겨두고서, 굳이 따지거나 그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勞神明為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 何謂朝三?曰狙公賦芧,曰:「朝三而莫四.」 眾狙皆怒. 曰:「然則朝四而莫三.」 眾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為用,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세 가지 지극한 경지
14. 옛날 사람 가운데는 지혜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이들이 있었다. 어떻게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을까? 아직 사물이 생겨나기 전의 상태를 아는 이가 있었으니, 이는 참으로 지극하여 최고의 경지에 이른지라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그 다음은 사물은 생겨났지만 아직 경계가 없던 상태를 아는 이가 있다. 그 다음은 경계는 있지만 아직 옮음과 그름이 없던 상태를 아는 이가 있다. 옳고 그름이 뚜렷해지면 도道가 이지러진다. 도가 이지러지면 탐욕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과연 있는가?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따로 없는 건 아닌가?
古之人,其知有所至矣. 惡乎至?有以為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 其次以為有物矣,而未始有封也. 其次以為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 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 道之所以虧,愛之所以成. 果且有成與虧乎哉?果且無成與虧乎哉?
15.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있기에 소문昭文은 거문고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었다. 이루어짐과 이지러짐이 없기에 소문은 다시는 거문고로 음악을 연주할 수 없었다.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한다, 사광師曠이 북채를 들고 장단을 맞춘다, 혜자惠子가 오동나무 탁자에 기대어 고담준론을 펼친다, 이 세 분의 솜씨는 완벽하여 최고 수준에 이르러 모두가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이들의 사적은 기록으로 남아 전한다. 이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다른 사람과는 달리 뛰어나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으로써 다른 사람을 깨우치려고 했다. 이들은 깨우칠 수 없는 것으로써 깨우치려 했기 때문에 ‘단단한 것’이니 ‘흰 것’이니 하면서 애매하게 끝을 맺었다. 또 소문의 아들도 아비의 솜씨를 이어받는 데 그치고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이런 것을 ‘이루어짐’이라면 나도 ‘이루어짐’이 있다 하겠다. 이런 것이 ‘이루어짐’이 아니라면 외계의 사물이나 나 자신도 ‘이루어짐’이 없다고 하겠다. 성인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는 변설을 천하게 여긴다. 이 때문에 이런 방법을 쓰지 않고 ‘보편적인 것’에 맡기니, 이것을 일러 ‘밝음明’이라고 한다.
有成與虧,故昭氏之鼓琴也;無成與虧,故昭氏之不鼓琴也. 昭文之鼓琴也,師曠之枝策也,惠子之據梧也,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故載之末年. 唯其好之也,以異於彼,其好之也,欲以明之彼. 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 而其子又以文之綸終,終身無成. 若是而可謂成乎,雖我亦成也. 若是而不可謂成乎,物與我無成也. 是故滑疑之耀,聖人之所圖也. 為是不用而寓諸庸,此之謂以明.
1. 소씨昭氏, 곧 소문昭文은 뛰어난 거문고 연주로 유명하다. 장자는 음은 본시 하나의 총체 로서 고저장단의 분별이 없으면 연주할 수 없으며 아무리 고명한 악사도 동시에 갖가지 소리를 연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바로 나누어진 음의 고저장단 때문에 거문고의 줄 위에서 연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사광師曠은 춘추시대 진晉 나라 평공平公 때, 악사로 이름을 날렸다.
지책枝策은 나뭇가지나 채찍으로 두드리거나 쳐서 박자를 맞춘다는 뜻이다.
3. 혜자惠子, 곧 혜시惠施는 전국시대 명가학파에 속한 인물로서 언변에 뛰어났다.
’거오据梧‘는 오동나무에 기대어 고담준론을 했다는 뜻이다. 일설에는 ’오梧‘를 오동나무 로 만든 탁자로 풀이한다. 여기에서는 오동나무로 만든 탁자로 번역했다.
‘있음’과 ‘없음’
16. 이제 여기에 어떤 말이 있다고 치자. 이 말이 다른 이의 말과 서로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모른다. 서로 같은 말과 서로 다른 말은 서로 동류이므로 더불어 서로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제 한번 말해 보고자 한다.
今且有言於此,不知其與是類乎?其與是不類乎?類與不類,相與為類,則與彼無以異矣. 雖然,請嘗言之.
17. 우주 만물에 시작이 있으면 이 우주 만물이 아직 시작하기 이전의 시작도 있다. 게다가 아직 시작하기 이전의 시작도 있다. 우주의 처음에는 이런저런 있음이 있고, 마찬가지로 없음도 있다. 게다가 아직 있음이 있기 이전의 없음도 있다. 마찬가지로 있음이 있기 이전의 아직 있기 이전의 없음도 있다. 그런데 갑자기 ‘있음’과 ‘없음’이 생기고 나니 ‘있음’과 ‘없음’ 가운데 어떤 것이 진정한 ‘있음’인지, 또 어떤 것이 진정한 ‘없음’인지 모른다. 지금 내가 무언가 말했지만 내가 말한 것이 과연 말함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사실 여기서는 무얼 말하겠다는 게 아니라 무얼 말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지만 ‘영원’은 이처럼 끝이 있을 수 없다.
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 有有也者,有無也者,有未始有無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 俄而有無矣,而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 今我則已有謂矣,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無謂乎?
털끝과 태산
18. 이 세상에 가을철 짐승의 털끝보다 더 큰 것은 없으니 태산도 지극히 작은 셈이다. 나자마자 죽은 아기보다 오래 산 이는 없으니 팽조彭祖도 요절한 셈이다. 하늘과 땅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만물도 나와 함께 한 몸이 된다. 이렇게 하나가 되었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런데 내가 이미 하나라고 했지만 어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나에 내가 말한 ‘하나’를 더하여 둘이 되고, 이 둘과 처음 말한 하나가 더해지면 셋이 된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면 셈을 아무리 잘해도 마지막 숫자를 얻을 수 없다.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없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가도 곧 셋에 이르는데, 더구나 있음에서 있음으로 나아갈 때야 어떻겠는가! 그러니 이렇게 추단하고 연역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뿐이니라.(사물의 본연에 순응하여라)* 도는 가장 큰 것보다 더 크고, 가장 작은 것보다 더 작다.
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大山為小;莫壽乎殤子,而彭祖為夭. 天地與我並生,而萬物與我為一. 既已為一矣,且得有言乎? 既已謂之一矣,且得無言乎?一與言為二,二與一為三. 自此以往,巧曆不能得,而況其凡乎!故自無適有,以至於三,而況自有適有乎!無適焉,因是已.
도道에는 경계도 이름도 없다
19. 무릇 도道에는 경계가 없고 말[言]에는 정확한 기준이 없다. 각자 자기의 관점이 정확하다는 인식 때문에 이런저런 경계와 분별이 생겼다. 이제 경계와 분별에 대하여 말해 보자. 왼쪽과 오른쪽, 차례와 차별, 분석과 논박, 그리고 다툼과 맞겨룸 등이 있는데, 이를 일러 팔덕八德이라고 한다. 성인은 하늘과 땅, 그리고 동서남북 등 우주 밖의 일은 존재하지만 논하지는 않는다. 또 성인은 하늘과 땅, 그리고 동서남북 등 우주 안의 일을 연구는 하지만 제멋대로 평설하지 않는다. 게다가 성인은 고대사에서 사회를 잘 다스린 군주들의 기록에 대하여 평설은 하지만 논쟁하지 않는다. 분별하려고 해도 분별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평설하려고 해도 평설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성인은 사물을(도를) 마음에 간직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변별하여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기에 논쟁은 대체로 자기가 보지 못한 일면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夫道未始有封,言未始有常,為是而有畛也. 請言其畛:有左,有右,有倫,有義,有分,有辯,有競,有爭,此之謂八德. 六合之外,聖人存而不論;六合之內,聖人論而不議. 春秋經世,先王之志,聖人議而不辯. 故分也者,有不分也;辯也者,有不辯也. 曰:何也?聖人懷之,眾人辯之以相示也. 故曰:辯也者,有不見也.
20. 무릇 위대한 도道는 이름이 없으며, 가장 뛰어난 변설은 말이 없다. 또 위대한 인仁은 인仁을 드러내지 않으며, 위대한 겸손은 겸손을 드러내지 않는다. 위대한 용기는 다른 이를 해치지 않는다. 도道가 밖으로 드러나면 도道가 아니며, 말[言]이 제멋대로이면 표현하지 못할 부분이 있으며, 인仁이 늘상 나타나면 오히려 인仁을 이루지 못하며, 청렴 결백도 너무 지극하면 오히려 진실하지 않으며, 용기도 사람을 해치는 데 이르면 진정한 용기가 될 수 없다. 이 다섯 가지는 본래 원만함을 추구하지만 자칫 모난 것이 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을 알고 멈출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최고의 지혜이다. 누가 말을 하지 않는 논변과 말할 수 없는 도道를 진정으로 알 수 있을까? 만약 이를 아는 이가 있다면, 이야말로 하늘의 보고寶庫라 하겠다. 이 보고는 아무리 부어도 꽉 찰 리 없고, 아무리 퍼내어도 마를 리 없다. 게다가 왜 그런지도 모른다. 이를 일러 ‘보광葆光’이라 한다.
*보광葆光...어슴프레 빛나지만 드러나지 않는 빛, 오강남 교수는 이를 ‘은근한 빛’으로, 이강수 교수는 ‘감추어도 드러나는 빛’으로 옮겼다.
夫大道不稱,大辯不言,大仁不仁,大廉不嗛,大勇不忮. 道昭而不道,言辯而不及,仁常而不成,廉清而不信,勇忮而不成. 五者园而幾向方矣. 故知止其所不知,至矣. 孰知不言之辯,不道之道?若有能知,此之謂天府. 注焉而不滿,酌焉而不竭,而不知其所由來,此之謂葆光.
요 임금과 세 나라
21. 그래서 옛날에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에게 물어 말했다.
“내가 종宗, 회膾, 그리고 서오胥敖, 이 세 나라를 치려고 하오. 내가 임금의 자리에 올라 정무를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으니 무슨 까닭일까요?”
순 임금이 대답했다.
“무릇 이 셋은 조그마한 나라이고 군주도 겸손한데 마음이 편치 않으시다니 어쩐 일이십니까? 옛날 태양 열 개가 한꺼번에 나와서 만물을 비추었다지만, 지금 임금의 덕행이 태양 빛보다 훨씬 밝지 않습니까!”
*이 단락이 글의 흐름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가에서는 요 임금을 태양과 같은 성군을 생각했지만, 장자는 종, 회, 서오 같은 미개한 나라를 덕으로 교화하지 못하고 무력을 쓰려는 요 임금을 아직 부덕한 임금으로 본다.
*태양은 우리의 이성을 상징하고, 앞 단락에 나온 ‘보광’은 이성을 초월한 경지로 보는 주석가도 있다. 그러니까 이성의 영역에 머무는 한, 도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상 오강남 교수의 견해)
*장자는 이 둘의 대화를 통하여 힘으로는 제물齊物할 수 없음을 말한다. 제물은 사람이나 사물의 성질을 살리고 그들의 성향에 맡길 수 있는 덕에 의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강수 교수의 견해)
故昔者堯問於舜曰:「我欲伐宗、膾、胥敖,南面而不釋然. 其故何也?」舜曰:「夫三子者,猶存乎蓬艾之間. 若不釋然,何哉?昔者十日並出,萬物皆照,而況德之進乎日者乎!」
앎과 모름
22. 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갖가지 사물의 공통점을 아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선생님께서는 선생님께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십니까?”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자 설결이 잇달아 물었다.
“그렇다면 갖가지 사물은 모두 알 수 없는 것입니까?”
왕예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하여 한번 말이나 해 보세. 도대체 내가 안다는 것이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아는 것이 아니라고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설결과 왕예는 전설 속의 고대 현인이라지만 사실은 장자의 우언 속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이다.
齧缺問乎王倪曰:「子知物之所同是乎?」曰:「吾惡乎知之!」「子知子之所不知邪?」曰:「吾惡乎知之!」「然則物無知邪?」曰:「吾惡乎知之!雖然,嘗試言之. 庸詎知吾所謂知之非不知邪?庸詎知吾所謂不知之非知邪?」
사람과 미꾸라지
23. “내가 자네에게 한번 물어봄세.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잠을 자면 허리가 아프고 반신불수가 되지만, 미꾸라지도 그럴까? 사람은 높은 나무 위에 거주하면 겁에 질려 몸이 떨릴 텐데, 원숭이도 그럴까? 사람, 미꾸라지, 그리고 원숭이 이 셋은 어느 것이 거처할 기준을 가장 잘 알고 있을까?
사람은 가축의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먹고, 지네는 뱀을 즐겨 먹고, 올빼미는 쥐를 먹는다. 이 네 가지 동물은 어느 것이 참 맛을 가장 잘 알고 있을까?
원숭이는 비슷한 원숭이와 짝을 짓고, 고라니는 사슴과 사귀고,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노닌다네. 모장毛嬙이나 여희麗姬는 남자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찬양하지만, 물고기는 이들을 보자마자 물 속 깊이 들어가서 숨고, 새들은 이들을 보자마자 하늘 높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은 이들을 보자마자 재빨리 도망가 버린다. 이 네 가지 가운데 어는 것이 참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을까?
내가 보기에, 인仁과 의義의 비롯됨이나 시是와 비非의 길은 어수선하고 혼란한데, 내가 어떻게 그것들을 분별할 수 있겠는가!”
*인의니 시비니 하는 것들이 모두 특수한 사히적, 문화적, 역사적 환경이나 상황 속에서 형성된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규범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다.
且吾嘗試問乎女:民溼寢則腰疾偏死,鰌然乎哉?木處則惴慄恂懼,猨猴然乎哉?三者孰知正處?民食芻豢,麋鹿食薦,蝍且甘帶,鴟鴉耆鼠,四者孰知正味?猨,猵狙以為雌,麋與鹿交,鰌與魚游。毛嬙、麗姬,人之所美也,魚見之深入,鳥見之高飛,麋鹿見之決驟。四者孰知天下之正色哉?自我觀之,仁義之端,是非之塗,樊然殽亂,吾惡能知其辯!」
이해 득실에 무관
24. 설결이 말했다.
“선생님께서 이로움[利]과 해로움[害]을 모르신다니, 지인至人은 정말로 이로움이나 해로움을 모른단 말씀이십니까?”
이에 왕예가 이렇게 대답했다.
“지인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신령스럽다. 커다란 늪지가 활활 타올라도 뜨거운 줄 모르고, 황하黃河와 한수漢水가 꽁꽁 얼어도 추운 줄 모르고, 사나운 벼락이 산을 깨뜨리고 바람이 바다를 뒤흔들어도 놀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이라면 엷게 흐르는 구름을 타고 해와 달에 올라앉아 사해四海 밖에 노닐 터. 삶과 죽음도 그에게는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이로움이니 해로움이니 하는 것쯤이랴!”
齧缺曰:「子不知利害,則至人固不知利害乎?」王倪曰:「至人神矣:大澤焚而不能熱,河、漢沍而不能寒,疾雷破山、風振海而不能驚。若然者,乘雲氣,騎日月,而遊乎四海之外。死生无變於己,而況利害之端乎!」
성인聖人의 경지
25. 구작자瞿鵲子[겁 많은 까치 선생]가 장오자長梧子[키다리 오동나무 선생]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공자님께 들었네만, 성인은 잗다란 일에 종사하지 않고, 이익을 좇거나 손해를 피하지 않고, 사람들이 탐내어 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이미 정해진 규칙을 애써 따르려고 하지 않고, 무슨 말을 하지 않는데도 무언가 말을 하는 것 같고, 무슨 말을 하는데도 무언가 말을 하지 않는 것 같으니, 세상 밖에서 노닌다데. 공자님께서는 이런 것들이 맹랑한 말이라고 여기시지만, 나는 오히려 이것이 정교하고 아름다운 도道를 실천한다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장오자가 대답했다.
“그런 일은 황제黃帝가 들어도 의혹이 풀릴 리 없는데, 공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자네도 너무 서둘러 짐작하는 것 같네그려. 달걀을 보고 당장 새벽 알리는 수탉을 얻으려 하고, 탄알을 보고 당장 산비둘기 구이를 생각하는군. 내가 자네에게 터무니없는 말을 할 터이니, 자네는 대충 들어나 보게.
어떻게 해와 달에 의지하지 않고, 우주를 마음속에 품는가?
만물과 하나가 되어, 갖가지 혼란한 것 그대로 두고,
낮은 자리 높은 자리 모두 하나로 같도다.
뭇사람들 시비 가리기에 바빠도,
성인은 사리에 어두워 알아차림 없구나.
만년 세월 온갖 일에도 순수함 그대로,
만물이 모두 이와 같으니,
이 때문에 서로가 감싸주는구나.
*구작자와 장오자는 모두 꾸며낸 인물이다.
*구작자는 ‘공자님’이라고 했지만, 장오자는 그냥 ‘공자’라고 했다. 원문은 각각 ‘夫子’와 ‘구 丘’라고 했지만, ‘공자님’과 ‘공자’로 번역했다. 하나는 지극한 높임을, 다른 하나는 멸시의 뜻을 담고 있다.
*성인은 언뜻 보기에 대립이나 모순처럼 보이는 것도 그대로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모두 하나로 포용한다는 것이다.
瞿鵲子問乎長梧子曰:「吾聞諸夫子,聖人不從事於務,不就利,不違害,不喜求,不緣道,无謂有謂,有謂无謂,而遊乎塵垢之外. 夫子以為孟浪之言,而我以為妙道之行也. 吾子以為奚若?」 長梧子曰:「是黃帝之所聽熒也,而丘也何足以知之!且女亦大早計,見卵而求時夜,見彈而求鴞炙. 予嘗為女妄言之,女以妄聽之,奚旁日月,挾宇宙,為其脗合,置其滑涽,以隸相尊. 眾人役役,聖人愚芚,參萬歲而一成純. 萬物盡然,而以是相蘊.
여희麗姬의 후회
26. 내가 어떻게 삶을 즐거워하는 것이 미혹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는가? 내가 어떻게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부터 타향을 떠돌다가 늘그막에 고향으로 돌아갈 줄 모르는 이와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미녀 여희麗姬는 변경 애艾 땅을 지키는 관리의 딸이었네. 진晉 나라가 처음 그녀를 손에 넣었을 때, 그녀는 눈물이 옷깃을 적시도록 울었다네. 진나라 임금의 왕궁에 이르러 임금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되자, 울었던 일을 후회했다지. 나는 어떻게 그들 죽은 이들이 애초에 살기를 바랐던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는가!
予惡乎知說生之非惑邪!予惡乎知惡死之非弱喪而不知歸者邪!麗之姬,艾封人之子也. 晉國之始得之也,涕泣沾襟;及其至於王所,與王同筐床,食芻豢,而後悔其泣也. 予惡乎知夫死者不悔其始之蘄生乎!
꿈에 술을 마시며
27. 꿈에 술 마시며 즐거워하던 이가 아침에 깨어나서 흐느껴 울고, 꿈에 흐느껴 울던 이가 아침에 깨어나서 즐거워하며 사냥을 나간다네. 잠들어 꿈을 꿀 때에는 자기가 꿈을 꾼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지. 더구나 꿈속에서 그 꿈을 해몽도 하지. 그러다가 깨어난 뒤에야 그것이 꿈인 줄 안다네. 마침내 크게 깨어난 뒤에야 이것이 한바탕 큰 꿈이었음을 알게 되지. 그런데도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 깨어 있다고 여기며 자기들이 언제나 환하게 안다고 여긴다네. 임금이며 마소 치는 이며 정말 식견이 좁도다! 공자도 자네도 모두 꿈을 꾸고 있네. 내가 이르노니, 내가 자네에게 꿈이라고 이르는 것도 꿈일세. 앞서 한 말이나 그 이름도 괴이하기 그지없나니, 만세 이후에 이 뜻을 아는 큰 성인을 만난다면, 이것은 어쩌면 아침저녁으로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여겨질 것이네.
*보통 사람들은 우리의 삶이 한바탕 꿈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이 꿈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괴상하다고 여기며 웃을 뿐이다. 우리의 삶이 꿈이며 이 꿈에서 크게 깨어나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가르쳐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이가 있다면, 만세 이후에 나타난대도, 그 귀중함을 생각하면 아침저녁으로 우련히 만나는 것처럼 자주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夢飲酒者,旦而哭泣;夢哭泣者,旦而田獵. 方其夢也,不知其夢也. 夢之中又占其夢焉,覺而後知其夢也. 且有大覺而後知此其大夢也,而愚者自以為覺,竊竊然知之. 君乎,牧乎,固哉!丘也,與女皆夢也;予謂女夢,亦夢也. 是其言也,其名為弔詭. 萬世之後,而一遇大聖知其解者,是旦暮遇之也.
논쟁이 되지 않음은
28. 나와 자네가 논쟁을 한다고 가정하자. 자네가 나를 이기고 내가 자네에게 이기지 못한다면, 자네는 정말 옳고 나는 정말 그른 것인가? 내가 자네를 이기고 자네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면, 나는 정말 옳고 자네는 정말 그른 것인가? 아니면 자네와 나 가운데 한쪽은 옳고 다른 한쪽은 그른 것인가? 아니면 자네와 나 모두 옳고 모두 그른 것인가? 나와 자네가 모두 알 수 없으니 다른 이들은 정말로 깜깜이겠지. 누구에게 판단하도록 하면 좋을까?
*모든 의견은 결국 각자의 견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소위 타당한 객관적 기준이란 없다. 조선시대 황희 정승의 일화를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若 ... 너, 자네, 而 ... 너, 자네.
既使我與若辯矣,若勝我,我不若勝,若果是也?我果非也邪?我勝若,若不吾勝,我果是也?而果非也邪?其或是也,其或非也邪?其俱是也,其俱非也邪?我與若不能相知也,則人固受其黮闇. 吾誰使正之?
29. 자네와 생각이 같은 이에게 판단하도록 하면, 이미 자네와 생각이 같은데, 어떻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와 생각이 같은 이에게 판단하도록 하면, 이미 나와 생각이 같은데, 어떻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와도 다르고 자네와도 생각이 다른 이에게 판단하도록 하면, 이미 자네나 내 생각과는 다른데, 어떻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나와도 같고 자네와도 생각이 같은 이에게 판단하도록 하면, 이미 자네나 내 생각과 같은데, 어떻게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나나 자네, 그리고 다른 이도 모두 다 알지 못하는데, 그래도 다른 어떤 이를 더 기다려야 할까?
使同乎若者正之,既與若同矣,惡能正之!使同乎我者正之,既同乎我矣,惡能正之!使異乎我與若者正之,既異乎我與若矣,惡能正之!使同乎我與若者正之,既同乎我與若矣,惡能正之!然則我與若與人俱不能相知也,而待彼也邪?
*彼 ... 이곳에서는 또 다른 어떤 이를 가리킨다.
30. 쟁론 중의 다른 언사는 변화 속의 다른 소리처럼 서로 대립하지만 대립하지 않는 것과 같네. 자연의 몫으로 조화시키고 이로써 무궁무진한 변화로써 그에 순응하기에 천수를 누린다네. 자연의 몫으로 조화시킨다니 무슨 말인가? 사람들은 옳으니 옳지 않으니, 그러니 그렇지 않으니 하네. 옳다는 것이 정말로 옳다면, 옳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과 달라도 또한 쟁론을 벌일 것이 없네. 그렇다고 하는 것이 정말로 그렇다면, 그렇다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것과 달라도 또한 쟁론을 벌일 것이 없네. 삶과 죽음을 다 잊어버리고 옳음과 그름도 잊어버리게. 그리하여 무궁무진한 경지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도록 하게.”
化聲之相待,若其不相待. 和之以天倪,因之以曼衍,所以窮年也. 謂和之以天倪? 曰:是不是,然不然. 是若果是也,則是之異乎不是也亦無辯;然若果然也,則然之異乎不然也亦無辯. 忘年忘義,振於無竟,故寓諸無竟.」
반그림자와 본그림자
31. 반그림자가 본그림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조금 전에는 걸어가더니 지금은 멈추었고, 조금 전에는 앉았더니 지금은 일어섰으니, 어찌 그리 줏대가 없소?”
본그림자가 대답했다.
“내가 다른 것에 의지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소? 내가 의지하는 것은 또 다른 것에 의지하니까 그런 것 아니겠소? 내가 의지하는 것은 뱀이 비늘에 의지하고 매미가 날개에 의지하는 것과 같지 않겠소? 왜 그런지를 내가 어떻게 알겠소, 또 왜 안 그런지를 내가 어떻게 알겠소?”
罔兩問景曰:「曩子行,今子止,曩子坐,今子起,何其無特操與?」景曰:「吾有待而然者邪!吾所待又有待而然者邪!吾待蛇蚹、蜩翼邪!惡識所以然?惡識所以不然?」
*蚹 ... 뱀의 배에 가로로 난 비늘.
*어느 누구도 어떤 사물도 엄격한 의미의 독립성이나 주체성은 없다. 사물의 상호 연관성, 상호 의존성을 말하고 있다.
나비의 꿈
32. 어느 날 장주莊周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얼마나 유쾌하고 흐뭇하였는지 자신이 원래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고 나니 놀랍게도 장주 자신이었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 구별이 있을 터이니, 이를 일러 ‘물화 物化’라고 한다.
* 『장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이야기 가운데 하나.
* 「제물론」의 마지막 결어結語.
* ‘인생은 일장춘몽’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핵심어는 ‘물화物化’이다.
* ‘物化’ ... 사물 자신의 변화. 이 단락의 뜻을 따르면, 이른바 변화란 외물과 자아의 교합交合이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는 일체의 사물도 경계 없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昔者莊周夢為胡蝶,栩栩然胡蝶也,自喻適志與!不知周也. 俄然覺,則蘧蘧然周也. 不知周之夢為胡蝶與,胡蝶之夢為周與?周與胡蝶,則必有分矣. 此之謂物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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