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가-a. 나는 나를 잊었다[吾喪我]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책상에 몸을 기대어 비스듬히 앉아서 하늘 우러르며 한숨을 짓는데 그 멍한 모습이 마치 짝을 잃은 것 같았다. 안성자유顔成子游가 그를 앞에서 모시고 서 있다가 이렇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몸뚱이란 본래 말라서 죽어 버린 나무처럼 될 수 있고 마음도 본래 불 꺼진 재처럼 될 수 있다는 겁니까? 지금 책상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으신 모습은 예전에 책상에 기대어 비스듬히 앉으셨던 모습이 아닙니다.”
제자의 이 말에 자기子綦는 이렇게 대답했다.
“언偃아, [안성자유의 성은 안성顔成, 자는 자유子游, 이름은 언偃이다] 네가 참으로 훌륭한 질문을 하는구나!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잊었는데, 너는 이 사실을 알 수 있느냐? 너는 사람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들어도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듣지 못했고,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듣는다 해도 하늘이 부는 퉁소 소리는 듣지 못했겠지!”
자유子游가 말했다.
“그 소리를 듣는 방법을 부디 알려주십시오.”
자기子綦가 대답했다.
“저 큰 땅덩어리 대지가 내쉬는 숨결을 일러 바람이라고 하네. 이게 일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한번 일었다 하면 온갖 구멍이 다 세차게 소리를 낸다네. 자네는 저 윙윙거리는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험준한 산림 높은 곳의 일백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의 구멍은 코 같고 입 같고 귀 같고 목이 긴 병 같고 술잔 같고 절구 같고 깊은 웅덩이 같고 얕은 웅덩이 같은 여러 가지 모양이네. (그게 바람 일어 울리기 시작하면) 콸콸콸 거칠게 물이 흐르는 소리, 씽씽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는 소리, 큰 소리로 꾸짖는 소리, 숨을 들이쉬는 소리, 울부짖는 소리, 외치는 소리,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소리, 새가 가만히 지저귀는 소리, 이런 갖가지 소리가 울리네. 앞의 바람이 휘휘 울리면 뒤따라 윙윙 바람이 따르네. 선들바람에는 가볍게 응하고 회오리바람에는 세게 응하네. 세찬 바람 멎으면 모든 구멍이 고요해지네. 그런데 자네는 나무가 바람으로 크게 흔들리기도 하고 가볍게 흔들리기도 하는 걸 보지 않았는가?”
자유가 말했다.
“땅이 부는 퉁소 소리는 결국 여러 구멍이 내는 소리군요. 그리고 사람이 내는 퉁소 소리는 대를 나란히 묶어 만든 피리 소리군요. 그럼 이제 하늘이 내는 퉁소 소리에 대해 알려 주십시오.”
자기가 대답했다.
“바람이 불어 수없이 많은 다른 소리를 내어도 이 소리는 모두 각자 스스로가 내는 소리일세. 모두 각자가 제 소리 택하여 내는 소리라고 하지만 사나운 소리를 나게 하는 건 누구일까?”
南郭子綦隱几而坐,仰天而噓,嗒焉似喪其耦。顏成子游立侍乎前,曰:「何居乎?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今之隱几者,非昔之隱几者也。」子綦曰:「偃,不亦善乎而問之也!今者吾喪我,汝知之乎?女聞人籟而未聞地籟,女聞地籟而未聞天籟夫!」子游曰:「敢問其方。」子綦曰:「夫大塊噫氣,其名為風。是唯无作,作則萬竅怒呺。而獨不聞之翏翏乎?山林之畏佳[隹],大木百圍之竅穴,似鼻,似口,似耳,似枅,似圈,似臼,似洼者,似污者;激者,謞者,叱者,吸者,叫者,譹者,宎者,咬者,前者唱于而隨者唱喁。泠風則小和,飄風則大和,厲風濟則眾竅為虛。而獨不見之調調、之刁刁乎?」子游曰:「地籟則眾竅是已,人籟則比竹是已。敢問天籟。」子綦曰:「夫吹萬不同,而使其自已1也,咸其自取,怒者其誰邪!」
「제물론」은『장자』서른세 편 가운데 철학적으로 완성도가 가장 높은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여기 데려온 문단은「제물론」의 서장序章입니다. 자기와 자유의 문답을 몽땅 데려온 셈이지요.
좀 긴 이 문단에서 나는 ‘지금 나는 나 자신을 잊었는데,’[今者吾喪我], 이 부분에 먼저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눈길을 멈춥니다. 원문의 ‘오吾’와 ‘아我’의 훈은 둘 다 ‘나’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같지 않습니다.
‘오吾’는 독립된 주체로서의 ‘나’입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상태로서의 ‘나’입니다. 원초적으로 순수한 생명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나’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사리에 어두울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나’입니다. 신분이나 지위, 그리고 명예와 이익 따위의 바깥 세계의 틀이 주는 속박을 전혀 받지 않는 ‘나’입니다. 그러기에 ‘나’[吾]는 본디의 상태나 자리로 되돌아간 ‘나’입니다.
이에 비하여 ‘아我’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나’입니다. ‘나는 나 자신을 잊었는데,’라고 옮긴 이 부분은 ‘나는 나를 장사 지냈는데,’, 이렇게 직역할 수 있습니다. 사실 ‘망아忘我’는 장자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망아’는 자아를 초월하여 자아와 세계를 몽땅 잊은 경지를 표현합니다. 이런 경지에 이르면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밖의 세계와의 모든 분별도 잊게 됩니다. 그러면 천지 만물과 하나되는 상태에 도달합니다. ‘말라서 죽어 버린 나무’나 ‘불 꺼진 재’의 상태에서 물아物我의 구별이란 있을 수 없겠지요.
나[我]와 세계의 관계에 연연하지 않을 때, 장자 철학에서 최고의 경지로 제시한 ‘지인至人’에 이를 수 있습니다. 최고의 경지에 이른 ‘지인’은 ‘나’를 이미 잊었습니다. ‘나’를 이미 장사 지냈습니다. ‘무기無己’에 이른 것입니다. 이는 자아의식이나 자아의 존재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한 개인이 가진 욕망과 편견에서 벗어나 천지 만물과 하나로 융합되었다는 말입니다. 지인은 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연에 순응할 줄 압니다. 그리하여 마음의 평정은 물론 깨끗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을 잊어야만’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나’[我]를 잊어야만 비로소 자존自尊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알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사회관계를 구성하는 서열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자신을 얽매는 집념의 굴레에서 해방됩니다. 서열은 ‘나’와 ‘세계’를 깊게 관계 지을 때 생깁니다. 집념은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 잠길 때 일어납니다. 그러면 ‘나’와 ‘세계’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이 비교하기로 비롯되는 것은 고통입니다. 비교 우위를 위한 욕망은 더 큰 욕망을 낳고, 이제는 욕망이 욕망하는 숨찬 욕망의 쳇바퀴에 갇힙니다.
추정된 연보를 살피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이쪽 대륙 중국 전국시대 장자와 생존 연대가 상당 부분 겹칩니다. 그 디오게네스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참으로 큰 제국을 세웠던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한 짧은 장면은 인구에 널리 회자됩니다. 이 둘이 남긴 일화는 여러 가지 버전으로 전해 오지만 고갱이는 한가지입니다. 당시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알렉산더 대왕이 해바라기하던 디오게네스 앞을 막아서며 한 말, ‘당신 소원이 뭐요? 내 다 들어주리다.’, 이 말에 ‘비키시오, 햇볕 막지 말고.’, 라고 대답했다는 디오게네스의 말, 이것밖에 없습니다.
‘나’[我]를 잊는다, ‘나’를 버린다, ‘나’를 없앤다, 그러면 큰 것도 크지 않고 작은 것도 작지 않으며, 많은 것도 많지 않고 적은 것도 적지 않습니다. 네가 나보다 높지 않고 내가 너보다 낮지 않습니다. 디오게네스는 ‘나’를 잊고 ‘나’를 버렸기에 외물에 연연하며 관계지을 필요가 없습니다.‘나’를 잊으면 바깥 세계와의 비교는 아예 없습니다. 그러면 ‘자존自尊’합니다. ‘자존’하기에 알렉산더도 부럽지 않고 그의 위세도 두렵지 않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마땅히 동등해야 한다는 장자의 철학과 이 점에서 궤를 같이합니다.
『장자』내편 일곱 편은 각 편의 편명이 한결같이 세 글자입니다. 외편과 잡편은 첫머리의 두 글자를 따서 편명으로 삼은 점에서 차이가 납니다. (잡편 가운데 네 편은 사람 이름으로 편명을 삼았습니다.) 세 글자로 편명을 삼은 내편은 장자가 직접 저술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여러 연구자들의 대체적인 견해입니다. 내편의 편명에는 이미 장자가 말하려는 핵심이 잘 드러납니다.
「제물론齊物論」도 그렇습니다. ‘제물齊物’은 만물, 곧 세상의 모든 사물을 고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물론’은 세상 만물을 고르게 하는 논리, 또는 그런 이론을 말합니다. 장자는「제물론」에서 눈앞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 일테면 시비是非, 선악善惡, 미추美醜, 정사正邪, 화복禍福, 길흉吉凶, 각몽覺夢, 생사生死 따위를 구분하려는 가치 판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대적인 가치 판단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고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나’[我]와 세계, 곧 ‘나’와 외물과의 경계를 허물 때, 세상 만물은 가지런해질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나 자신을 잊었다’[吾喪我]는 구절을「제물론」의 서장序章에 배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물아物我의 뛰어넘은 경지를 제시함으로써 널리 알려진 ‘호접지몽胡蝶之夢’ 꼭지를「제물론」의 마지막 문단으로 배치한 것도 그렇습니다. 이렇게「제물론」은 잘 그려진 건축설계도처럼 빈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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