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마당 50

단순과 진솔

왕자유王子猷가 배를 타고 서울 가는 길에 올랐다. 배가 부두에 정박한 채 아직 뭍에 오르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환자야桓子野가 피리를 잘 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알지는 못했다. 바로 이때, 환자야가 저편 강기슭을 지나가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환자야입니다.” 왕자유는 배 안에서 환자야를 아는 어떤 이가 하는 말을 듣고 당장 사람을 보내 자기의 뜻을 전하게 했다. “당신이 피리를 잘 분다는 말을 진즉 들었소이다. 나를 위해 한 곡 들려주시구려.” 환자야는 당시 높은 벼슬을 한 적이 있었지만 왕자유의 명성을 익히 들어온 터라 즉시 수레에서 내려 배에 올랐다. 그리고 접의자에 앉아 왕자유를 위해 세 곡을 분 뒤에 다시 뭍에 올라 수레에 몸을 싣고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모두 말 한 마디 나누지 ..

산문 마당 2023.06.21

교만과 겸손

“오로지 착하고 어진 행동만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아무리 먼 곳에라도 이를 수 있습니다. 교만하면 손실을 불러오고, 겸손하면 이로움을 얻는 것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법칙입니다.” 惟德動天,無遠弗屆. 滿招損,謙受益,時乃天道. 『상서尙書』「대우모大禹謨」가운데 한 부분이다. 우禹는 순舜의 신하로서 큰물을 막아 다스리는 데 큰 공을 세움으로써 ‘대우大禹’로 높임을 받았다. 「대우모」는 우와 순, 그리고 백익伯益이 함께 나랏일을 두고 궁리를 나눈 이야기를 기록한 꼭지이다. 여기에서 ‘모謨’는 ‘모謀’와 통용한다. 한 달 동안 묘민苗民과 싸움을 벌였지만 이들은 험준한 지세를 방패삼아 완강히 버티며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백익이 우에게 건의한 말이 바로 여기 인용한 부분이다. 이들..

산문 마당 2023.06.21

표리부동表裏不同

어떤 이가 자기 아버지가 병이 들자 의원을 모셨다. “이 병은 고칠 길이 없소이다. 다만 그대 효심이 하늘을 감동시키면 고칠 수 있소이다. 그대의 넓적다리 살을 한칼 잘라 약으로 드시게 하면 고칠 수 있소이다.” 이 말을 들은 아들은, “그야 어렵지 않지요.” 이렇게 말하곤 칼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곧이어 문간에 한 사람이 누워 있는 걸 보자 손에 든 칼로 넓적다리 살을 발랐다. 누웠던 사람이 깜짝 놀라 펄쩍 뛰자 아들 된 이 사람은 그 사람을 손으로 가만 누르면서 이렇게 일렀다. “쉿! 그대 넓적다리 살점으로 우리 아버지 살리니 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 아니겠소.” 명明 나라 때 취월자醉月子가 편찬한『정선아소精選雅笑』「할고割股」전문이다. 마음이 음흉하여 겉 다르고 속 다른 이를 만나 낭패 보..

산문 마당 2023.06.12

아비의 훈계

무릇 군자라면 고요한 마음으로 심신을 수련하고 검박한 태도로 덕을 닦아야 하느니라.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지 않으면 자기의 뜻을 분명히 할 수 없으며, 심신이 고요하고 깨끗하지 않으면 먼 앞날을 내다볼 수 없으니라. 학문을 함에 평정을 유지해야 근원에 이를 수 있고, 공부하지 않으면 재능을 펼칠 수 없으며, 포부가 없으면 학문에 성취를 이룰 수 없느니라. 태만하고 방종하면 정신을 진작시킬 수 없으며, 경솔하고 조급하면 타고난 품성을 갈고 닦을 수 없느니라. 세월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의지도 시간과 함께 사라짐이 마른나무가 잎 시들어 떨어짐과 같으니, 세상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하고 늘그막에 헐어진 집 지키며 지난날을 안타까워한들 어떻게 돌이킬 수 있겠는가? (夫君子之行,靜以修身,儉以養德。非淡泊無..

산문 마당 2022.11.22

글 읽는 소리

솔잎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멧새 지저귀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학이 우는 소리, 바둑돌 놓는 소리, 섬돌에 빗방울 듣는 소리, 창문에 눈 내리는 소리, 이 모든 소리가 그지없이 맑지만 글 읽는 소리가 제일이다. (松聲, 澗聲, 山禽聲, 野蟲聲, 鶴聲, 棋子落聲, 雨滴階聲, 雪灑窓聲, 皆聲之至淸者也, 而讀書聲爲最.) 남송南宋 때 학자 예사倪思의『경서당잡지經鋤堂雜志』에서 뽑아왔다. 반세기 전만 해도 글방에서 글 읽는 소리가 자그마한 마을 고샅길에 넘쳤다. 낭랑한 이 소리는 높낮이가 있었고 박자가 있었기에 그대로 음악이었다. 강화읍성에 상륙한 프랑스 군인이 나지막한 초가집일망정 집집마다 책이 가득하고, 골목길 휘돌 때마다 글 읽는 소리 넘치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지 않은가. 짬..

산문 마당 2022.11.22

돼지 잡은 증자曾子

증자의 아내가 저자에 가려고 나서자 아이가 꽁무니에 붙으며 홀짝홀짝 울었다. 그러자 어미가 아이에게 이렇게 일렀다. “집에 있어라, 그러면 어미가 돌아와서 돼지를 잡아서 먹도록 할게.” 그녀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남편이 돼지를 잡아서 죽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막아서며 말했다. “아이와 농담으로 한 말일 뿐이었어요.” 이 말에 남편은 이렇게 맞받았다. “아이는 농담할 상대가 아니외다. 어린 아이가 무슨 지혜가 있겠소? 부모가 하는 대로 따라서 배울 따름이오. 부모의 가르침을 따를 뿐이란 말이오. 오늘 당신이 이 아이를 속이면 아이에게 속이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오. 어미가 아이를 속이면 아이는 어미를 믿지 않을 터이니, 이건 교육이 아니외다.” 말을 마치자 증자는 돼지를 잡아서 삶았다. ..

산문 마당 2022.11.21

독서 환경

역사는 눈빛[雪光]에 읽어야 속까지 비치는 환함으로 거울삼을 수 있다. 제자백가는 달빛을 벗 삼아 읽어야 깊고 그윽한 운치를 맛볼 수 있다. 불교 경전은 예쁜 아가씨를 앞에 두고 읽어야 헛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산해경山海經』,『수경水經』, 그리고 총서와 간단한 역사는 성근 청죽이나 차가운 바위 또는 푸른 이끼를 곁에 두고 읽어야 끝없는 즐거움과 넓고 가없는 논평을 받아들일 수 있다. 충신과 열사의 전기는 피리 불고 북 치며 읽어야 이들의 이름을 드날릴 수 있다. 간신배와 아첨꾼 이야기는 칼 차고 술잔 들고 읽어야 분노를 가라앉힐 수 있다.『이소離騷』는 인적 없는 산속에서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읽어야 골짜기를 놀라게 할 수 있다. 부賦는 물결이 미친 듯 고함치며 읽어야 회오리바람 일으킬 수 있다. 시와..

산문 마당 2022.10.26

사계四季

네 계절 풍광 같지 않으니 즐거움 또한 끝이 없어라. (四時之景不同而樂亦無窮也.) 북송 때 문장가 구양수歐陽脩의『취옹정기醉翁亭記』가운데 한 구절이다. 이제 나의 네 계절을 불러본다. 댓돌에 봄비 듣는 소리. 해바라기 샤워기에서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 새로 바른 창호지에 파리 한 마리 날아와 통통 작은북 치는 소리. 설죽雪竹이 나누는 내밀한 이야기에 아직도 귀 기울이는 한국화 속 저 어른.

산문 마당 2022.10.26

엽전 안고 물에 잠긴 사나이

영주永州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수영을 익숙하고 능란하게 한다. 어느 날, 물이 갑자기 불어났는데도 대여섯 사람이 자그마한 배를 타고 상강湘江을 가로 건너고 있었다. 중간쯤 이르렀을 때, 그만 배가 파손되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모두 건너편 기슭을 향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헤엄을 쳐도 평상시와 달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를 본 그의 또래가 이렇게 물었다. “자네 헤엄 솜씨는 알아주는데, 오늘은 어찌하여 뒤처지는가?” “엽전을 천 냥이나 허리에 찼더니 무거워서 뒤처지네.” “왜 버리지 않는가?” 그는 대답 대신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지쳐버렸다. 이제 기슭에 닿은 또래가 그를 향해 목소리를 한껏 높여 내질렀다. “이 어리석은 사람아,..

산문 마당 2022.10.13

신뢰의 중요성

의생 구竘는 진秦 나라의 명의였다. 그는 제齊 나라 선왕宣王의 여드름을 다스렸고 진秦 나라 혜왕惠王의 치질을 다루었는데 모두 다 고쳤다. 장자張子가 등에 종기가 돋자 구에게 치료를 부탁하며 이렇게 일렀다. “이 등을 나의 등이라 여기지 말고 그대 뜻에 따라 마음대로 치료해도 좋소이다.” 치료가 시작되자 그의 종기는 점점 나아졌다. 구는 물론 병을 치료하는 데 뛰어난 고수였지만 장자도 구가 마음 놓고 치료하도록 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사실 사람의 몸이나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모두 이와 같다. 반드시 다른 사람을 깊이 믿으며 권력을 마음 놓고 넘겨줘야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릴 수 있다. (有醫竘者,秦之良醫也. 爲宣王割痤, 爲惠王治痔, 皆愈. 張子之背腫, 命竘治之. 謂竘曰: “背非吾背也,任子制焉.” 治之遂愈..

산문 마당 2022.10.08

도법자연道法自然

예전에 서시西施가 가슴앓이로 눈살을 찌푸리곤 했다. 같은 마을에 사는 못 생긴 여인이 서시의 찌푸린 모습이 퍽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움켜쥐고 눈살을 찌푸리고 다녔다. 같은 마을의 부자가 이 모습을 보자 대문을 잠그고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또 가난한 이는 이 모습을 보자 처자를 데리고 멀리 몸을 피했다. 못생겼다는 이 여인은 눈살 찡그린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지 눈살 찡그린 모습이 아름다운 까닭은 모른다. 『장자莊子』「천운天運」에서 뽑아왔다. 있는 모습 그대로가 아름답다. 있는 모습 허물고 남의 모습 흉내 내어 제 것인 체하면 흉하다. 자연이 아름다운 건 있는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는 곳에서, ‘고욤’은 ‘나도감’이 되었다. ‘고욤’의 소망이 ‘감’이었을라? ‘고욤’..

산문 마당 2022.10.08

사지四知

(양진楊震이) 동래東萊 태수가 되어 임지로 가는 길에 창읍昌邑을 지나게 되었다. 이때, 지난 날 그의 천거로 창읍 현령이 된 형주荊州 지방의 인재 왕밀王密이 한밤에 그를 찾아와서 황금 열 냥을 건네려고 했다. 그러자 양진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를 아는데, 그대는 나를 모르니 이 무슨 까닭이오?” 왕밀이 말했다. “밤중이라 아는 이 없습니다.” 양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 하오?” 왕밀은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東萊太守, 當之郡,道經昌邑,故所舉荊州茂才王密爲昌邑令,謁見,至夜懷金十斤以遺震. 震曰:“故人知君,君不知故 人,何也?”密曰:“暮夜無知者。”震曰:“天知,神知,我知,子知. 何謂無知!”密愧而出.) 『후한서後漢書』「양진열전楊震列傳..

산문 마당 2022.10.07

사광師曠의 용기

진晋 나라 평공平公이 사광師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나이 일흔인데 공부하기에는 너무 늦은 게 아닐까요?” 사광이 물었다. “어찌 촛불을 밝히려고 하지 않으십니까?” 평공이 되받았다. “아니, 신하된 자가 어떻게 임금과 농지거리를 할 수 있소?” 이에 사광은 이렇게 일렀다. “눈 먼 제가 어떻게 감히 임금님과 농지거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젊어서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떠오르는 태양 같고, 장년이 되어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한낮의 태양 같고, 늘그막에 배우기를 좋아하는 촛불의 밝음과 같다고 했습니다. 촛불의 밝음과 어둠 속을 걷는 것, 어느 쪽이 더 낫겠습니까?” 이 말을 다 듣고 나서 평공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말씀이외다!” (晉平公問於師曠曰:“吾年七十欲學,恐已暮矣.” 師曠曰:“..

산문 마당 2022.10.06

국어의 속살

상스런 마음이 우아한 우리 중국말과 짝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아한 우리 중국말은 날마다 상스러워지는 마음을 씻어낼 수 있다. (粗鄙的心靈是配不上優雅的漢語的, 但優雅的漢語却能拯救那些日益粗鄙的心.) 현대 중국의 작가 자핑와賈平凹가 뽑아서 편찬한『나에게 영향을 준 훌륭한 글 32편』[影響了我的三十二篇美文]의 앞머리에 출판사 편집장 셰여우슌謝有順이 쓴 글 가운데 한 부분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자기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관심은 지극한가 보다. 나도 책장을 접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혼자 음정 한껏 낮추어, ‘꽃소금’, 이렇게 소리 내어 본다. ‘소금’의 짠맛이 머리에 인 ‘꽃’때문에 향기롭고 달콤하게 혀를 간질간질 건드린다. 아, 내 사랑 우리말. 그리고 눈을 뜬 뒤, '상스런 마음이 우아한 우리말과 짝지..

산문 마당 2022.10.05

책 읽는 사람

책 자체는 세상을 바꿀 수 없지만 책을 읽으면 인생을 바꿀 수 있으며, 책을 읽는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독서는 한 사람의 사상적 경지와 수양에 관계되며, 한 민족의 바탕과도 관계됩니다. 게다가 한 국가의 흥왕과도 관계됩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는 앞날이 없고, 책을 읽지 않는 민족에게도 앞날이 없습니다. (書籍本身不可能改變世界, 但是讀書可以改變人生, 人可以改變世界. 讀書關係到一个人的思想境界和修養, 關係到一个民族的素質, 關係到一个國家的興旺發達. 一个不讀書的人是沒有前途的, 一个不讀書的民族也是沒有前途的. 현대 중국의 큰 정치지도자 원자바오溫家寶가 인터넷을 통해 젊은이들과 주고받은 말 가운데 한 구절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독서’에 관한 잠언을 찾다가 만났다. 책을 읽다가 밑줄 치고 싶은 문장..

산문 마당 2022.10.05

독서법讀書法

책을 모으고 간직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책을 잘 보는 자는 오로지 마음을 깨끗하고 바르게 하며, 책상을 깨끗이 닦고 향을 피운다. 그리고 책을 말거나 책장의 귀를 접지 말 것이며, 또 손톱으로 글자에 자국을 내지도, 손가락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지도 말 것이며, 게다가 책을 베개 삼지도 말 것이며 자르고 찌르지도 말 것이니라. 훼손되면 바로 손을 보고, 책을 볼 때는 펼치고 보지 않을 때는 덮어 놓아야 한다. (聚書藏書, 良匪易事. 善觀書者, 澄神端慮, 淨几焚香, 勿卷腦, 勿折角, 勿以爪侵字, 勿以唾揭幅, 勿以作枕, 勿以夾刺, 隨損隨修, 隨開隨掩.) 명나라 때 학자 호응린胡應麟의『소실산방필총少室山房筆叢』에서 데려온 구절이다. 이만하면 책이 곧 제 몸이다. 속독, 정독, 통독, 발췌독……, 이런..

산문 마당 2022.10.04

말의 부활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윗자리에 있는 자가 스스로 몸가짐을 바르게 하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실행이 되고, 그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는 바로 이 장군을 가리키는 말이렷다! 내가 아는 이 장군은 시골사람처럼 정직하고 무던한데다 입을 열어도 말을 능숙하게 할 줄 몰랐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난 날, 세상 사람들은 그를 알든 모르든 모두 슬퍼 마지않았다. 그의 진실한 품성이 사대부들의 믿음을 얻었던 걸까? 속담에 이르기를, “복숭아나무 오얏나무는 말을 할 줄 몰라도 그 아래 좁은 길 절로 생긴다.”라고 했다. 이 속담은 비록 사소한 일을 가리키지만 이로써 큰 도리를 비유하고 있다. 『사기史記』「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가운데 마지막 단락에서 데려왔다. 책을 읽다 ..

산문 마당 2022.10.02

말의 가치

조정에서 임명한 관리 유정식劉廷式은 본시 농민의 아들이었다. 째질 듯이 가난한 옆집 노옹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 젊은이와 혼인을 약속했다. 뒷날, 정식은 여러 해를 떨어져 지내며 공부하여 과거에 급제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옆집 노옹을 찾았으나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게다가 딸은 병으로 두 눈이 멀고 집안은 끼니조차 이을 형편이 못 되었다. 정식은 사람을 넣어 예전의 혼약을 다시 살리려고 했지만 그쪽에서는 여자의 병을 까닭으로 정식의 청을 물리쳤다. 머슴살이로 살아가는 집안이라며 감히 사대부와 혼인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식은 예전의 약속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물리지 않았다. 노옹이 세상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이전에 이미 약속한데다 딸이 병을 얻었다고 하여 어떻게 혼약을 저버릴 ..

산문 마당 2022.10.02

증자살인曾子殺人/증삼살인曾參殺人

옛적에 증삼曾參이 비費라는 지방에 살 때였다. 이곳 비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증삼과 이름이 같은 이가 사람을 죽였다. 어떤 이가 증삼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알렸다. “증삼이 사람을 죽였어요!” 이 말을 들은 증삼의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내 아들이 사람을 죽였을 리 없소.” 증삼의 어머니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베를 짰다. 잠시 뒤, 또 어떤 이가 달려와 증삼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일렀다. “증삼이가 정말로 사람을 죽였어요!” 증삼의 어머니는 여전히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베를 짰다. 잠시 뒤, 또 다른 한 사람이 달려와 증삼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증삼이 진짜로 사람을 죽였어요!” 이제 증삼의 어머니는 무서웠다. 그녀는 북을 집어던지고 담을 넘어 내달렸다. 『전국책戰國策』「진책2秦策二..

산문 마당 2022.10.01

말의 무게

위衛 나라의 어떤 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다. 새댁은 수레에 오르자 마부에게 이렇게 물었다. “양쪽에서 달리는 말은 뉘 집 것이오?” “빌렸습니다.” 그러자 새댁이 마부에게 이렇게 일렀다. “양쪽에서 달리는 말은 채찍질해도 되지만 안쪽에서 달리는 말은 채찍질해선 안 되오.” 수레가 신랑 댁 문간에 이르자 새댁은 들러리의 부축을 받으며 수레에서 내렸다. 이때, 새댁이 들러리에게 이렇게 일렀다. “빨리 부엌의 불을 끄게, 자칫 불나겠네.” 새댁이 이제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마당에 놓인 돌절구가 눈에 들어오자, 이렇게 일렀다. “이놈을 창문 아래로 옮기게, 오가는 이들에게 거치적거리겠네.” 이 말을 들은 신랑 댁 어른이 피식 웃었다. 새댁이 이른 세 마디는 하나같이 꼭 필요한 말이었지만 비웃음을 면치 못했으니, ..

산문 마당 2022.10.01

나는 침묵할 때면 넉넉함을 맛보지만 입을 열 때면 공허함을 느낀다. (當我沈黙着的時候, 我覺得充實; 我將開口, 同時感到空虛.) 루쉰魯迅의『‘야초野草’ 제사題辭』첫 문장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공식 사과하는 정치인을 볼 때면, 입이 하나인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들은 입이 하나뿐인데도 자기 잘못 가리는 데 온 힘을 쏟으며 현란하게 혀를 움직인다. 하나뿐인 입으로도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변죽이 죽 끓듯 한데, 하나 더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지 않아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마시느라 바쁠 텐데도 밥풀 튀기며 자기 자랑에 바쁜 게 바로 그들 아닌가. 말 많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너덜겅 위를 달리는 빈 수레에 올라탄 것처럼 불안하기 짝이 없다.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다니고 포탄 터지는..

산문 마당 2022.10.01

나의 어두운 유년

열 가정을 하나의 십什으로, 다섯 가정을 하나의 오伍로 편성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이들이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도록 하였다. 한 가정이 법을 어기면 열 가정이 연루되어 응분의 처벌을 받았다. 간사하고도 흉악한 일을 보고도 고발하지 않은 자는 요참으로 다스렸다. 또 고발한 이에게는 적의 목을 벤 것과 같은 상을 내렸으며, 숨겨준 이에게는 적에게 항복한 자와 같은 벌을 내렸다. 사마천의『사기』「상군열전商君列傳」을 읽다가 이 부분에 이르면 잠시 눈을 감고 몇 십 년 전으로 돌아간다. 그날 밤, 어머니는 곧게 편 집게손가락을 꼭 다문 입술 가운데에 곧게 세우면서 딱 한 마디만 했다. “쉿!” 목소리는 낮고 짧았지만 자못 위엄이 넘쳤다. 우리 형제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우리 집 안방 바람벽 뒤쪽으로 난 좁은 길로..

산문 마당 2022.09.28

임금님의 비속어卑俗語

1. 먼저 에서 한 마디 가져온다. "주周의 열왕烈王이 세상을 떠나자 각지의 제후들이 달여와서 조문을 했다. 그런데 유독 제齊의 위왕威王만이 늦게 도착했다. 주의 왕공 대신들이 몹시 화가 나서 사자를 보내 제의 위왕에게 따져 물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진 거외다. 우리 천자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우리 주 왕실의 동쪽 땅에 봉해진 당신이 때맞춰 조문하지 못했으니, 그 죄는 목을 내려야 마땅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제의 위왕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 제기럴, 종년의 새끼!' 결국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2. 서한 때, 이야기 하나 서한의 개국 황제 유방劉邦의 부하 진희陳豨가 갑자기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유방은 친히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토벌 작전을 펼..

산문 마당 2022.09.28

속임수의 한계

연못의 물을 바짝 말린 뒤에 물고기를 잡는다면 어떻게 물고기를 못 잡겠습니까? 하지만 이듬해에는 그곳에 물고기가 없겠지요. 숲을 다 태운 뒤에 사냥을 한다면 어떻게 짐승을 못 잡겠습니까? 하지만 이듬해에는 그곳에 짐승이 없겠지요. 속임수로는 지금이야 그럭저럭 이익을 보겠지만 그 뒤에는 또다시 이익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오래 써먹을 계책이 아닙니다. 『여씨춘추呂氏春秋』「효행람孝行覽」 가운데 한 부분이다. 기원전 632년, 진晋 나라와 초楚 나라가 위衛 나라 땅 성복城濮에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였다. 이때, 진나라 문공文公이 구범咎犯을 불러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묻는다. “속임수를 쓰면 됩니다.” 문공이 구범의 뜻을 대신 옹계雍季에게 알리며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옹계..

산문 마당 2022.09.27

난득호도難得糊塗

총명하기 어렵고 어리석기 어렵네. 총명함에서 어리석음으로 넘어가기는 더욱 어렵네. 한 수 내려놓고 한 발자국 물러나면, 그 자리에서 마음 편안하니, 훗날의 복 보답을 바라서가 아니라네. 聰明難, 糊塗難. 由聰明而轉入糊塗更難. 放一着, 退一步, 當下心安, 非圖後來福報也. 보고도 못 본 체해야 어른다울 때가 있다. 웬만하면 침묵이 금이다. 시청 뒷산에 올라 저 멀리 소백산 이어진 봉우리들이 이루는 느린 곡선을 바라보노라면 어른스러움은 ‘짐짓 어리석어지기’라는 믿음이 굳어진다. ‘컹!’, 기침 한 번이 백 마디 웅변보다 힘 있을 때도 있지 않은가. 이 경우 총명함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백 지 한 장. 위 글은 18세기 청나라 때 서화가 정판교鄭板橋의 서화작품에서 데려왔다. 총명한 자가 어리석은 체할 수밖에 없었..

산문 마당 2022.09.25

사진 한 장

서태후 중국 쪽 사이트를 헤매다가 청淸 나라의 끝자락을 붙안고 권세를 오로지했던 서태후西太后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만난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이들도 함께 만난다. 안전을 지키는 이들이었을까, 아니면 외로움을 눅여주는 이들이었을까.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나도 내 사진첩을 펼친다. 한 학급뿐인 시골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사진관으로 달려간 친구들이 어깨 겯고 찍은 사진에 눈길을 멈춘다. 누군들 외롭지 않았으랴만, 우리는 외롭지 않으려고 함께 사진관으로 달려갔다. 이제 곧 십대를 끝내고 우리는 헤어질 수밖에 없었지만, 헤어지지 않으려고 함께 사진 속으로 들어갔다. 상품으로 받은 몇 권의 책을 탁자 위에 훈장처럼 펼쳐놓고 우리는 아름다운 미래의 꿈까지 함께 꾸었다. 지금 이 사진을 펼치면, 사춘기를 막..

산문 마당 2022.09.25

우공이산愚公移山

태항太行과 왕옥王屋, 이 두 산은 둘레만 해도 7백 리요 높이는 8천 장丈이라, 본래부터 기주冀州 남쪽에서 하양河陽 북쪽 사이에 있다. 이곳 북쪽 산기슭에 큰 산을 마주하여 이제 아흔 살이 다 된 우공愚公이 살았다. 높은 산이 산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을 막아섰기에 나들이를 하려면 큰 산을 돌아서 가야했다. 이리하여 우공은 온 가족을 불러 의논했다. “이제 우리가 온 힘을 다 기울여 험한 산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면 예주豫州 남쪽으로 직통하고 한수漢水 남쪽에 다다를 수 있는데, 어떤가?” 모든 가족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찬성했는데 그의 아내는 의문을 제기했다. “당신 힘으로는 자그마한 언덕 괴보魁父도 어쩌지 못했는데, 태항산과 왕옥산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 수 있겠어요? 게다가 파낸 돌이랑 흙은 또 어떻..

산문 마당 2022.09.24

귀적의貴適意

장계응張季鷹이 제왕齊王의 동조속관東曹屬官으로 전임되었다. 그는 서울 낙양에서 가을바람이 이는 것을 보자 고향 오중吳中의 나물 요리와 농어회가 먹고 싶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삶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인즉, 내 어찌 고향에서 천리 밖 먼 곳까지 와서 벼슬을 하며 명성과 감투를 탐한단 말인가!” 이리하여 그는 수레에 올라 남쪽 고향 땅으로 돌아갔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식감識鑒」 가운데 한 부분이다. 이 책에는 자기의 마음과 뜻에 맞는 생활을 추구한 위진 시대 선비들의 언행과 일화가 가득하다. ‘귀적의貴適意’, 곧 ‘제 뜻에 맞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개성적인 생활관을 이 시대 선비들은 힘써 좇는다. 하늘이 준 바탕에 따라 내 모습 그대로 사는 삶이야말로 정말 아름답다. 내가 좋아하..

산문 마당 2022.09.22

얼간이

송宋 나라의 어떤 이가 길을 가다가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부동산 계약서를 주웠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것을 숨겨두고 여기에 기록된 부동산의 가치를 남몰래 셈해 보고는 이웃에게 이렇게 일렀다. “나도 부자 될 날이 머지않았네.” 『열자列子』「설부說符」에서 가져왔다. 이런 얼간이는 예나 이제나 저쪽이나 이쪽이나 두루 존재한다. 그러기에 선인들은 바른 길이 아니면 아예 갈 생각도 말라고 따끔하게 경계한다. 공자孔子도 ‘부귀는 사람들이 다 원하는 바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지 않으면 가지지 않는다.’라고 우리에게 이른다. 지나친 욕망은 인간을 얼간이로 만든다. 욕망의 키가 절제의 키보다 높아지는 순간, 얼은 제 자리를 떠나기 때문이다. 뱁새가 황새 되려고 마음먹지 않고, 황새가 뱁새에게 으스대는 일 없다. ..

산문 마당 2022.09.22

영광과 치욕

영광과 치욕의 주요한 차이, 그리고 안위安危와 이해利害의 일반적인 모습은 이러하다. 도의道義를 먼저 생각하고 이익을 나중에 헤아리면 영광을 얻고, 이익을 먼저 헤아리고 도의를 나중에 생각하면 치욕을 당한다. 영광을 얻은 이는 언제나 막힘이 없으며, 치욕을 당한 자는 언제나 떳떳하지 못하다. 막힘이 없는 이는 언제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떳떳하지 못한 이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이 바로 영광과 치욕의 주요한 차이이다. 재능이 있고 신중한 이는 언제나 안전하게 이익을 얻지만 방탕하고 흉악한 이는 언제나 위험에 처하고 손해를 당한다. 안전하게 이익을 얻은 이는 언제나 유쾌하고 즐겁지만 위험에 처하여 손해를 당하는 이는 언제나 우울한데다 위기까지 느낀다. 유쾌하고 즐거운 이는 언제나 장수하지..

산문 마당 2022.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