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유王子猷가 배를 타고 서울 가는 길에 올랐다. 배가 부두에 정박한 채 아직 뭍에 오르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환자야桓子野가 피리를 잘 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지만 알지는 못했다. 바로 이때, 환자야가 저편 강기슭을 지나가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환자야입니다.”
왕자유는 배 안에서 환자야를 아는 어떤 이가 하는 말을 듣고 당장 사람을 보내 자기의 뜻을 전하게 했다.
“당신이 피리를 잘 분다는 말을 진즉 들었소이다. 나를 위해 한 곡 들려주시구려.”
환자야는 당시 높은 벼슬을 한 적이 있었지만 왕자유의 명성을 익히 들어온 터라 즉시 수레에서 내려 배에 올랐다. 그리고 접의자에 앉아 왕자유를 위해 세 곡을 분 뒤에 다시 뭍에 올라 수레에 몸을 싣고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은 모두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王子猷出都, 尙在渚下. 舊聞桓子野善吹笛, 而不相識. 遇桓于岸上過, 王在船中, 客有識之者云: ‘是桓子野.’ 王便令人與相聞云: ‘聞君善吹笛, 試爲我一奏.’ 桓時已顯貴, 素聞王名, 卽便回下車, 踞胡床, 爲作三調. 弄畢, 便上車去, 客主不交一言.
『세설신어世說新語』「임탄任誕」가운데 한 부분이다.
왕자유는 서성書聖으로 널리 알려진 왕희지王羲之의 다섯째아들, 아버지를 이어 역시 서예가였다. 그는 천성이 초연한데다 비범하여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관직을 아예 물러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환자야는 동진의 음악가이면서 군사 방면에도 뛰어난 재략을 갖추었던 인물이었다. 특별히 피리 연주에 뛰어났기에 당시 사람들을 그를 ‘적성笛聖’이라 이르며 우러렀다.
이 둘은 만난 적은 없었지만 서로의 재능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날, 피리 연주 듣기를 청한 왕자유도 그렇지만 그의 청을 받아들여 세 곡이나 연주한 뒤 그대로 자리를 뜬 환자야의 모습도 보통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참으로 단순하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산뜻하다. 그래서 오히려 진실하다. 그리고 솔직하다.
옛적의 아름다움은 지금도 아름다움이다. 또한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