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 이야기

<장자莊子> '소요유 逍遙遊' 만필漫筆 ①

촛불횃불 2025. 1. 29. 20:11

1--. 변화變化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곤이다. 곤의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이라고 한다. 붕의 등짝이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힘껏 솟구쳐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닷물이 일렁이며 큰바람 불면 남녘 바다로 날아가려고 한다. 남녘 바다란 천지天池를 말한다.

 

.제해齊諧는 괴이한 일을 적은 책이다. 이 책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붕이 남녘 바다로 날아갈 때에 날개로 물낯을 치면 불러일으킨 파도가 3천 리, 회오리바람 타고 9만 리 높이 올라 여섯 달을 날아서야 목적한 곳에 이른다.”

 

北冥有魚其名爲鯤鯤之大不知其幾千里也化而爲鳥其名爲鵬鵬之背不知其幾千里也怒而飛其翼若垂天之雲是鳥也海運則將徙於南冥南冥者天池也

齊諧者志怪者也諧之言曰:「鵬之徙於南冥也水擊三千里摶扶搖而上者九萬里去以六月息者也。」

 

장자도 오늘날의 많은 작가들처럼 이 글의 첫 단락을 어떻게 시작할 것인지를 두고 고심했을 것입니다. 더구나소요유逍遙遊장자莊子내편 일곱 편 가운데 첫 번째 편장이 아닙니까. 장자는 끝내 오래된 데다 신기하기까지 한 전설을 첫 단락으로 시작했습니다.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큰 곤과 붕이 두 바다, 곧 남명南冥과 북명北冥을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북녘 바다남녘 바다로 옮겨진 두 바다는 아득하고도 멀리 펼쳐진 데다 지금껏 세상 사람들이 본 적 없는 곳입니다. 명나라 때의 스님으로서 대학자였던 덕청德淸은 특히 북녘 바다’, 곧 북명이 심오하고 유현幽玄한 우주의 바탕되는 근본을 상징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은 원래 물고기의 알을 가리키는 글자였습니다. 이것이 치어稚魚로 의미 전환을 일으켰다가 고대 전설 속의 대어大魚로 자리잡습니다. 매우 큰 사물을 비유적으로 쓴다는 덧말이 붙은 곤붕鯤鵬의 낱말 풀이, ‘상상 속의 큰 물고기와 큰 새도 바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소요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물고기의 알이 깨어서 어린 물고기가 되고, 다시 어린 물고기가 그 크기가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큰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큰 물고기 은 등짝이 몇 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큰 새, 곧 붕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예삿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장자는 천연덕스럽게 예삿일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장자의 머릿속에는 이런 일들이 흔히 있을 뿐만 아니라 있어야 할 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소요유逍遙遊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 한문 공부를 하면서 느낀 건데, 한자 자체는 살아서 내게 말을 건네는 것 같습니다. ‘소요유逍遙遊도 그렇습니다. 자세히 보면, 이 세 글자에는 공통된 필획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부수의 이름으로 책받침이라 일컫는 ’, 바로 이 글자입니다. 이 글자의 원형은 ’, 훈과 음은 쉬엄쉬엄 갈 착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장자莊子내편의 수편首篇 소요유逍遙遊제목만 보고도 장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등바등 애면글면 바삐 살지 말고 쉬엄쉬엄 쉬어가며 느긋하게 사는 삶을 장자는 앞세웁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나는 위 단락에서 화이위조化而爲鳥에 주목합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에 방점을 찍습니다. 변하여 새가 되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장자는 풍부한 상상과 비유를 통하여 자유과 속박, 그리고 의존과 의존할 수 없는 것 따위의 철학적 명제를 탐구했습니다. 그 가운데 변하여 새가 되었다는 구절로써 세상 만물은 바뀌어서 달리 되어야 마침내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적 경지에 이를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는 형태의 변화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사물에 내재한 본질의 변화를 통해 더 높은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강조합니다.

주역周易에 관한 논술 가운데 사상적 수준이 최고에 이르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계사繫辭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사물이 발전하여 절정에 이르면 변화해야 하고, 변화한 뒤에야 막힘없이 통할 수 있으며, 이제야 그 사물은 끊임없이 발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장자는 속박을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에 이르려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는 이런 변화야말로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라고 믿었습니다. 게다가 세상 만물은 모두 대립하면서도 상호의존적이어서 절대적인 자유란 없지만, 모든 것을 벗어나 유유자적할 수 있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무기无己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무기란 각자 자신의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합니다. 장자는 화이위조化而爲鳥’, 변하여 새가 되었다는 비유를 통하여 인간은 이를 이해하고 이런 변화를 받아들이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정신적인 자유과 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붕정만리鵬程萬里

 

大鵬一日同風起, 扶搖直上九萬里.

假令風歇時下來, 猶能簸却滄溟水.

世人見我恒殊調, 聞余大言皆冷笑.

宣父猶能畏後生, 丈夫未可輕年少.

 

대붕이 어느날 바람과 함께 날아올라,

회오리바람 타고 그대로 구만 리를 올랐습니다.

바람 멎는 어느 때 내려온다면,

짙은 바닷물을 날개로 쳐서 날릴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보고 기이하고 황당하다며,

내 큰소리 듣고 모두 빈정거리며 웃습니다.

공자께서도 오히려 젊은이를 두려워하셨으니,

대장부 이옹께서는 젊은이를 허투루 여기지 마시지요.

상이옹上李邕(이옹에게 올립니다)이라는 제목의 이 칠언시는 성당 시기를 살았던 이백李白의 작품입니다. 이 글의 앞머리에 든, 붕이 남녘 바다로 날아갈 때에 날개로 물낯을 치면 불러일으킨 파도가 3천 리, 회오리바람 타고 9만 리 높이 올라 여섯 달을 날아서야 목적한 곳에 이른다.”는 이 구절을 전고로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역의 피가 섞여 대담하고 통이 컸던 낭만파 시인 이백은 황제였던 현종 앞에서도 술에 취한 채 거침없었으니, 이는 태평성세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만든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앞 세기의 큰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자기가 정말 살고 싶은 때와 장소로 8세기 당나라를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당시 유주渝州 지방 자사 刺史였던 이옹이 이백의 큰소리에 불쾌한 낯빛을 보였지만, 이백은소요유의 큰 새 을 그리며 이 시를 노래했습니다. 자유분방한 데다 거칠 것 없는 장자의 모습을 이백은 평소 존경하며 사모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장자가 살았던 기원전 4세기 말엽에서 기원전 3세기 말엽까지의 시기는 그치지 않는 전쟁으로 피가 튀고 창이 번득이던 전국시대 한가운데였습니다. 종주국 주 왕실의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비롯된 춘추전국시대, 이 가운데 앞 시기인 춘추시대에는 오패五霸라는 낱말이 보여주듯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이 그칠 날 없었습니다. 애초 일백마흔 개가 넘는 제후국이 난립하던 이 시대를 넘어 전국시대에 오면 일곱 개의 큰 나라, 곧 칠웅七雄이 서로 으르렁거리며 최후의 일웅이 되기 위해 힘을 겨룹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위대한 사상가 장자는 칠웅에 끼지도 못하는 자그마한 제후국 송의 몽읍蒙邑(지금의 허난성河南城 상치우商丘)에서 태어나 한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칠웅 가운데 끼인 자그마한 제후국 송은 거의 같은 처지에 놓인 정이나 위처럼 강대국의 먹잇감으로 도마 위에 놓인 물고기 신세였습니다. 기원전 369년에서 기원전 286년까지 장자가 세상을 살았던 여든 몇 해만 해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전쟁이 여덟 차례나 있었습니다. 그가 태어난 해 기원전 369년에는 송과 가까운 탁택濁澤(지금의 허난성 신정시新鄭 부근)에서 한과 조의 연합군이 남방의 큰 나라 초와 전쟁을 벌입니다. 그가 태어난 곳에서 불과 20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진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전쟁이 그의 한평생 동안 여덟 차례나 잇달아 일어납니다.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난 해, 기원전 286년 이웃 제의 침공으로 송은 전쟁 속에 멸망합니다.

내일을 담보할 수 없는 전쟁이 잇달았던 춘추전국시대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대한 사상가들이 탄생했던 시기, 무려 2백 명이 넘는 제자백가가 백가쟁명하던 때, 장자는 특별히 드높습니다. ‘날개로 물낯을 치면 불러일으킨 파도가 3천 리, 회오리바람 타고 9만 히 높이 올라 여섯 달을 날아서야 목적한 곳에 이르러 날개를 쉰다붕정만리는 피비린내 가득했기에 절대적 자유를 향한 장자만의 강렬한 포부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미와 산비둘기가 대붕의 행위에 곤혹스러워하며 비웃는 장면이 뒤를 이어 펼쳐지지만, 편협한 이들의 눈에는 변화하여 유유자적하며 절대 자유를 이미 가진 곤과 붕의 원대한 지향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장자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두 세기가 되었을 때, 서한의 사마천은 사기史記』「칠십열전七十列傳가운데 노자老子, 신불해申不害, 한비자韓非와 합전으로 겨우 몇 줄 언급할 정도로 푸대접을 했지만, 이는 유가를 통치 이념으로 중심에 둘 수밖에 없었던 왕조 시대 권력자의 입장을 대변한 것 같아서 자못 씁쓸합니다. 그러나 곤이 변하여 붕이 되고, 이 붕이 날개 솟구쳐 회오리바람 타고 여섯 달이나 걸려서 남명, 곧 남녘 바다에 이르는 장면은 그 틀이나 범위만 해도 가히 유가를 압도하고도 남습니다.

 장자는 소요유해야만 변화하여 곤붕이 될 수 있고, 끝내 붕정만리하여 절대 자유를 누리며 쉬엄쉬엄 여유만만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절대 자유를 누리며 쉬엄쉬엄 여유만만하게 소요유했기에 변화할 수 있었고, 끝내 붕정만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이는 같이 나란히 가야만 하는 수례바퀴의 궤도와 같은 이야기가 되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