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눈 밝은 귀
견오肩吾가 연숙連叔에게 가르침을 간청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접여接輿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네만, 이게 너무 큰소리에 터무니가 없는 데다, 한번 시작하면 나아가기만 했지 원래 이야깃거리로 돌아올 줄 모른다데. 난 그 이야기가 하늘의 은하수처럼 끝이 없어서 사뭇 놀랍고 두려웠네. 보통 사람의 말과는 차이가 너무 커서 사리에도 맞지 않단 말일세.”
이 말을 들은 연숙이 물었다.
“그가 한 말이 어떤 내용인데?”
견오가 들은 이야기를 이렇게 전했다.
“저 먼 막고야산藐姑射山에 신인神人이 사는데, 피부는 응결하여 얼음이 된 눈처럼 하얗고 몸매는 처녀처럼 부드럽다네. 곡식은 입에 대지 않고 맑은 바람에 단 이슬만 마시며 구름 타고 용을 몰아 온 세상을 노닌다네. 정신이 한데 모이면 세상 만물이 병들지 않고 해마다 곡식도 풍성하니 무르익게 한다네. 나는 이게 모두 허황하다고 생각하여 조금도 믿을 수 없네.”
이 말을 들은 연숙이 이렇게 말했다.
“그래! 눈먼 이와 함께 아름다운 꽃무늬나 색채를 감상할 수 없고, 귀먹은 이와 함께 종고鐘鼓의 음악에 귀기울일 수 없네. 어디 몸뚱이에만 장님 있고 귀머거리 있겠는가? 생각에도 장님 있고 귀머거리 있네. 이게 바로 지금의 그대 견오를 말함일세. 그분 신인神人의 덕행은 세상 만물을 하나로 혼합하여, 이로써 온 천하를 멋지게 만들려는 건데, 다른 어느 누가 바삐 천하를 위해 수고하려고 하겠는가! 이런 분은 말일세, 외물外物이 이분의 몸에 상처를 내어 해칠 수도 없고, 홍수가 파도처럼 사나워도 이분을 삼킬 수가 없으며, 큰 가뭄이 쇳덩이와 돌덩이를 녹이며 산자락을 태워도 뜨거움을 모른다네. 이분 신인은 제 몸의 먼지나 때, 그리고 쭉정이나 겨로도 성스럽고 어질다는 요나 순 같은 임금을 만들어 내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애써 자기 임무로 여기겠는가!”
肩吾問於連叔曰:「吾聞言於接輿,大而無當,往而不反。吾驚怖其言,猶河漢而無極也,大有逕庭,不近人情焉。」連叔曰:「其言謂何哉?」曰:「藐姑射之山,有神人居焉,肌膚若冰雪,綽約若處子,不食五穀,吸風飲露。乘雲氣,御飛龍,而遊乎四海之外。其神凝,使物不疵癘而年穀熟。吾以是狂而不信也。」連叔曰:「然,瞽者無以與乎文章之觀,聾者無以與乎鍾鼓之聲。豈唯形骸有聾盲哉?夫知亦有之。是其言也,猶時女也。之人也,之德也,將旁礡萬物,以為一世蘄乎亂,孰弊弊焉以天下為事!之人也,物莫之傷,大浸稽天而不溺,大旱、金石流、土山焦而不熱。是其塵垢粃糠,將猶陶鑄堯、舜者也,孰肯以物為事!」
이 이야기에서 견오와 연숙은 관객 앞에 놓인 무대에 실제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눈앞의 무대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접여와 막고야 산의 신인도 등장 인물입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작품『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Godot’는 끝내 무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주요 등장인물인 것처럼, 유치진의 작품『토막土幕』에서 ‘명서’는 끝내 무대에 오르지 않지만 주요 등장인물인 것처럼 말입니다. 어떻든 견오와 연숙은 둘 다 실제의 인물은 아닙니다. 이 우화를 위해 장자가 만든 인물입니다.
견오는「소요유」외에도 내편의「대종사大宗師」와「응제왕應帝王」에도 등장합니다. 그리고 외편의「전자방田子方」에도 나옵니다. 장자는 견오의 형상을 통하여 유가적 인물로 표현합니다. 견오는 접여나「전자방田子方」에 등장하는 손숙오孫叔敖 등과의 대화를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대한 깊는 통찰과 이해를 구체적으로 드러냅니다. 그의 이름 글자 가운데 ‘견肩’은 ‘짊어지다’는 의미가, ‘오吾’는 정신적인 자기 수행으로 도에 이르렀음을 표시합니다. 이 때문에 ‘견오肩吾’는 미래와 희망을 짊어진 지혜로운 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견오가 오늘 연숙에게 가르침을 받는 장면은 스승 앞에 무릎 꿇고 꾸지람 듣는 초등학생의 모습입니다. 춘추시대 초楚의 선비로서, 행동거지가 상궤를 벗어난다고 하여 ‘광접여狂接輿’라고 불리던 접여의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지만, 중심은 연숙이 이른 ‘신인神人’입니다. 이를 이르는 연숙은 이미 신인에 이른 어르신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장자』에서 장자에게, 아니면 장자의 후학들에게 야단맞는 유가 인물을 흔히 만날 수 있습니다. 가져온 이 문단에서 신인神人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견오도 이런 경우입니다.
『장자』에는 성인聖人, 지인至人, 신인神人 등의 낱말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내편에만 해도 성인은 스물여덟 차례, 지인은 일곱 차례, 그리고 신인은 네 차례입니다. 글을 읽는 독자라면 당연히 이들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성인은 사상이나 수양 면에서 완전하여 결함이 전혀 없는 훌륭한 인물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지인은 소아小我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공명功名의 속박에서 벗어나 세계와 자아, 즉 물아物我의 경계를 모두 잊고 절대 자유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입니다. 또 신인은 세상 만물의 본질과 규율을 통찰하고 행위는 자연의 순리를 따를 수 있는 인물입니다.
이야기가 서로 혼동될 정도로 좀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이들 셋은 명칭은 성인, 지인, 신인 등 서로 다릅니다만 본질적으로는 장자가 추앙하는 ‘도道’를 얻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장자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도덕적 수양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입니다. 이들은 모두 장자가 추구하는 ‘소요유’의 삶을 살 수 있는 이들이라고 뭉뚱그릴 수 있습니다.
장자는「소요유」에 견오와 연숙 이야기를 데려오며 이상적인 인격과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먼저 견오는 접여의 말을 듣고, ‘이게 너무 큰소리에 터무니가 없는 데다, 한번 시작하면 나아가기만 했지 원래 이야깃거리로 돌아올 줄 모른다데.’라며 실제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고 실현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깊은 곤혹에 빠진 것입니다. 접여가 묘사한 막고야산의 신인 모습에 대해서도 의심합니다. 아예 거짓말로 남을 속이는 헛소리로 치부합니다.
그런데 연숙이 이런 의문을 풀어주는 대답은 다릅니다. 접여가 한 말은 결코 과녁 없이 쏜 화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견오와 같은 세속적인 인물을 겨냥하여 내놓은 말이라는 것이지요. 연숙은 사람의 생각에도 눈멀고 귀먹은 이가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인은 세상 만물을 뒤섞어서 하나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곧 세상의 이욕利慾과 공명功名 등의 욕망에서 초월하여 벗어났을 때, 이것들에 상처받거나 다칠 일도 없을 뿐만 아니라 요 임금이나 순 임금이 이룩한 공훈이나 업적도 가볍게 이룰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신인입니다. 그러기에 신인은 세상의 속된 일에 관심을 기울일 리 없습니다.
장자는 견오와 연숙의 대화를 통하여 이상적인 인물을 제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어쩔 수 없는 곤경도 넌지시 알립니다. 또 장자는 연숙의 입을 통하여 보여준 신인을 통하여 세상의 속된 일에서 초탈하여 정신적인 자유를 추구할 것을 우리에게 알립니다. 이와 동시에 현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세속적인 혼란으로 속박되어 신인의 경지에 도달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넌지시 이릅니다.
평범하고 속된 세상으로부터 초탈하여 절대 자유의 경지에 이른 신인 이야기는 뒷날 문학에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성당의 시인 이백은 그의 고체시『몽유천모음유별夢遊天姥吟留別』에서 ‘어찌 고개 숙이고 허리 구부려 권력과 부귀에 아부하며/ 내 마음과 얼굴을 펼 수 없게 하랴.’[安能摧眉折腰事权贵,使我不得开心颜.]라고 노래합니다. 절대 자유에 이르고자 힘쓰는 많은 이를 속박하는 권세에서 벗어난 모습은 위에 가져온 문단의 신인과 한가지입니다. 이백과 똑같은 시대를 살았던 왕유王維도 막고야산에 사는 신인의 삶을 동경했기에『산거추명山居秋暝』에서 ‘고요 가득한 산속에 비 내린 뒤/ 저녁 되니 초가을 날씨 쌀쌀하네./ 밝은 달은 솔숲을 비추고/ 맑은 샘물은 너럭바위 위로 흐르네.’[空山新雨后,天气晚来秋. 明月松间照,清泉石上流.] 라고 노래합니다. 바로 세속을 초탈한 신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공간적 배경으로 데려온 ‘고요 가득한 산속’[空山]은 막고야산을 연상하게 만듭니다.
신화 속의 산으로 소개한 중국 쪽 사전을 펼치면, 전고로 제일 앞에 소개한 문장은「소요유」의 이 문단 가운데 ‘저 먼 막고야산藐姑射山에 신인神人이 사는데, 피부는 응결하여 얼음이 된 눈처럼 하얗고 몸매는 처녀처럼 부드럽다네. 곡식은 입에 대지 않고 맑은 바람에 단 이슬만 마시며 구름 타고 용을 몰아 온 세상을 노닌다네.’, 바로 이 부분입니다. 장자가 이상적인 인물 신인이 사는 곳으로 끌어온 ‘막고야산’은 앞의 이백이나 왕유 말고도 이미 그 이전 동진東晉 시대 시인 도연명陶淵明이 그린 이상향에서도 다시 탄생합니다.
이런 흐름은 뿌리를 깊이며 현대에도 맥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루쉰魯迅의 작품 가운데『광인일기狂人日記』속의 광인이나『아Q정전阿Q正傳』속의 아Q 같은 인물은 둘 모두 성격이나 행위 면에서 초현실적인 색채를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이 전통적인 의미를 갖춘 신력神力과는 거리가 있을지라도 ‘신인神人’의 영향을 얼마만큼 받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지난 세기 말엽, 중국을 떠나 프랑스에 망명한 작가 가오싱젠高行建은 소설『영산靈山』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는 21세기가 열리는 첫해 서기200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습니다. 이미 프랑스에 망명하여 귀화했기에 영광은 그의 어머니 나라에 안길 수 없었지만, 이 작품을 포함하여 그의 모든 작품은 한문으로 창작되었기에 그가 태어난 어머니 나라 중국에 진 빚을 갚은 셈이지요. 어떻든 우리나라에『영혼의 산』으로 번역 출간된 이 소설에서 1인칭 화자인 ‘나’는 긴 여정 끝에 지도에도 없는 ‘영혼의 산’에 이릅니다. 정신적인 절대 자유를 누리기 위한 ‘나’의 긴 여정과 ‘나’는 곧 ‘너’임을 알려주는 서사는 ‘신인’에 이르려는 몸짓입니다. 나는 가오싱젠이 이르려는 ‘영산靈山’이 곧 옛적 ‘막고야산藐姑射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막고야산의 신인神人처럼 정신적으로 절대 자유에 이르러 외물外物에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몸뚱이도 몸뚱이지만, 생각, 곧 마음도 눈멀지 않고 귀먹지 않아야겠습니다. 이는 예나 이제나 도에 이르려는 모든 이들의 소망입니다.
견오는 오늘 연숙의 꾸지람 섞인 가르침으로 깊은 잠에서 깨어났을 테지요. 맑은 눈과 밝은 귀는 견오를 절대 자유의 경지에서 ‘소요유’하게 만들 테지요.
'<장자莊子>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만필⑤ (1) | 2025.02.13 |
---|---|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만필④ (4) | 2025.02.06 |
<장자莊子> '소요유 逍遙遊' 만필漫筆 ② (0) | 2025.02.01 |
<장자莊子> '소요유 逍遙遊' 만필漫筆 ① (2) | 2025.01.29 |
<장자莊子> '응제왕應帝王' (4) | 2024.0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