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莊子> 이야기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만필④

촛불횃불 2025. 2. 6. 09:50

1-.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환경

 

(북쪽) 의 어떤 이가 장보章甫를 만드는 기술을 밑천으로 삼아 남쪽 월에 가서 모자를 팔려고 했다. 월에 사는 사람들은 머리를 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온몸에 문신을 했기에 모자를 쓸 일이 없었다. 요 임금이 천하의 백성을 잘 다스리고 세상을 안정시키고 나서 막고야산으로 네 분의 신인을 뵈러 갔다. 분수汾水 북쪽의 도읍으로 돌아오자 그만 멍하니 얼이 빠지며 천하를 잊어버렸다.

 

宋人資章甫而適諸越越人斷髮文身無所用之堯治天下之民平海內之政往見四子藐姑射之山汾水之陽窅然喪其天下焉

 

이 책에서 내가 모본母本으로 삼는 중국철학서전자화계획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은 앞의 견오연숙이야기와 이 이야기를 하나의 문단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여기 데려온 송의 어떤 이와 요 임금 이야기는 따로 처리하든지, 아니면 요 임금 이야기를 견오와 연숙 이야기 바로 뒤에 붙이든지 하면 오히려 글 전체의 흐름에 맞을 듯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나의 단락으로 떼어내어 여기 가져왔지만, 나는 송의 어떤 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두 번째 세습 왕조였던 상은 달리 은이라고도 합니다. 또 따로 은상殷商이라고도 부릅니다.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046년경까지 500여 년 동안 서른한 명의 임금을 내놓은 이 왕조는 다른 왕조와는 달리 도읍을 여러 차례 옮깁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1300년경 은으로 도읍을 옮긴 뒤 중흥을 이룹니다. 이 때문에 상을 은 또는 은상이라고 부릅니다. 뒷날, 중국 역사에서 세 번째 세습 왕조를 연 주의 무왕武王이 상을 무릎 꿇리며 무너뜨린 뒤 왕족들을 이주시켜 봉한 나라가 바로 송입니다.

장자가 태어난 송은 바로 이런 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자가장자에 데려온, 장보 만드는 기술에 뛰어난 이가 송나라 사람이라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장보는 바로 상 왕조 때 사람들이 사용하던 관, 모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송의 어떤 이는 멸망한 상 왕조의 유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장자내편에는소요유에만 송의 어떤 이[宋人] 가 두 번 등장합니다. 앞에 데려온 송의 어떤 이와 그 우의寓意가 거의 겹친다고 평가할 수 있는 이 부분은 다음 꼭지 <혜자惠子와 장자의 대화>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지요.

그런데 중국 옛적 문헌에는 좀 모자라는 인물로 송나라 사람을 등장시키는 경우가 꽤 있습니다. 한번 들어볼까요? 바로 알묘조장揠苗助長이라는 성어를 탄생시킨 이야기입니다.

 

의 어떤 농부가 자기가 심은 농작물이 잘 자라지 않음을 안타깝게 여기며 어린 농작물을 하나하나 살짝 들어올렸다. 피곤했지만 만족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온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 참 피곤하오. 내가 어린 농작물 싹이 잘 자라도록 좀 도와주었소.”

아들이 급히 달려가 살피니, 어린싹은 벌써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宋人有憫其苗不長而揠之者, 芒芒然歸, 謂其人曰: “今日病矣, 予助苗長矣!”

其子趨而往視之, 苗則槁矣.

 

맹자孟子』「공손추상公孫丑上에 나오는 이야기 중 한 도막입니다. 졸저 <말의 말>에서 나는 이 이야기에 내 을 이렇게 붙였습니다.

 

- 지금도 이곳 한국 땅에는 옛적 이 농부처럼 제 자식을 다루는 부모가 있다, 아니 많다. 좀 가만히 두시라, 자식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오로지 자연의 이치 따라 그냥 북돋우면 될 일이다.

엄동설한이 아무리 매서워도 오는 봄 앞에 무릎 꿇는 이치가 허물어진 적은 한 번도 없다. 봄의 문턱에 들어선 지 한참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이상 한파가 닥쳤다고 오버코트를 다시 꺼내 입지만 몇 날 가지 못하고 소백산 흰 눈은 그야말로 봄눈 녹듯이 사라지는 게 자연의 이치이다. 나팔꽃은 새벽에 입을 열어 나팔 불지만 분꽃은 저녁밥 지을 때가 되어야 꽃잎을 연다. 나팔꽃이 저녁에 입을 열어 나팔 불지 않고 분꽃이 새벽에 꽃잎 여는 일 없다.

나팔꽃에게 한밤 되었으니 나팔 불라 마시라, 분꽃에게 첫닭 울었으니 꽃잎 벌라 마시라.

당신은 제 자식이 말라비틀어지길 바라는가?

 

여기에 원문을 데려오지는 않겠습니다만 수주대토守株待兎라는 성어를 만들며 어리석은 인물로 인구에 널리 알려진 이도 송나라 사람입니다. 그 내용은한비자韓非子』「오두五蠹에 한 문단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무말뚝에 어쩌다 걸려서 죽은 토끼를 한 번 잡은 송나라의 어떤 농부가 이제는 농사일을 하지 않고 나무말뚝 곁만 지켰다는 이 이야기는 한 가지 일에만 묶여 발전을 모르는 어리석은 인물을 이릅니다. 나는 졸저 <말의 말>에서 이 이야기에 내 을 이렇게 얹었습니다.

 

우연이 필연을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우연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보편적 진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연에 기대다가는 옛적 송나라의 이 농부처럼 세상의 웃음거리가 된다. 어쩌다 한 번 일어난 일로 밭 갈던 쟁기 내팽개치고 나무그루터기 곁에 앉아 토끼 기다리는 농부는 천박하고 비루한 인물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장자보다는 한 세대 뒤, 전국시대 말엽, 칠웅 가운데 하나인 한에서 공자公子, 곧 나라님의 아들로 태어난 한비자韓非子한비자韓非子』「설림상說林上에는 장자가 소요유에 기록으로 남긴, 장보 만드는 데 큰 기술을 가진 이의 이야기와 너무나 닮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디 한번 보도록 하지요.

 

나라에 짚신을 잘 삼는 이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생사로 깁을 짜는 데 능했다. 이들은 월 나라로 이사를 가려고 마음먹었다. 어떤 이가 이 사람에게 이렇게 일렀다.

“그대는 분명 궁색하게 될 것이오.”

이 말을 듣자 이 사람은 이렇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오?”

“짚신은 발에 신는 것이오. 그런데 월나라 사람은 맨발로 길에 다니지요. 또 깁이란 그것으로 머리에 쓸 모자를 만드는 것이오. 그런데 월나라 사람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모자를 쓰지 않지요. 두 분이 멋진 기술을 가지고 월나라에 가면 어찌 궁색하지 않을 수 있겠소?

 

魯人身善織屨妻善織縞而欲徙於越或謂之曰子必窮矣魯人曰何也屨爲履之也而越人跣行縞爲冠之也而越人被髮以子之所長遊於不用之國欲使無窮其可得乎

 

송나라의 어떤 이가 노 나라의 어떤 이로, 머리에 쓰는 모자 장보가 발에 신는 짚신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월나라에 가면 궁색해질 것이다라는 말을 장자는 하지 않았지만 한비자는 덧붙였다는 점이 겉으로 드러난 차이쯤이 될 것입니다.

한비자라면 바로 앞 세대의 위대한 사상가 장자의 글, 그것도 장자가 직접 집필한 작품으로 알려진소요유제물론齊物論은 물론 같은 내편의 나머지 다섯 편도 읽었을 것입니다. 통일 진의 승상 자리에 오른 이사李斯와 함께 순자荀子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한비자는 말을 더듬는 장애는 있었지만 글을 만드는 데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습니다. 이런 이가 비록 법가法家 쪽에 속할지라도 도가道家 쪽의 서적을, 그것도 노자를 포함한 장자의 글을 섭렵하지 않았을 리 없겠지요. 한비자의 좋은 글은 그의 앞 세대 여러 학자의 쟁명爭鳴을 소화한 결과라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문장의 길이로 보아 한비자의 짚신 겯는 이 이야기를 장자의 장보 만드는 이의 발전된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이제 장보 만드는 데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이의 이야기가 가진 몇 가지 우의寓意를 살펴봅니다. 물론 독자들은 한비자의 짚신 겯는 데 특별한 재주를 가진 이의 이야기도 함께 연결하여 살펴도 좋습니다.

먼저 당시의 사정에 맞지 않다는 점입니다. 송나라 사람이 예복을 입을 때 격식에 맞춰 쓰는 모자, 곧 장보는 월나라에서는 아무 데도 쓸모없습니다. 월나라 사람들의 풍속과 습관은 송나라 사람들의 그것과는 아주 동떨어졌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짧게 깎거나 자르는 풍속을 가진 월나라 사람은 모자를 쓸 리 없지요.

다음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물도 자기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이나 공간적 환경이 마련되지 않으면 중시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범속한 사회에서는 재능은 물론 덕망까지 두루 갖춘 인물이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재능을 널리 펼칠 수 있는 기회조차 만나기 힙듭니다.

또 일을 하거나 말을 할 때, 장소나 때에 맞지 않으면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없다는 점입니다. 사리에 어긋나는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하며 참여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 질 낮은 사회에서는 종종 당신의 생각을 바꾸고 내 행동에 따르라고 강요하는 일도 벌어지지만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다.

당송팔대가로 이름을 날린 문장가 한유韓愈증별원십팔贈別元十八에는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누가 장보章甫의 가치를 분별하여 알아낼 수 있는가,

누가 준마駿馬의 가치를 분별하여 알아낼 수 있는가.

 

何人識章甫,/而知駿蹄踠.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장보는 옛적 귀족들이 쓰던 예모입니다. 이와 짝을 이루는 준제원駿蹄踠은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선비를 비유합니다. 장보의 참 가치를 분별하여 알아낼 수 있는 이는 장보가 널리 쓰이는 사회에서나 만날 수 있을 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