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夏-중국 역사상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세습제 왕조(기원전 2070년경~기원전 1600년경)
. 첫 번째 군주 우禹가 아들 계啓에게 군주의 자리를 물려줌으로써 세습제 시작
. 마지막 군주는 걸桀-궁중에 배를 저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주지酒池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미녀 후궁들과 술 마시며 즐겼다고 함.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는 고사를 만들어 냄.
왕후는 말희末嬉
' 역사 기록-사마천의 <사기> '하본기'
. 강역
2. 상商-중국 역사상 두 번째 세습 왕조(기원전 1600년경~기원전 1046년경)
. 상탕商湯이 세운 나라
. 이 나라는 수도를 여러 번 옮겼으나 반경盤庚이 은殷으로 옮기며 중흥을 이루기 시작함.
. 이 때문에 이 나라를 은 또는 은상이라고 이름.
. 마지막 군주는 주紂, 왕비는 달기妲己.
. 달기는 뛰어난 미모로 군주 주의 환심을 사며 함께 환락에 빠짐-결국 주周의 무왕에 의해 무너짐
. 역사 기록-사마천의 <사기> '은본기'
. 전성기 때의 인구는 약 500만 명에서 700만 명까지. 군사는 12만 명에서 15만까지.
. 강역
3. 주周-상을 이은 왕조로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세습 왕조(기원전 1046년경~기원전 256년)
. 무왕武王 희발姬發이 세움.
. 분봉제, 종법제, 정전제로 사회 질서를 유지함.
.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마지막 군주 유왕幽王이 피살되며 서주는 막을 내림(기원전 771년)
. 유왕은 잘 웃지 않는 포사褒姒를 위해 적의 침입이 없는데도 봉화를 올려 달려온 여러 제후들을 희롱함.
‘ 역사 기록-사마천의 <사기> '주본기'
. 강역
3-1. 동주東周-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
가. 춘추시대-중국 역사상 동주의 전반기(기원전 770년~기원전 476년까지, 또는 기원전 403년까지)
. 주요 제후-진목공秦穆公, 진문공晉文公, 제환공齊桓公, 송양공宋襄公, 초장왕楚莊王, 오왕 합려, 월왕 구천 등
. 대표적인 명인-노자, 공자, 손자, 묵자 등
. 강역
나. 전국시대-춘추시대를 이은 대변혁의 시기(기원전 453년~기원전 221년)
. 기원전 453년 주왕조의 제후국 진晉의 큰 세력 한韓, 조趙, 위魏 씨, 이 세 세력이 연합하여 지智 씨를 무너뜨림.
. 이들 세 세력이 진을 나누어 가진 사건을 역사에서는 '삼가분진三家分晉'이라 이름.(전국시대 시작의 표지)
. 이로부터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때, 곧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함.
. 기원전 249년 시 면적-218만 km2, 인구 3천만 명 이상.
. 사상, 학문, 과학 기술, 군사 및 정치 발전의 황금시대.
. 주요 제후국-진, 위, 조, 한, 제, 초, 연, 송, 중산
. 대표적인 명인-맹자, 한비자, 묵자, 상앙, 굴원, 추연, 소진, 장의, 공손연, 손빈, 여불위......>백가쟁명
. 피가 튀고 창이 번득이는 전쟁이 그칠 적 없었음. 가장 잔혹한 전쟁은 조나라와 진나라가 맞붙은 장평대전.
>진나라는 이 전쟁에 이김으로써 전국칠웅 가운데 최후의 일웅이 될 수 있었음.
. 역사 기록-사마천의 <사기> 여러 '세가'와 '열전'
. 추천하는 참고 서적-리산李山의 <전국칠웅>, 도서출판 '인간사랑', 2016년 출판.
. 전국시대 형세
<<< 더 깊이 들여다보는 전국시대 >>>
*먼저 전국시대 바로 앞 시기 춘추시대 말엽의 지도부터 보자.
전국시대
1. 개략
. 동주 시대 여러 제후국이 각각 자기 땅을 더 넓히기 위해, 자기 권력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격렬하게 투쟁을 벌이던 시대.
.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역사상 시간적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기원전 453년을 표지로 삼는다.
. 이 해에 춘추시대 여러 제후국 가운데 큰 나라였던 진晉이 조趙, 위魏, 한韓으로 갈라지는, 이른바 ‘삼가분진三家分晉’이 일어난다. 종주국 주 왕실의 권위가 무너진 것이다.
. 이로부터 서쪽 변방의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이른다.
. 이 시대를 대표하는 특징은 전쟁으로 인한 난리가 2백여 년이나 잇달았다는 점이다.
. 인구는 대략 3천만 명 이상, 기원전 249년 전국칠웅의 면적을 모두 합하면 218만 km2.
2. 변천 과정
가. 잦은 전란
. 춘추 초기(기원전 770년 무렵) 1백 4십여 개에 달하던 제후국이 3백 6십여 년에 걸친 겸병으로 전국 초기(기원전 453년 무렵)에는 겨우 2십여 개 제후국만 남음.
. 그 가운데 서쪽의 진秦, 동쪽의 제齊, 중원의 삼진三晉(조, 위, 한), 남쪽의 초楚, 그리고 북쪽의 연燕, 이 일곱 제후국이 가장 강했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전국칠웅’이라 이른다.
. 잦은 겸병 전쟁으로 제후국은 적어지고, 승리한 자는 강역은 물론 인구까지 넓어지고 많아졌다.
. 부와 자원도 승리한 자가 더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 전쟁의 규모도 더욱 커지고 성격도 훨씬 잔혹해졌다.
. 부국강병을 위한 변법과 개혁도 힘차게 전개되었다.
. 크고 작은 전쟁은 모두 2백 3십여 차례 벌어졌으며 동원된 병사의 숫자도 몇 만에서 몇 십만에 이르렀다.
나. 사회 변혁
. 철기 사용 시작
. 상업의 발달로 화폐 사용 촉진
. 농업의 발전으로 인구 증가-수공업에 의한 야철, 청동기 주도, 칠기, 견직물 생산수준이 높아짐
. 각 제후국 사이의 상업 무역의 큰 발전.
다. 제齊와 진秦의 패권을 둔 다툼
. 위魏와 초楚가 잇달아 쇠락함에 따라 제와 진이 동서로 대치하는 국면의 형성.
. 제와 진은 다른 제후국을 손에 넣기 위하여 상대방을 고립시키려는 투쟁 펼침.
. 한韓, 위魏, 조趙, 초楚, 연燕 등은 진과 연합하여 제에 맞서거나 제와 연합하여 진에 맞서는 현상이 일어남.
>이른바 합종연횡.
>유명한 정치가 장의張儀, 공손연公孫衍, 소진蘇秦 등 책략가의 등장.
. 강대해진 진이 끊임없이 동쪽을 향하여 영토 확장을 꾀함.
. 끊임없이 이어진 합종과 연횡의 결과, 기원전 3백 년 초반에 제와 진은 서로 맞서는 형국이 됨.
라. 초楚의 쇠락
. 진과 제가 패권을 두고 벌인 투쟁은 초를 서로 손에 넣으려는 데 초점을 둠.
. 춘추시대, 초는 남방의 넓은 땅을 바탕으로 진晉과 백여 년에 걸친 패권 다툼을 벌였으나,
>춘추 말엽 동쪽 오吳의 침입으로 나라의 세력이 크게 훼손됨
. 그러나 초소왕楚昭王(재위 기원전 516-기원전 489)과 초혜왕楚惠王(재위 기원전 488-기원전 432)의 노력으로 강역을 점점 넓히며 부흥함.
. 전국시대 초엽, 초회왕楚懷王이 오기吳起를 재상으로 등용.
>변법의 실행으로 서쪽으로는 진을 물리치고, 남쪽으로도 장사長沙, 창오蒼梧까지 강역을 넓힘.
>천하의 여러 제후국이 초의 강성을 두려워함.
. 기원전 381년, 초도왕楚悼王이 세상을 떠나자 오기의 개혁으로 몸을 움추렸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킴.
>오기는 이들이 쏜 화살에 맞으며 초도왕의 시신 곁에서 사망.
. 이어 자리에 오른 초숙왕楚肅王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모두 멸함.(초도왕의 시신에 화살을 쏘았다는 죄명으로)
. 다시 초선왕楚宣王과 초위왕楚威王 때는 성세를 이룸.
. 그러나, 기원전 299년, 초회왕(역사상 초에는 회왕이 둘이다.)은 굴원屈原의 간절한 충언도 물리치고 진으로 감.
>그곳에 억류되었다가 타국에서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남.
. 속도를 붙인 쇠락은 초고열왕楚考烈王(재위 262-기원전 238)이 춘신군春申君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중흥을 이루는 듯했으나
>초회왕과 초경양왕楚頃襄王이 남긴 실정을 극복하기 힘듦.
. 여기에 잇달은 내부의 알력과 갈등으로 쇠락에 속도가 붙음.
마. 진秦과 조趙의 다툼
. 주난왕周赧王 8년(기원전 307), 조의 무령왕이 호복기사胡服騎射로 전통적인 전투의 모습을 기동전의 방식으로 바꿈.
>군사력의 대대적인 증강.
>진으로서는 동쪽으로 향한 영역 확장에 방해가 됨.
. 진소왕秦昭王(진소양왕이라고도 하며, 역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긴 군주 중 하나)은 조를 타격하기 위해
>재상 위염魏冉을 제로 보내 제민왕齊愍王과 진소왕이 동시에 칭제稱帝하기로 협상하고,
>다섯 제후국과 연합하여 조를 공격하기로 함.
. 소진이 진의 속셈을 간파하고 제민왕에게 제왕의 호칭을 버리라고 권고한 뒤,
>연, 한, 위, 조 등 다섯 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진을 공격.(기원전 287년)
. 진은 위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조에게 강화를 요청.
. 조의 장군 조사趙奢, 염파廉頗, 재상 인상여藺相如는 다시 한번 진공한 진의 군대를 분쇄함.
(뒷날 서한西漢 사부의 대가 사마상여는 인상여를 흠모하여 이름을 '상여'로 바꿀 정도였다.)
>조의 존엄과 국토를 수호함.
바. 다섯 제후국이 연합하여 제齊를 공략하다
. 기원전 286년, 제가 자그마한 제후국 송宋을 공략하여 멸하자 다른 제후국은 불안에 떪.
. 제의 북쪽 연이 진, 한, 조, 위 등 다섯 나라와 연합하여 제를 공격.
>기원전 284년 제서濟西(지금의 산둥성 랴오청聊城 남쪽)에서 제를 대파.
. 기원전 284년, 연의 장수 악의樂毅가 조, 진, 위, 초 등 다섯 나라 군대를 연합하여 제를 공격.
>제의 수도 임치臨淄 공파.
. 제의 장수 전단田單이 연의 내부 갈등을 이용하여 연의 군대를 축출>잃었던 국토 회복.
. 그러나 제는 진에 맞설 힘을 이미 상실.
사. 상앙의 변법
. 진효공秦孝公이 위衛 출신 상앙商鞅(기원전 395년-기원전 338년)을 등용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
. 뒤를 이어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소양왕昭襄王에 이르는 1백여 년 동안 상앙이 세운 변법을 따라
>중앙집권 통치를 굳게 지키고, 수리水利와 농업 생산을 중시했으며,
>전쟁터에서 세운 공을 높이 장려함은 물론,
>군대의 장비를 우수한 것으로 대체했고,
>객경客卿을 받아들여 씀으로써 진의 작전에 충분한 도움을 받음으로써
. 제후국 가운데 가장 강대해짐.
. 마침내 동쪽의 강대한 제후국을 무릎 꿇리며 천하 제일의 강국이 됨.
* 변법 시행 과정에서 밀려난 귀족들의 저항으로 상앙은 결국 거열형을 당했지만,
>효공의 뒤를 이은 여러 군주들은 상앙의 개혁 정신을 버리지 않았기에
>진은 칠웅 가운데 일웅이 될 수 있었음.
아. 진秦, 주왕실을 무너뜨리다
. 전국시대에 들어서며 이름뿐인 주왕실>낙양 일대에 간신히 목숨만 부지할 정도.
. 주왕실, 내부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왕성王城의 서주공西周公과 공읍鞏邑(지금의 난꿍현南鞏縣) 동주공東周公으로 분열됨
. 기원전 256년, 진소양왕, 서주 공격>서주공, 36개 읍성을 모두 진에게 바침>서주국 멸망
. 기원전 249년, 진장양왕 원년, 진의 재상 여불위呂不韋, 군대를 이끌고 동주공을 멸함.
자. 장평대전長平大戰(기원전 262년-기원전 260년)
. 진소왕, 범저范雎가 내놓은 계책에 따라, 기원전 265년, 한을 공격.
. 상당군上黨郡(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진중시晉中市 쭤취안현左權縣, 창즈시長治市, 진청시晉城市 일대)과 한의 도성 신정新鄭(지금의 정저우시鄭州市 인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고 시도.
. 상당지구를 진에 바치도록 압박함.
. 상당군은 이 압박에 굴하지 않고 조趙 나라에 종속하기로 결정.
. 기원전 262년, 진과 조, 전쟁 시작
. 조의 노련한 장수 염파, 군사를 이끌고 장평(지금의 산시성 가오핑시高平市 북쪽 10 km 지점 창핑촌長平村)에 주둔.
. 기원전 260년, 진의 장수 왕흘王齕과 조의 장수 염파가 장평에서 교전.>조의 군사 작은 패배 여러 차례
. 이후 견고한 보루를 지키며 지구전에 돌입한 조의 장수 염파에 대한 진의 이간책 주효.
. 조는 염파를 소환하고 젊고 기개 왕성한 조괄趙括로 장수를 대체.
. 진은 비밀리에 왕흘을 소환하고 백전 노장 백기白起로 장수를 대체.
. 진의 장수 백기가 조의 젊은 장수 조괄을 물리치고 대승.
. 조의 군사 4십여 만 명을 생포한 진의 장수 백기는 이들을 모두 생매장함.
. 장평대전은 진이 중원의 마지막 강자 조를 무릎 꿇린 최후의 결전.
>전국시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제 나머지 제후국은 진의 적수가 되지 못함.
차. 진秦, 여섯 제후국을 삼키다.
. 기원전 238년, 진왕 영정嬴政, 노애嫪毐의 난을 평정하고 친정으로 정권 장악.
. 기원전 230년, 한을 멸함.
. 기원전 228년, 조의 도성 한단 공격 점령.
. 기원전 225년, 위를 멸함.
. 기원전 223년, 초를 멸함.
. 기원전 222년, 연과 조를 멸함.
. 기원전 221년 제를 멸하고 진왕 영정은 황제가 됨. 이 곧 시황제始皇帝임.
3. 전국시대 각 제후국의 변법
가. 위문후魏文侯와 이회李悝
. 삼가분진 뒤 전국시대 초기에는 위가 칠웅 가운데 가장 강대했다.
. 위의 첫 번째 군주 위문후(재위 기원전 445년-기원전 396년)는 이회를 등용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
. 또 오기吳起와 서문표西門豹를 중용하여 지방을 관리하며 다스리게 함.
>빠른 경제 발전으로 첫손 꼽히는 강대국으로 우뚝 섬.
. 변법의 내용
>세경세록제世卿世祿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통한 관료 임용.
>애써 공을 세운 이에게 식록食祿을 주는 원칙을 확립.
>귀족의 특권을 이전보다 현저히 약화시킴.
>평적법平糴法(중농억상의 경제 정책) 시행.
>각국의 법률을 모아 <법경法經>을 편찬.
나. 초도왕楚悼王과 오기吳起
. 쇠락을 맞은 초도왕이 오기를 등용하여 그의 변법을 시행.
. 오기는 초에 오기 전에 위에서 이회의 변법 시행에 참여했지만,
>기원전 383년 위무후魏武侯 시 위의 재상 공숙좌公叔痤의 모함과 배척으로 위를 떠나 초로 옴.
. 변법의 내용
>법률 제정으로 백성에게 공포하여 시행하기 전에 관리와 백성이 내용을 자세히 알도록 유도.
>귀족도 3대가 지나면 작록을 취소하고 중앙에서 먼 변방으로 보냄.
>요긴하지 않은 관리를 도태시킴-이 때문에 남은 예산은 강력한 군대 양성에 씀.
>개인적인 청탁을 철저히 금지하고 초의 풍속을 하나로 통일함.
다. 추기鄒忌
. 위의 세 번째 군주 위혜왕魏惠王(양혜왕이라고 이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도성을 대량大梁으로 옮겼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맹자> 첫 장이 '양혜왕편'임을 상기하라.)이 대량으로 도읍을 옮기고 개혁을 진행.
. 여기에 더하여 위衛의 도성 복양濮陽(지금의 허난성 푸양濮陽)을 삼키려고 하자 주변 제후국의 불만을 야기.
. 이때, 제위왕齊威王은 추기를 등용하여 개혁을 진행.
. 개혁의 내용
>큰 힘을 들여 정치를 정돈하고,
>신하들의 간언을 격려함.
>법률을 제정하고 떠도는 이들을 위무하며 자기 나라로 불러들임.
. 주현왕周顯王 16년(기원전 353년), 계릉桂陵(지금의 허난성 창위안현長垣縣)에서 벌어진 전투와
. 위 같은 군주 28년(기원전 341년), 마릉馬陵(지금의 션현莘縣)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 제는 전기田忌를 장군으로 하고 손빈孫臏을 군사軍師로 하여 방연龐涓이 이끄는 위의 군대를 두 번 모두 대파함.
. 이로써 제는 중원의 최강자가 됨.
>인재들의 요구에 따라 도성 임치臨淄에 직하학당稷下學堂을 세우고,
>이곳을 찾아온 학자들에게 사대부에 버금가는 봉록과 쾌적한 생활 환경을 제공하여,
>온힘을 기울여 학문 발전을 이루고 제자들을 양성하도록 함.
라. 상앙
. '2'항 '사' 항목 참조
. 변법의 내용
>정전제井田制 폐지---고정된 새로운 땅의 경계를 만들어 생산 면적을 넓히고 농민에게 경작지를 넓혀 제공함.
>토지 사유제 인정---지방 경제의 빠른 발전에 기여함.
>전쟁에서 세운 공로를 높이고 개인적인 다툼을 엄격히 금지함.
>농업을 부국강병의 기반으로 삼고 상업과 수공업을 농업 뒤에 둠.
>만호 이상되는 곳에 현縣을 둠.
>법률을 제정하여 반포하고 연좌제를 시행함.
>도읍을 역양櫟陽(지금의 샨시성 린통臨潼 부근)에서 함양咸陽(지금의 시안西安)으로 옮김.
>융적戎狄의 풍속을 비판하며 없앰.
>부세賦稅 제도를 개혁.
마. 신불해申不害
. 위혜왕이 제법 힘을 쓰고 있을 때, 한韓의 국력은 칠웅 가운데 가장 약했다.
. 이때, 신불해는 군주 한소후韓昭侯에게 위에 종속하며 그들의 패권을 인정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 동시에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 한 발 한 발 개혁해 나아갈 것을 주장함.
. 기원전 355년, 한소후는 신불해를 재상에 임용하고 그의 변법을 실행함.
. 신불해는 다른 법가들과 마찬가지로 법치를 중시했지만, 특히 군주의 통치'술'을 강조.
. 변법의 주요 내용
>신하를 임용하고 감독을 강화함은 물론 근무 중 공과 과를 엄격히 심사.
>군주의 집권 통치를 강화하여 나라의 실력을 크게 높이기.
>엄혹한 군사 훈련 진행.
>수공업 발전에 힘쓰고 병기 제조에 역점을 둠.
바. 조무령왕의 호복기사
. 전국시대 조나라의 여섯 번째 군주, 조무령왕(재위 기원전 325년-기원전 299년)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용기 넘치는 군주였음.
.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호복기사'라는 군사 개혁을 실행함.
. 개혁의 중심 내용은 오랑캐의 복장을 착용하고 이들이 말 타고 달리며 화살을 쏘는 작전 방법을 익혀서 실전에 응용하기였음.
. 조무령왕은 주변의 반대를 힘껏 물리치고 이를 관철하여
>군사력을 강대하게 만들었으며,
>서쪽으로 오랑캐를 물리치고,
>북쪽으로 중산국中山國을 멸하며,
. 전국칠웅 가운데 하나로서 우뚝 섬.
4. 전국시대의 문화
. 제후들 사이의 잦은 분쟁으로 주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상황이 깨어지고,
. 각 제후국의 문화가 '지역화'하는 추세를 보임.
. 문자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비슷하여 문서가 서로 오가는 데 큰 문제는 없었음.
*학술과 사상
. 역사적인 산문과 여러 학자들의 각기 다른 산문이 매우 흥성했음.
. 풍부한 내용과 드높은 기세를 보인 장자莊子,
. 비유가 아름다운 우언이 넘치는 한비자韓非子,
. 투철한 분석으로 이름난 맹자孟子,
. 그 밖에도 예술적 감화력에 빛나는 굴원屈原과 송옥宋玉 등의 작품이 시대를 대표함.
. 사회적으로 극심한 변혁과 다양한 요구로 수많은 학파가 출현하여 백가쟁명의 상황을 형성.
. 유가와 도가 이외에도,
. 묵적墨翟을 대표로 하는 묵가,
. 한비자와 상앙을 대표로 하는 법가,
. 추연鄒衍을 대표로 하는 음양가,
. 공손용자公孫龍子를 대표로 하는 명가,
. 손빈을 대표로 하는 병가,
. 허행許行을 대표로 하는 농가,
. 장의張儀, 공손연公孫衍, 소진蘇秦을 대표로 하는 종횡가,
. 여불위를 대표로 하는 잡가 등의
. 각파가 글을 쓰고 자기 주장을 세우며, 제자들을 넓게 받아들여 정치에도 참여하고 서로 비판하기도 하여,
. 학술과 사상에서 크게 번영을 이루었다.
4. 최초의 천하통일 진秦 나라-주나라의 한낱 제후국이었던 진이 마지막 일웅이 됨.
. 기원전 221년 진의 군주 영정嬴政이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됨.
역사에서는 '시황제'로 이름.
. 역대 황제-진시황>진2세>진왕 자영子嬰
. 기원전 210년 국토 면적 340만 km2, 인구 약 3천만 명. 수도는 함양咸陽(지금의 시안西安)
. 기원전 207년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촉발된 민중 봉기에 천하가 향응함으로써 결국은 멸망함.
. 특기 사항
-분봉제를 폐지하고 군현제 실시
-도량형과 화폐 통일
-마차의 원활한 통행을 위하여 도로의 폭을 통일
-글자 모양을 진의 소전小篆으로 통일하여 사용
-중앙 정부에 삼공구경을 두어 통치
-중농억상
. 강역
진의 강역
.진의 멸망 원인
..가혹한 형벌과 법률로
..진나라 말엽의 농민 전쟁의 불길을 붙임.
..사회적 모순의 심화로 민심 이반
..통치 계급 내부의 권력을 둘러싼 갈등 심화
--환관 조고趙高와 대신 이사李斯의 반목('지록위마'와 이사의 굴복)
..만리장성, 아방궁, 여산묘의 축성으로 여자들까지 고역을 담당함으로써 원성 가득.
5. 초한전쟁楚漢戰爭(기원전 206년~기원전 202년)-진나라 말엽, 유방과 항우가 봉권통치권을 가지려고 벌인 전쟁.
. 쌍방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전쟁>해하에서 벌어진 마지막 전투>위기에 처한 항우가 오강에서 자결
. 전쟁 중 한때 강자의 위치에 선 항우가 천하를 분봉할 때 유방을 한왕에 봉함>유방 서한을 건국
. 항우의 이러한 점 때문에 사마천은 '항우본기'로 항우를 제왕의 반열에 올림
6. 서한西漢(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초한전쟁에서 항우를 격파한 유방이 건립한 통일 왕조)
. 기원후 1년 인구 6천여 만 명, 국토 면적 609만 Km2
. 도성은 장안(지금의 시안)
. 서한의 최대 강역
. 문제와 경제의 치세(문경지치)
. 무제는 안으로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밖으로는 강역을 넓힘.
. 원제 이후 황제의 권한이 쇠락하기 시작하여 환관과 외척이 득세>몰락의 길로 들어섬.
. 외척 출신 왕망의 득세로 멸망.
. 대표적인 명인-사마천, 사마상여, 동중서, 이광, 한고조 유방, 한무제 유철, 한신, 위청, 곽거병 등.
7. 왕망王莽의 신新 왕조-외척 출신 왕망이 서한의 마지막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됨.
. 역사에서는 신망新莽이라고도 일컬음
. 기원후 9년~기원후 23년
. 수도는 장안, 강역은 서한 말엽과 같음.
.<한서漢書>는 왕망을 역적으로 평가>청나라 말엽에 이르러 평가에 약간의 변화가 있음.
. 인구 약 5천 6백만 명.
8. 동한東漢-서한을 이은 통일 왕조
. 기원후 25년~기원후220년, 수도는 낙양.
. 왕망의 신왕조 말엽 일어난 녹림적미綠林赤眉 봉기를 틈탄 한왕조 종실 유수劉秀가 칭제함.
. 국호를 다시 '한'으로 함>이를 역사에서는 동한이라고 함
' 기원후 140년경 국토 면적 580만 km2, 인구 6천 5백여 만 명.
. 문화
-서한 때 동중서가 체계화한 유학이 도참과 위서가 주도하는 경향이 있었음.
-종이 만드는 기술-채륜이 나무껍질, 아마포, 해진 천 등을 원료로 종이를 만듦.
-혼천의, 지동의 등의 과학 기기 발명-과학자 장형張衡이 선도.
-화타, 장중경 등에 의한 의학 발전.
-문자학의 비조 허신의 <설문해자>.
-역사학..반고의 <한서>.
.강역
9. 삼국시대三國時代
. 기원후 220년~기원후 280년(동한과 서진 사이의 시기)
. 220년, 조비曹丕가 동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국호를 위魏로 고침>역사에서는 조위 曹魏라고 이름.
. 이듬해, 유비劉備가 성도에서 한왕조를 이어 한漢을 세움>역사에서는 촉한蜀漢이라고 이름.
. 222년, 유비가 이릉夷陵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손권孫權에게 패배>229년 손권이 스스로 황제라 칭함>나라 이름은 오吳>역사에서는 동오東吳라 이름
. 삼국이 정립하여 대치하는 국면.
. 국토 면적.. 위 291만 km2, 촉 106만 km2, 오 145만 km2 >260년 기준
. 인구..2361만 명(220년)>3000만 명(280년)
. 280년 위의 사마염司馬炎이 원제元帝를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진晉으로 바꿈.
10. 서진西晉-위로는 삼국시대를 잇고 아래로는 동진으로 이어지는 통일 왕조(265년~316년, 51년 간)
. 사마염이 세운 통일 왕조.
. 265년, 조위曹魏를 무너뜨리고 십여 년 뒤 동오東吳까지 무릎 꿇리고 삼국시대를 끝냄.
, 316년, 팔왕의 난과 농민의 반란, 주변 이민족의 흥기(북방 여러 민족, 이른바 오호五胡의 남하)로 멸망
>1백 몇 십 년의 대혼란의 시대 시작.
. 도성은 낙양, 인구 280년 기준 1천 6백여 만 명, 국토 면적 543만 km2
11. 동진東晉-
. 서진의 황족 사마예司馬睿가 남쪽으로 내려와 건강建康(지금의 난징)을 도읍으로 세운 왕조.
. 317년~420년(103년 간)
. 국토 면적 383년 기준 240만 km2, 멸망 직전의 인구 1천 7백여 만 명.
. 북방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과 병존>중국 역사상 대혼란의 시기.
. 문화 명인-고개지, 사영운, 도연명, 왕희지와 왕헌지 부자.
12. 오호십육국시대(304년~439년)
. 135년 동안의 대혼란과 큰 분열의 시기.
. 중국 북방와 서남방 지역에서 전후 20여 개 왕조가 건립됨.
>주요 민족-흉노匈奴, 선비鮮卑, 갈羯, 강羌, 저氐 등.
>주요 왕조-전조前趙, 후조後趙, 전연前燕, 하夏, 전진前秦 등.
. 강남에서는 동진이 지역을 통제함.
. 통치특색-호족과 한족이 각기 서로 다른 제도와 방식으로 통치.
. 문화 방면 특기 사항-돈황 막고동굴 벽화.
13. 남북조 시대(420년~589년)
. 위로는 동진의 몰락으로부터 아래로는 수隋의 건국에 이르는 대분열의 시기.
. 420년 유유劉裕가 유송劉宋을 세우고부터>
. 589년 수隋가 진陳을 무너뜨리기까지 170년 계속된 이 시대가 끝남
. 남쪽-유송, 소제蕭齊, 소량蕭梁, 남진南陳 등 네 왕조가.
. 북쪽-북위北魏,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 다섯 왕조가>차례대로 바뀜.
. 멸망-581년 북주의 장군 양견楊堅이 '삼총관의 반란'을 누르고 황제의 자리에 오름-국호는 수, 589년 천하 통일.
14. 수隋
. 위로는 남북조시대를 잇고 아래로는 당唐의 건국에 이르는 통일 왕조.
. 581년~618년(37년 간)
. 양견이 대흥성大興城(지금의 시안)에 도읍을 정한 뒤>
남쪽의 진陳을 멸하고 천하 통일>
이태 뒤 낙양으로 천도.
. 300여 년에 걸친 분열의 시기를 끝냄.
. 수양제, 남북 관통의 대운하 건설>국력의 과도한 소모>민중 봉기와 귀족의 반란>
. 수양제의 세 차례에 걸친 고구려 원정 실패>618년 이연李淵에 의해 멸망.
. 국토 면적 467만 km2, 인구 5032만여 명.(612년 기준)
. 특기 사항-과거제도 실시.
15. 당唐(618년~907년, 위로는 수나라를 이어 아래로는 오대십국시대까지 289년간 통치)
. 618년, 수나라 양제가 우문화급의 반란으로 피살되고, 같은 해 이연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당을 건립.
. 당시 천하는 사분오열된 상태-이밀, 두건덕, 왕세충 등 여러 세력이 할거한 데다,
. 토욕혼吐谷渾은 물론 요동도 세력 밖으로 떨어져 나간 상태였음.
. 이연은 건국 뒤, 맏아들 이건성, 둘째아들 이세민 및 여러 대신들의 도움을 받아,
. 왕세충, 두건덕, 유무주 등 할거 세력의 무릎을 꿇림.
. 624년, 옛 한나라 지역을 통일하고,
. 차차 주변으로 영토를 확장함.
. 626년, 고조 이연의 둘째아들이 '현무문의 변란'을 일으키며 당나라 두 번째 황제의 자리에 오름
. 이때부터 강역의 전면 확장 시대가 시작됨.
. 635년, 장군 이정이 토욕혼을 공격하여 멸함>640년, 서주와 안서에 도호부 설치>648년, 엽호가 서돌궐을 벗어나 당에 귀부.>동북쪽 고구려의 세력을 약화시킴.
, 무측천 시기의 강역은 고종 이치李治 때와 비교하면 많이 줄어듦.
. 후돌궐과 거란의 굴기로 요동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됨.
. 현종 시, 이어받은 무측천 시기의 영역을 확대하기 시작함.
. 동북 지역으로 확대> 실위도독부와 흑수도독부 설치(719년~725년)
. 현종이 많은 절도사를 세움으로써 '안사의 난安史之亂'의 빌미가 됨>쇠약의 길로 들어섬.
. 755년, 안사의 난 폭발>쇠락의 길로 들어섬
. 이 난을 평정했지만 변경과 주요 지역의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절도사가 지역을 할거하는 현상이 나타남.
. 764년, 토번吐蕃이 당의 양주凉州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하서 지방의 회랑 지대를 점거함
>이후, 토번은 당의 서쪽 지역을 끊임없이 진공함.
. 790년, 안서도호부 완전 무너짐.
. 동북 지역의 발해의 세력이 커짐>흑수도호부의 상당 부분을 병탄하고 안동도호부도 병탄.
.거란도 점점 강대해지고 남쪽의 남조南詔도 독립.
. 당나라 열세 번째 황제 경종敬宗(재위 824년~826년) 때부터 번진의 세력이 완전히 할거하는 상태로 돌입.
>황제의 정치상의 명령이 먹히지 않음.
. 당나라에 위협적이었던 강적도 붕괴하기 시작>
북방의 회골回鶻 왕국은 샤자쓰黠戞斯로 대체되고,>
서쪽 토번도 분열을 거쳐 끝내 붕괴됨.
. 당나라는 몇몇 작은 땅덩어리를 간신히 회복하여 통치하는 데 그침.
. 878년, '황소黃巢의 난' 폭발.>당나라의 바탕을 흔듦.
>'당唐'이라는 이름만 존재할 뿐 실질적으로는 이미 멸망한 상태가 됨.
>각지의 군웅이 할거한 상태로 빠짐.
* 특기 사항
. 국토 면적 - 1237만 km2(662년경, 고종 시), 인구 - 8050만 명(755년, 현종 시)
. 수도 - 장안長安(지금의 시안西安), 낙양洛陽(지금의 洛陽, 같은 곳임)
. 정치 체제 - 군주제
. 손꼽을 만한 치세 - 정관貞觀 치세, 영휘永徽 치세, 개원開元 성세.
. 당시唐詩의 시대 - 대표적인 시인으로 이백, 두보, 왕유, 한유, 백거이, 유우석, 이상은, 두목 등.
(중국 시사에서 최고봉을 이룸)
. 서예 - 구양순, 우세남, 안진경, 유공권, 장욱, 회소 등의 대가.
16.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오대 907년~960년/십국 891년~979년)
- 당의 멸망에서부터 북송 건립까지의 대분열의 시기.
- 오대...당 멸망에 이어 중원에 나타났다가 아래 순서대로 교체된 다섯 개 왕조.
>후당, 후량, 후진, 후한, 후주.
- 십국...당 말엽부터 북송 초까지 중원 밖에 존재했던 할거 정권.
>남쪽 지역에 남당, 오월, 남초, 전촉, 후촉, 남한, 남평, 민국 등 아홉 개의 비교적 자그마한 왕조와
>북쪽 지역의 북한.
-오대의 마지막 정권인 후주의 군주 자리를 조광윤趙匡胤이 찬탈하며 북송을 건립.(960년)
>오대가 막을 내림.
-북송의 두 번째 군주 조광의趙光義도 계속하여 주변의 자그마한 할거 정권을 무릎 꿇림.
>979년, 북한北漢을 공격하여 멸함으로써 십국은 종말을 고하고, 북송은 기본적으로 전국을 통일함.
. 특기할 사항
-이 시기에 <후당서後唐書> 완성됨.
-조판 인쇄 기술이 널리 퍼져 <시경>, <서경>, <예기> 등 구경이 대규모로 발간됨.
-남당의 군주 이욱李煜으로 대표되는 걸출한 시인의 등장.
17. 북송北宋(960년~1127년)
-오대십국 뒤의 왕조로서 중국 역사상 경제와 문화가 가장 번영했던 시대.
-수도는 개봉開封(지금의 허난성 카이펑開封), 인구는 1억 2천 6백만 명(1124년 기준)
- 진교병변陳橋兵變...960년 2월 3일, 조광윤이 후주의 어린 군주 공제恭帝를 몰아내고
>북송을 세우며 황제의 자리에 오른 군대 내부의 반란 사건.
>조광윤이 적을 무찌른다는 이름으로 대군을 이끌고 성밖으로 나갔다가 진교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키며 개봉으로 회군하여 국호를 '송'으로 바꿈.
- 정강지변靖康之變
. 요遼를 무너뜨린 금金이 승리의 기세를 몰아 북송을 침입.(1126년)
>이듬해 정월, 금군은 북송의 황제 휘종과 다음 황제 흠종을 금군의 군영에 억류함.
>금군은 옛 재상 장창방을 허수아비 황제로 앉히고,
>추위가 풀린 4월, 두 황제와 후비, 종실, 귀척 등 3천여 명을 포로하여 북쪽으로 철수.
>이로써 북송은 멸망함.
-특기할 사항
. 문인 치국...태조는 과거제도로써 인재를 선발 등용>문관의 지위가 무관의 지위보다 높았음.
. 농업 생산 기술의 진보...수리 시설의 확장으로 생산력 제고
. 자기 제작 기술의 제고...경덕진 자기로 유명.
. 상업 발전과 세계 최초의 지폐 사용.
. 문화 예술 방면
>당송팔대가 가운데 여섯 명이 송나라 출신-소순, 소식, 소철, 구양수, 왕안석, 증공 등.
>송사의 대가-범중엄, 유영, 소식, 진관, 황정견, 이청조 등
>서화-소식, 황정견, 미불, 채양 등의 글씨/ 범관, 이공린, 조길(휘종), 미우인 등의 그림.
>역사-사마광의 <자치통감>
>철학-주돈이, 정호, 정이 등.
>화약과 지남침을 전쟁과 항해에 널리 이용하기 시작함.
18. 남송南宋(1127년~1279년)
- 위로는 북송에 이어 아래로는 원나라를 잇는 왕조
- 남송 초엽에는 북쪽의 금나라와 잣은 다툼.
>1141년 소흥화의紹興和議 이후 회화 이북 지역을 포기하고 대치 국면 형성.
>몽고의 굴기에 맞섰으나 결국 멸망당함.
- 남송은 경제와 문화 방면에서 상당히 번영했으며,
>대외적으로도 매우 개방적인 왕조였지만,
- 북방 유목민족의 잇단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멸망.
- 수도...조구가 남쪽으로 밀린 뒤 응천應天(지금의 허난성 상치우商丘)에 도읍을 정한 뒤,
>국호는 그대로 송으로 함.(역사에서는 남송이라고 이름)
>1138년 임안臨安(지금의 저장성 항저우杭州)으로 천도.
- 인구...8060만 명(1223년), 국토 면적..200백만 km2(1141년)
- 남송의 마지막
>몽고가 금나라를 무릎 꿇림.
>남송은 병풍 역할을 하던 금이 사라짐으로써 강대한 몽고의 남침 위협에 시달림.
>1279년, 40여 년에 걸친 항몽 끝에 멸망.
-특기할 사항
. 경제...인도양 북안의 아라비아 제국과 세계 무역의 양대 축을 이룸.
>대도시와 시민 계급의 출현
>상품 경제의 신시대가 열림.
>고려와도 무역 관계가 활발했음.
. 조선업, 제지업, 방직업의 발달.
. 지폐의 대량 유통으로 동전 시대의 퇴색을 앞당김.
. 수학 방면...<양휘산법楊輝算法>을 비롯한 십여 종의 수학 서적이 편찬됨.
. 유학...신유학의 이학사상 탄생>공맹 이래의 걸출한 유학자 주희의 탄생.
. 문학...시가 방면의 양만리, 이청조(북송 말 남송 초에 걸쳐 살았던 여류시인),
>화본소설 출현과
>남송 희문戱文의 출현.
19. 원元(1271년~1368년)-남송 멸망 즈음부터 명나라 건국 전까지.
-중국 역사상 한족이 아닌 소수민족이 처음으로 세운 통일 왕조.
-개국 황제는 몽고족 쿠빌라이 > (원 왕조의 전신은 징기즈칸의 대몽고국大蒙古國)
-도성...대도大都(지금의 베이징北京)
-1294년 쿠빌라이 사망
>원왕조 두 번째 황제로 성종 테무르鐵木兒 등극.
...대외 전쟁 중지+부분적인 세금 감면+새로운 법령 반포>사회적 갈등의 완화.
-인구수...약 9천만 명(1341년)
-면적...1372만 km2(1330년)-최대 판도 시.
-14세기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잦은 민란 발생
>권력과 이익 배분을 둘러싼 내부 상호의 정복 전쟁.
>홍건군紅巾軍의 점진적인 세력 확충
>곽자흥의 사후, 자리를 이어받은 주원장朱元璋의 자기 세력 강화
-1367년, 주원장은 남방의 원왕조 세력을 물리친 뒤, 북벌 개시.
>다음해 7월, 원왕조 혜종 북쪽으로 도주, 도성 대도 함락.
>끝내는 몽고 고원의 고비 사막 이북으로 패퇴(이후의 원왕조를 역사에서는 북원北元이라 이름)
-특기할 사항
. 지방에서의 행성제도行省制度 실시.
. 농업을 위주로 지배했지만 전체 생산력은 앞의 송왕조보다 낮았음.
>개간 면적, 수리 기술, 면화 식재 방법은 약간 발달함.
. 세계 최초로 지폐 유통의 시대를 엶.
. 문화
>다원화 정책...중국 각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대체로 존중.
>유럽 문화까지 수용...상인 마르코폴로를 원왕조의 관리로 등용.
. 문학
>소설과 원곡元曲의 발달...<삼국연의>,<수호전> 등
...관한경, 마치원, 장가구, 교길 등의 산곡 4대 명가 출현.
20. 명明(1368년~1644년, 276년간)
-중국 역사상 한족이 마지막으로 세운 통일 왕조.
-1368년, 주원장이 응천부應天府(지금의 난징南京)를 도읍으로 개국.
>맑고 깨끗한 정치를 펼침으로써 국력은 강력했음.
-1421년, 영락제 때 순천부順天府(지금의 베이징北京)로 천도.
-국토 면적...997만 km2(영락제 때)
-인구...1억 6천 추정(1600년경)
-GDP...960억$(1600년, 만력 28년 때)
=명나라 역사 발전 요약=
1. 개국 초기 태조 주원장 시기
-북쪽 오랑캐를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하자는 기치를 내걸고,
>서달, 상우춘 등의 장수에게 북벌을 명령-대도(지금의 베이징)을 공격하여 손에 넣음
-원나라 순제는 북쪽으로 도망(원의 멸망)
-요역과 부세의 경감으로 생산력 높임
-이갑제里甲制 확립(110호를 1리로 조직-지방 조직의 원활화)
-황권의 강화로 통치 체제의 공고화
2. 영락성세永樂盛世
-세 번째 황제 주체朱棣의 시기(재위 1402년~1424년)
-대도(지금의 베이징)으로 천도.
-북쪽 몽고 지역을 안정시킴.
-항해가이자 외교가인 정화鄭和를 통한 바닷길 확대-방대한 함대 규모로 남양군도와 동아프리카 소말리아에까지 영향력 행사.
-백과 서적 <영락대전> 편찬.
3. 홍치중흥(弘治中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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