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전국시대 바로 앞 시기 춘추시대 말엽의 지도부터 보자.
전국시대
1. 개략
. 동주 시대 여러 제후국이 각각 자기 땅을 더 넓히기 위해, 자기 권력을 더 많이 가지기 위해 격렬하게 투쟁을 벌이던 시대.
.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는 역사상 시간적 경계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기원전 453년을 표지로 삼는다.
. 이 해에 춘추시대 여러 제후국 가운데 큰 나라였던 진晉이 조趙, 위魏, 한韓으로 갈라지는, 이른바 ‘삼가분진三家分晉’이 일어난다. 종주국 주 왕실의 권위가 무너진 것이다.
. 이로부터 서쪽 변방의 진秦이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 이른다.
. 이 시대를 대표하는 특징은 전쟁으로 인한 난리가 2백여 년이나 잇달았다는 점이다.
. 인구는 대략 3천만 명 이상, 기원전 249년 전국칠웅의 면적을 모두 합하면 218만 km2.
2. 변천 과정
가. 잦은 전란
. 춘추 초기(기원전 770년 무렵) 1백 4십여 개에 달하던 제후국이 3백 6십여 년에 걸친 겸병으로 전국 초기(기원전 453년 무렵)에는 겨우 2십여 개 제후국만 남음.
. 그 가운데 서쪽의 진秦, 동쪽의 제齊, 중원의 삼진三晉(조, 위, 한), 남쪽의 초楚, 그리고 북쪽의 연燕, 이 일곱 제후국이 가장 강했다. 역사에서는 이들을 ‘전국칠웅’이라 이른다.
. 잦은 겸병 전쟁으로 제후국은 적어지고, 승리한 자는 강역은 물론 인구까지 넓어지고 많아졌다.
. 부와 자원도 승리한 자가 더 많이 차지하게 되었다.
. 전쟁의 규모도 더욱 커지고 성격도 훨씬 잔혹해졌다.
. 부국강병을 위한 변법과 개혁도 힘차게 전개되었다.
. 크고 작은 전쟁은 모두 2백 3십여 차례 벌어졌으며 동원된 병사의 숫자도 몇 만에서 몇 십만에 이르렀다.
나. 사회 변혁
. 철기 사용 시작
. 상업의 발달로 화폐 사용 촉진
. 농업의 발전으로 인구 증가-수공업에 의한 야철, 청동기 주도, 칠기, 견직물 생산수준이 높아짐
. 각 제후국 사이의 상업 무역의 큰 발전.
다. 제齊와 진秦의 패권을 둔 다툼
. 위魏와 초楚가 잇달아 쇠락함에 따라 제와 진이 동서로 대치하는 국면의 형성.
. 제와 진은 다른 제후국을 손에 넣기 위하여 상대방을 고립시키려는 투쟁 펼침.
. 한韓, 위魏, 조趙, 초楚, 연燕 등은 진과 연합하여 제에 맞서거나 제와 연합하여 진에 맞서는 현상이 일어남.
>이른바 합종연횡.
>유명한 정치가 장의張儀, 공손연公孫衍, 소진蘇秦 등 책략가의 등장.
. 강대해진 진이 끊임없이 동쪽을 향하여 영토 확장을 꾀함.
. 끊임없이 이어진 합종과 연횡의 결과, 기원전 3백 년 초반에 제와 진은 서로 맞서는 형국이 됨.
라. 초楚의 쇠락
. 진과 제가 패권을 두고 벌인 투쟁은 초를 서로 손에 넣으려는 데 초점을 둠.
. 춘추시대, 초는 남방의 넓은 땅을 바탕으로 진晉과 백여 년에 걸친 패권 다툼을 벌였으나,
>춘추 말엽 동쪽 오吳의 침입으로 나라의 세력이 크게 훼손됨
. 그러나 초소왕楚昭王(재위 기원전 516-기원전 489)과 초혜왕楚惠王(재위 기원전 488-기원전 432)의 노력으로 강역을 점점 넓히며 부흥함.
. 전국시대 초엽, 초회왕楚懷王이 오기吳起를 재상으로 등용.
>변법의 실행으로 서쪽으로는 진을 물리치고, 남쪽으로도 장사長沙, 창오蒼梧까지 강역을 넓힘.
>천하의 여러 제후국이 초의 강성을 두려워함.
. 기원전 381년, 초도왕楚悼王이 세상을 떠나자 오기의 개혁으로 몸을 움추렸던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킴.
>오기는 이들이 쏜 화살에 맞으며 초도왕의 시신 곁에서 사망.
. 이어 자리에 오른 초숙왕楚肅王이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모두 멸함.(초도왕의 시신에 화살을 쏘았다는 죄명으로)
. 다시 초선왕楚宣王과 초위왕楚威王 때는 성세를 이룸.
. 그러나, 기원전 299년, 초회왕(역사상 초에는 회왕이 둘이다.)은 굴원屈原의 간절한 충언도 물리치고 진으로 감.
>그곳에 억류되었다가 타국에서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남.
. 속도를 붙인 쇠락은 초고열왕楚考烈王(재위 262-기원전 238)이 춘신군春申君을 재상으로 등용하여
>중흥을 이루는 듯했으나
>초회왕과 초경양왕楚頃襄王이 남긴 실정을 극복하기 힘듦.
. 여기에 잇달은 내부의 알력과 갈등으로 쇠락에 속도가 붙음.
마. 진秦과 조趙의 다툼
. 주난왕周赧王 8년(기원전 307), 조의 무령왕이 호복기사胡服騎射로 전통적인 전투의 모습을 기동전의 방식으로 바꿈.
>군사력의 대대적인 증강.
>진으로서는 동쪽으로 향한 영역 확장에 방해가 됨.
. 진소왕秦昭王(진소양왕이라고도 하며, 역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긴 군주 중 하나)은 조를 타격하기 위해
>재상 위염魏冉을 제로 보내 제민왕齊愍王과 진소왕이 동시에 칭제稱帝하기로 협상하고,
>다섯 제후국과 연합하여 조를 공격하기로 함.
. 소진이 진의 속셈을 간파하고 제민왕에게 제왕의 호칭을 버리라고 권고한 뒤,
>연, 한, 위, 조 등 다섯 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진을 공격.(기원전 287년)
. 진은 위에 일부 영토를 할양하고 조에게 강화를 요청.
. 조의 장군 조사趙奢, 염파廉頗, 재상 인상여藺相如는 다시 한번 진공한 진의 군대를 분쇄함.
(뒷날 서한西漢 사부의 대가 사마상여는 인상여를 흠모하여 이름을 '상여'로 바꿀 정도였다.)
>조의 존엄과 국토를 수호함.
바. 다섯 제후국이 연합하여 제齊를 공략하다
. 기원전 286년, 제가 자그마한 제후국 송宋을 공략하여 멸하자 다른 제후국은 불안에 떪.
. 제의 북쪽 연이 진, 한, 조, 위 등 다섯 나라와 연합하여 제를 공격.
>기원전 284년 제서濟西(지금의 산둥성 랴오청聊城 남쪽)에서 제를 대파.
. 기원전 284년, 연의 장수 악의樂毅가 조, 진, 위, 초 등 다섯 나라 군대를 연합하여 제를 공격.
>제의 수도 임치臨淄 공파.
. 제의 장수 전단田單이 연의 내부 갈등을 이용하여 연의 군대를 축출>잃었던 국토 회복.
. 그러나 제는 진에 맞설 힘을 이미 상실.
사. 상앙의 변법
. 진효공秦孝公이 위衛 출신 상앙商鞅(기원전 395년-기원전 338년)을 등용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시행.
. 뒤를 이어 혜문왕惠文王, 무왕武王, 소양왕昭襄王에 이르는 1백여 년 동안 상앙이 세운 변법을 따라
>중앙집권 통치를 굳게 지키고, 수리水利와 농업 생산을 중시했으며,
>전쟁터에서 세운 공을 높이 장려함은 물론,
>군대의 장비를 우수한 것으로 대체했고,
>객경客卿을 받아들여 씀으로써 진의 작전에 충분한 도움을 받음으로써
. 제후국 가운데 가장 강대해짐.
. 마침내 동쪽의 강대한 제후국을 무릎 꿇리며 천하 제일의 강국이 됨.
* 변법 시행 과정에서 밀려난 귀족들의 저항으로 상앙은 결국 거열형을 당했지만,
>효공의 뒤를 이은 여러 군주들은 상앙의 개혁 정신을 버리지 않았기에
>진은 칠웅 가운데 일웅이 될 수 있었음.
아. 진秦, 주왕실을 무너뜨리다
. 전국시대에 들어서며 이름뿐인 주왕실>낙양 일대에 간신히 목숨만 부지할 정도.
. 주왕실, 내부 갈등과 권력 다툼으로 왕성王城의 서주공西周公과 공읍鞏邑(지금의 난꿍현南鞏縣) 동주공東周公으로 분열됨
. 기원전 256년, 진소양왕, 서주 공격>서주공, 36개 읍성을 모두 진에게 바침>서주국 멸망
. 기원전 249년, 진장양왕 원년, 진의 재상 여불위呂不韋, 군대를 이끌고 동주공을 멸함.
자. 장평대전長平大戰(기원전 262년-기원전 260년)
. 진소왕, 범저范雎가 내놓은 계책에 따라, 기원전 265년, 한을 공격.
. 상당군上黨郡(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진중시晉中市 쭤취안현左權縣, 창즈시長治市, 진청시晉城市 일대)과 한의 도성 신정新鄭(지금의 정저우시鄭州市 인근)의 연결고리를 끊으려고 시도.
. 상당지구를 진에 바치도록 압박함.
. 상당군은 이 압박에 굴하지 않고 조趙 나라에 종속하기로 결정.
. 기원전 262년, 진과 조, 전쟁 시작
. 조의 노련한 장수 염파, 군사를 이끌고 장평(지금의 산시성 가오핑시高平市 북쪽 10 km 지점 창핑촌長平村)에 주둔.
. 기원전 260년, 진의 장수 왕흘王齕과 조의 장수 염파가 장평에서 교전.>조의 군사 작은 패배 여러 차례
. 이후 견고한 보루를 지키며 지구전에 돌입한 조의 장수 염파에 대한 진의 이간책 주효.
. 조는 염파를 소환하고 젊고 기개 왕성한 조괄趙括로 장수를 대체.
. 진은 비밀리에 왕흘을 소환하고 백전 노장 백기白起로 장수를 대체.
. 진의 장수 백기가 조의 젊은 장수 조괄을 물리치고 대승.
. 조의 군사 4십여 만 명을 생포한 진의 장수 백기는 이들을 모두 생매장함.
. 장평대전은 진이 중원의 마지막 강자 조를 무릎 꿇린 최후의 결전.
>전국시대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쟁>이제 나머지 제후국은 진의 적수가 되지 못함.
차. 진秦, 여섯 제후국을 삼키다.
. 기원전 238년, 진왕 영정嬴政, 노애嫪毐의 난을 평정하고 친정으로 정권 장악.
. 기원전 230년, 한을 멸함.
. 기원전 228년, 조의 도성 한단 공격 점령.
. 기원전 225년, 위를 멸함.
. 기원전 223년, 초를 멸함.
. 기원전 222년, 연과 조를 멸함.
. 기원전 221년 제를 멸하고 진왕 영정은 황제가 됨. 이 곧 시황제始皇帝임.
3. 전국시대 각 제후국의 변법
가. 위문후魏文侯와 이회李悝
. 삼가분진 뒤 전국시대 초기에는 위가 칠웅 가운데 가장 강대했다.
. 위의 첫 번째 군주 위문후(재위 기원전 445년-기원전 396년)는 이회를 등용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진행.
. 또 오기吳起와 서문표西門豹를 중용하여 지방을 관리하며 다스리게 함.
>빠른 경제 발전으로 첫손 꼽히는 강대국으로 우뚝 섬.
. 변법의 내용
>세경세록제世卿世祿制를 폐지하고 군현제郡縣制를 통한 관료 임용.
>애써 공을 세운 이에게 식록食祿을 주는 원칙을 확립.
>귀족의 특권을 이전보다 현저히 약화시킴.
>평적법平糴法(중농억상의 경제 정책) 시행.
>각국의 법률을 모아 <법경法經>을 편찬.
나. 초도왕楚悼王과 오기吳起
. 쇠락을 맞은 초도왕이 오기를 등용하여 그의 변법을 시행.
. 오기는 초에 오기 전에 위에서 이회의 변법 시행에 참여했지만,
>기원전 383년 위무후魏武侯 시 위의 재상 공숙좌公叔痤의 모함과 배척으로 위를 떠나 초로 옴.
. 변법의 내용
>법률 제정으로 백성에게 공포하여 시행하기 전에 관리와 백성이 내용을 자세히 알도록 유도.
>귀족도 3대가 지나면 작록을 취소하고 중앙에서 먼 변방으로 보냄.
>요긴하지 않은 관리를 도태시킴-이 때문에 남은 예산은 강력한 군대 양성에 씀.
>개인적인 청탁을 철저히 금지하고 초의 풍속을 하나로 통일함.
다. 추기鄒忌
. 위의 세 번째 군주 위혜왕魏惠王(양혜왕이라고 이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가 도성을 대량大梁으로 옮겼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맹자> 첫 장이 '양혜왕편'임을 상기하라.)이 대량으로 도읍을 옮기고 개혁을 진행.
. 여기에 더하여 위衛의 도성 복양濮陽(지금의 허난성 푸양濮陽)을 삼키려고 하자 주변 제후국의 불만을 야기.
. 이때, 제위왕齊威王은 추기를 등용하여 개혁을 진행.
. 개혁의 내용
>큰 힘을 들여 정치를 정돈하고,
>신하들의 간언을 격려함.
>법률을 제정하고 떠도는 이들을 위무하며 자기 나라로 불러들임.
. 주현왕周顯王 16년(기원전 353년), 계릉桂陵(지금의 허난성 창위안현長垣縣)에서 벌어진 전투와
. 위 같은 군주 28년(기원전 341년), 마릉馬陵(지금의 션현莘縣)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 제는 전기田忌를 장군으로 하고 손빈孫臏을 군사軍師로 하여 방연龐涓이 이끄는 위의 군대를 두 번 모두 대파함.
. 이로써 제는 중원의 최강자가 됨.
>인재들의 요구에 따라 도성 임치臨淄에 직하학당稷下學堂을 세우고,
>이곳을 찾아온 학자들에게 사대부에 버금가는 봉록과 쾌적한 생활 환경을 제공하여,
>온힘을 기울여 학문 발전을 이루고 제자들을 양성하도록 함.
라. 상앙
. '2'항 '사' 항목 참조
. 변법의 내용
>정전제井田制 폐지---고정된 새로운 땅의 경계를 만들어 생산 면적을 넓히고 농민에게 경작지를 넓혀 제공함.
>토지 사유제 인정---지방 경제의 빠른 발전에 기여함.
>전쟁에서 세운 공로를 높이고 개인적인 다툼을 엄격히 금지함.
>농업을 부국강병의 기반으로 삼고 상업과 수공업을 농업 뒤에 둠.
>만호 이상되는 곳에 현縣을 둠.
>법률을 제정하여 반포하고 연좌제를 시행함.
>도읍을 역양櫟陽(지금의 샨시성 린통臨潼 부근)에서 함양咸陽(지금의 시안西安)으로 옮김.
>융적戎狄의 풍속을 비판하며 없앰.
>부세賦稅 제도를 개혁.
마. 신불해申不害
. 위혜왕이 제법 힘을 쓰고 있을 때, 한韓의 국력은 칠웅 가운데 가장 약했다.
. 이때, 신불해는 군주 한소후韓昭侯에게 위에 종속하며 그들의 패권을 인정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 동시에 법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며 한 발 한 발 개혁해 나아갈 것을 주장함.
. 기원전 355년, 한소후는 신불해를 재상에 임용하고 그의 변법을 실행함.
. 신불해는 다른 법가들과 마찬가지로 법치를 중시했지만, 특히 군주의 통치'술'을 강조.
. 변법의 주요 내용
>신하를 임용하고 감독을 강화함은 물론 근무 중 공과 과를 엄격히 심사.
>군주의 집권 통치를 강화하여 나라의 실력을 크게 높이기.
>엄혹한 군사 훈련 진행.
>수공업 발전에 힘쓰고 병기 제조에 역점을 둠.
바. 조무령왕의 호복기사
. 전국시대 조나라의 여섯 번째 군주, 조무령왕(재위 기원전 325년-기원전 299년)은 전국시대 조나라의 용기 넘치는 군주였음.
.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호복기사'라는 군사 개혁을 실행함.
. 개혁의 중심 내용은 오랑캐의 복장을 착용하고 이들이 말 타고 달리며 화살을 쏘는 작전 방법을 익혀서 실전에 응용하기였음.
. 조무령왕은 주변의 반대를 힘껏 물리치고 이를 관철하여
>군사력을 강대하게 만들었으며,
>서쪽으로 오랑캐를 물리치고,
>북쪽으로 중산국中山國을 멸하며,
. 전국칠웅 가운데 하나로서 우뚝 섬.
4. 전국시대의 문화
. 제후들 사이의 잦은 분쟁으로 주를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상황이 깨어지고,
. 각 제후국의 문화가 '지역화'하는 추세를 보임.
. 문자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비슷하여 문서가 서로 오가는 데 큰 문제는 없었음.
*학술과 사상
. 역사적인 산문과 여러 학자들의 각기 다른 산문이 매우 흥성했음.
. 풍부한 내용과 드높은 기세를 보인 장자莊子,
. 비유가 아름다운 우언이 넘치는 한비자韓非子,
. 투철한 분석으로 이름난 맹자孟子,
. 그 밖에도 예술적 감화력에 빛나는 굴원屈原과 송옥宋玉 등의 작품이 시대를 대표함.
. 사회적으로 극심한 변혁과 다양한 요구로 수많은 학파가 출현하여 백가쟁명의 상황을 형성.
. 유가와 도가 이외에도,
. 묵적墨翟을 대표로 하는 묵가,
. 한비자와 상앙을 대표로 하는 법가,
. 추연鄒衍을 대표로 하는 음양가,
. 공손용자公孫龍子를 대표로 하는 명가,
. 손빈을 대표로 하는 병가,
. 허행許行을 대표로 하는 농가,
. 장의張儀, 공손연公孫衍, 소진蘇秦을 대표로 하는 종횡가,
. 여불위를 대표로 하는 잡가 등의
. 각파가 글을 쓰고 자기 주장을 세우며, 제자들을 넓게 받아들여 정치에도 참여하고 서로 비판하기도 하여,
. 학술과 사상에서 크게 번영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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