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먼저 전국시대 진입 직전의 지도를 보인다.
1. 탁택지전濁澤之戰
- 기원전 369년, 탁택濁澤(지금의 산시성山西省 윈청시運城市 부근)에서
- 위魏와 한+조韓.趙 연합군이 벌인 전쟁.
- 위가 한+조 연합군을 물리치고,
> 위의 공자 앵罃이 자력으로 위의 세 번째 군주, 곧 혜왕惠王의 자리에 오름.
> 위의 혜왕은 도읍을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겼기에 역사에서는 양혜왕梁惠王이라 일컬음.
- 위의 내분
> 위의 군주 무후武侯가 세상을 떠나자,
> 무후의 맏아들 공자 앵罃과 둘째아들 공중완公中緩이 군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 세력이 약한 공중완이 조의 도성 한단邯鄲으로 몸을 피하며 도움을 요청하자,
- 송宋에 있던 위의 대부 공손기公孫頎도 조를 거쳐 한의 도성 정鄭(지금의 허난성 신정新鄭)으로 들어가서,
> 군사를 일으켜 위를 깨뜨릴 것을 요청함.
- 이때, 조의 군주 성후成侯와 한의 군주 의후懿侯는, 위의 혼란을 틈타, 위를 약화시키기 위하여,
> 친히 연합군을 만들어 대거 위를 공격함
- 이들 연합군은 황하 이북에 집결한 뒤, 다시 위의 성 읍규邑葵(지금의 허난성 자오쭤시焦作市 서북쪽)를 쳐서 무릎 꿇림.
> 사기 충천한 연합군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위의 도성 안읍(지금의 산시성 샤현夏縣 서북쪽)을 공격했으나,
> 자앵은 도성을 굳게 방어하며, 급히 군사를 내보내 탁택에서 적을 맞아 싸움.
- 연합군은 왕성한 세력으로 위의 군사를 대파,
> 다시 안읍을 포위하고 공격하자,
> 자앵은 성 안에서 속수무책, 조용히 사태의 변화를 살피며, 적을 깨뜨릴 기회를 엿보기 시작함.
- 이때, 연합군 안에서 의견의 불일치로 갈등 격화.
> 조성후의 주장...자앵을 내려앉히고 공중완을 군주에 앉힌 뒤, 위를 분할하여 우리 두 나라가 차지하자.
> 한의후의 주장...위를 양분하면 송宋이나 위衛보다 약하게 될 터이니, 그러면 우리는 마침내 위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된다.
> 조와 한은 서로 고집을 피우며 자기 의견을 굽히지 않음.
> 마침내, 한의 의후가 캄캄한 밤을 틈타서 자기 군대를 이끌고 작전 지역을 떠나자,
- 조의 성후는 자기 군사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하며 군사를 이끌고 물러감.
- 결과
> 위의 도성 안읍의 포위는 저절로 풀리고,
> 자앵은 제 힘으로 위혜왕의 자리에 오름.
> 결국 위는 자기 국토를 온전하게 지킬 수 있었으며, (국토의 분할을 면함)
> 조와 한은 심각한 타격을 입은 꼴이 됨.
2. 계릉지전桂陵之戰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제齊, 조趙, 위魏.
. 병력...제군 8만 명, 위군 8만 명
. 전투가 벌어진 곳...계릉桂陵(지금의 허난성 창위안현長垣縣 서북쪽)
한단(지금의 허베이성 한단)
. 주요 지휘관...전기田忌, 손빈孫臏, 방연龐涓
. 시간...기원전 354년 ~ 기원전 353년
. 결과...제나라 군대의 승리
- 당시 국제 정세
. 전국시대 초기, 위는 군주 문후文侯의 개혁 정책으로 여러 제후국 가운데 두각을 나타내며 강대해지자,
>다른 제후국들이 위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 기원전 356년, 조의 군주 성후成侯가 평륙平陸(지금의 산둥성 원상현汶上顯에서 제의 위왕威王, 송宋의 환후桓侯와 만나 우의를 다지고,
> 연燕의 군주 문공文公과는 아阿(지금의 허베이성 난양南陽 북쪽 50리 지점)에서 회맹함.
. 이로써 위는 다른 여러 제후국의 연합군에게 공격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 위는 이런 위기를 벗어날 기회를 엿보기 시작함.
- 위와 조의 교전
. 기원전 354년, 조가 위衛를 공격하여 칠漆과 부구富丘(이 두 곳 모두 지금의 허난성 창위안현 경내)를 손에 넣자,
. 위魏는 더욱 위기감에 빠짐,,,위衛는 당시 위魏의 위성국이었음)
> 이런 모습을 좌시할 수 없었던 위魏는 송과 연합하여 위성국 위衛를 구하기 위한 작전에 나섬.
. 위魏, 위衛, 송宋의 세 나라 연합군은 조의 도성 한단을 압박하자,
> 조는 성문을 굳게 잠근 채 버티며,
> 한편으로는 제齊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함.
. 세 나라 연합군은 한단을 에워싼 채 일거에 조를 섬멸하려고 했지만,
. 진秦이 위魏의 주력이 빠진 틈을 이용하여 위魏의 소량少梁(지금의 산시성陝西省 한청韓城 남쪽)을 기습 공격하여,
>소량을 손에 넣자,
. 위魏는 이번 전쟁에서 공격당할 위험성이 더욱 커진다.
- 제齊의 출전
. 제의 위왕은 조가 포위되었음을 알고 즉시 출병하려고 했지만,
> 장군 단간붕段干朋의 주장을 받아들여 출병을 늦추고,
> 먼저 적은 병력을 내보내 남쪽 양릉襄陵을 공격하여 조를 구할 뜻이 있음을 드러내며,
> 위魏를 견제하며 지치게 만듦.
. 거의 한 해 뒤, 한단이 곧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 전기田忌를 총사령관으로, 손빈孫臏을 군사軍師로 임명하여,
> 이들이 제의 주력군을 이끌고 조를 구하는 작전에 돌입함.
...이를 역사에서는 '위위구조圍魏求趙'라고 이름.
- 손빈의 모략에 빠진 방연
. 애초에 전기는 한단으로 바로 달려가서 위의 주력 부대와 결전을 벌여 포위된 조의 도성 한단을 구할 작정이었지만,
. 이는 제에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전혀 새로운 방안을 내놓음.
> 많은 군사와 맞닥뜨리기를 피하고 위의 도성 대량으로 짓이기고 들어가 그들이 허점을 노리면 승리할 수 있다고 전기를 설득함.
. 손빈의 계략에 따라 제의 주력부대는 위의 군대를 일거에 격파하자,
> 조는 자동으로 포위 상태에서 벗어남.
. 이렇게 되자, 위의 사령관 방연은 일부의 군대만 남겨둔 채,
. 친히 주력부대를 이끌고 급히 도성 대량을 방어하기 위해 돌아감.
. 같은 시간, 제의 군대는 계릉에 매복하여,
> 회군하는 위의 군사를 가로막고 격파할 준비를 갖춤.
. 위는 오랜 기간 밖에서 벌어진 작전으로 극히 피로한 데다, 먼 거리의 급속 행군으로 잔뜩 지쳐서,
> 사병들은 거의 전의를 상실한 상태에 빠짐.
. 이때 벌어진 쌍방의 교전은 위의 군대를 큰 패배에 빠뜨림.
. 이 전투에서 위의 사령관 방연은 생포되었으나,
> 제의 군사 손빈은 그를 놓아줌. (일찍이 손빈과 방연은 귀곡자鬼谷子를 스승으로 모시고 같이 공부한 동문이었음)
- 끝나지 않은 전쟁
. 기원전 352년, 위魏는 국면을 뒤집기 위하여 한韓과 동맹을 맺어,
> 양릉성을 아직도 포위하고 있던 제의 군대를 함께 공격함.
. 제는 이곳에서 크게 패배하고 철군함은 물론,
> 초楚에 외교적 조정을 요청함.
. 여기에 서쪽의 진秦이 위와 제가 교전하는 틈을 이용하여 위를 기습하자,
> 위는 어쩔 수 없이 제와 강화조약을 맺는다.
. 결국, 기원전 351년, 위는 한단을 조에 돌려주고,
> 제와 위의 전쟁은 끝나지만, 그것도 잠깐 동안,
. 기원전 341년, 마릉馬陵에서 큰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
3. 마릉지전馬陵之戰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제齊, 위魏, 한韓.
. 병력...제군 불명, 위군 약 10만 명.
. 전투가 벌어진 곳...지금의 산둥성 탄청현郯城縣 마링산馬陵山 부근(전투 지점은 이 밖에도 몇 가지 다른 주장이 있음)
. 사상자... 약 15만 명.
. 시간...기원전 341년.
. 주요 장군...위군..방연, 제군..전기, 전영田嬰, 손빈.
. 결과...제의 승리.
- 전쟁의 요약
. 이 전쟁은 중국 고대 전쟁사에서 매복으로써 적을 섬멸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 이 전쟁에서 손빈은 방연의 약점을 이용하여 위장 전술로써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유리하게 이끌었다.
. 이 전쟁은 기원전 341년, 위가 군사를 일으켜 한을 공격하자,
> 한은 제에 구원을 요청했고,
> 제는 이 요청에 응함으로써,
> 한이 온힘을 다해 위에 맞서도록 만들었다.
. 제의 군주 위왕은 전반田盼을 사령관으로 삼고, 전기田忌를 부사령관으로, 그리고 손빈을 군사로 삼아,
> '위위구조'의 전법을 운용하여 군사를 이끌고 위의 도성 대량으로 그대로 내달아,
> 위의 군사를 철수하도록 만들어 한을 구하려고 했다.
. 또 군사들의 취사를 위해 만든 아궁이를 줄여 스스로 약한 모습을 짐짓 보임으로써(이를 '감조시약減竈示弱 전법'이라고 이른다.)
> 위의 군사 10만을 사살하여 궤멸시키고, 위의 태자 신申을 사로잡았다.
. 이 전쟁으로 위는 원기가 크게 상하여 이 시대 패자의 지위를 잃고 말았다.
- 구체적인 경과
. 한은 제가 도와준다는 소식을 접하자, 온힘을 다하여 위의 진공에 맞섰지만,
> 맞붙은 다섯 차례의 전투에서 한 번도 승리하지 못하도 모두 패하자,
> 다시 급히 제에 급히 구원병을 보낼 것을 요청함.
. 제의 군주 위왕은 위와 한이 모두 피로에 지칠 시기를 엿보다가
> 전기를 사령관으로, 전영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제의 군사를 이끌고 그대로 위의 도성 대량으로 달려감.
. 손빈은 몇 해 전 계릉에서 벌어진 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사軍師의 자격으로 군막에서 군사를 배치하고 지시함.
. 위는 승리를 눈앞에 두었다고 생각하며 태자 신을 사령관으로, 방연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뛰어난 병사 10만을 주어
> 기세도 등등하게 제의 군대를 향해 내달아,
> 단칼에 승부를 내려고 기도함.
. 제는 이미 위의 국경 안 깊숙이 진입하여 위의 군사가 제의 군사를 명시하는 상황과 맞닥뜨림.
. 손빈은 이곳 지형을 면밀히 살펴본 뒤,
> 아궁이 숫자를 줄이는 방법으로 적을 마릉 골짜기까지 유인하여, 미리 매복시킨 자신의 군사로 하여금 일시에 적을 섬멸하는 작전을 세움.
. 손빈은 제의 군사를 짐짓 도망하는 모습을 보이며 마릉까지 물러서서 자신의 군사 중에 활 잘 쏘는 병사 1만 명을 도로 양쪽에 매복시킴.
. 그리고 한밤 불빛을 신호로 일시에 화살을 쏘기로 약속함.
. 손빈은 마릉 골짜기 방연이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선 큰 나무의 껍질을 하얗게 벗긴 뒤,
> '방연이 이 나무 아래에서 죽는다'고 큰 글씨로 써 놓음.
. 한밤, 경기병과 함께 이곳에 이른 방연은 이 글자가 잘 보이지 않자,
> 이를 보려고 횃불에 불을 붙이는 순간, 매복했던 제가 군사가 일제히 날린 화살에 혼비백산,
> 분을 못 이긴 방연은 이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 위의 사령관 태자 신은 사로잡혔다.
- <손자병법>의 실전 응용
. 손빈은 이 전쟁에서 <손자병법> '시계편始計篇'에서 이른 '능력이 있어도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싸울 수 있어도 싸울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能而示之不能, 用而示之不用.)는 원칙을 실전에 그대로 응용했다.
4. 의양지전宜陽之戰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진秦, 한韓
- 병력...진군 10만 명, 한군 불상
- 사상자...진군 불상, 한군 사망자 6만 명+투항자 셀 수 없이 많음.
- 전투 지점...의양(지금의 허난성 이양현宜陽縣 서쪽)
- 주요 지휘관
진군...감무甘茂, 오획烏獲, 향수向壽
한군...공숙영公叔嬰
- 시간...기원전 308년 ~ 기원전 307년 (두 해)
- 결과...진이 한을 크게 이김.
.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
- 진秦의 군주 무왕武王은 자리에 오르자 삼천三川(지금의 허난성 뤄양洛陽 지구)으로 군대를 출동시키려고,
> 저리질樗里疾의 건의에 따라 감무를 사령관으로 삼아 군사 5만을 이끌고 나아가 의양을 공격하여 손에 넣음.
- 의양은 한의 서쪽 장벽으로서 이 나라 중반에서 후반까지 상당上黨(지금의 산시성 남부), 남양南陽(지금의 지위안濟源, 자오쭤焦作), 그리고 신정新鄭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 의양은 이 세 곳이 연결되는 요지로서,
- 진의 입장에서는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는 데 장애가 되었다.
- 한은 이곳에 군사를 두텁게 하여 진의 동진을 방해했고, 주왕실은 남몰래 한을 도왔다.
. 전쟁의 흐름
<하나>
- 기원전 308년, 진의 군주 무왕이 자리에 오른 지 세 해째 되는 해 겨울, 감무가 이끄는 병사가 의양성 곁에 이르렀으나,
> 의양성을 지키는 군사들이 완강하게 저항하자,
> 진은 다섯 달 동안 성을 에워쌌으나 공략하는 데 실패함.
- 진의 우승상 저리질은 무왕에게 '진의 군사가 늙었는가 봅니다. 지금 철수하지 않으면 큰 변을 당할지도 모릅니다.'라고 건의하자,
> 무왕은 감무에게 군사를 이끌고 퇴각하라고 명령함.
- 감무는 무왕의 명을 받고, 한 통의 글을 써서 무왕에게 올렸다.
> 무왕에게 올린 글엔 '식양息壤', 단지 두 글자뿐이었다.
> 무왕은 크게 깨닫고, 대장 오획에게 병사 5만을 이끌고 나아가 감무를 돕도록 명령했다.
- 이에, 한의 군주는 대장 공숙영에게 군사를 주어 의양을 구하도록 명령했다.
<둘>
- 감무는 오획의 군사와 힘을 합하여 의양성 아래에서 공숙영을 군사를 크게 깨뜨리고,
> 승리의 기세를 몰아 의양성까지 손에 넣고 한군 6만의 목을 내렸다.
> 진군은 다시 황하를 건너 무수武遂(지금의 산시성 위안취현垣曲縣 동남)까지 손에 넣고,
> 성을 쌓고 군대를 주둔시킴.
<셋>
- 겁에 질린 한의 군주는 상국 공중치公仲侈에게 금은보화를 딸려 진의 군주에게 보내 강화를 구걸하자,
> 진의 군주 무왕은 크게 기뻐하며 한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이고,
> 감무에게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라는 조서를 내리는 한편,
> 향수를 의양에 남겨 백성들을 위무하도록 함.
. 전쟁의 결과
- 진은 강대한 군사의 힘으로 잇단 작전을 벌여 중원의 요지 의양을 점령하며 승리함으로써
- 한에게는 비참한 패배를 안김은 물론,
- 자신의 강역을 중원까지 넓히며 효산崤山과 함곡관의 주요 지점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5. 조趙가 중산中山을 멸한 전쟁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조趙, 연燕, 중산국中山國
- 병력...조군 한 차례 동원에 최대 20만 명, 중산국 10만 명 추정.
- 주요 지휘관...조무령왕趙武靈王
- 전투 지점...허베이성 바오딩시保定市와 스자좡石家莊 일대
- 시간...기원전 307년 ~ 기원전 296년
- 전쟁의 결과...중산국 멸망.
. 전쟁의 배경
<하나>... 조의 입장에서
- 당시 조는 진의 위협 말고도 중산국도 치명적인 화근이었음.
- 중산국은 위문후 시기에 나라를 다시 세우다시피한 뒤에 허베이 중부 일대에 웅거하며 조를 두 도막으로 갈라놓는 형세를 만듦.
- 조무령왕이 자리에 오르기 전에 중산국은 제에 기대며 위의 도움까지 받아,
> 조를 수시로 침공하며 안전을 위협함.
- 조무령왕은 '내 가슴에 중산국이 있고, 북에는 연이 있고, 동에는 호胡가 있고, 서에는 임호林胡, 누번樓煩, 진秦, 그리고 한韓이 있으니, 강한 군대가 없다면 어찌 살 수 있겠는가'라며
> 호복기사胡服騎射로 군대를 훈련하는 한편,
> 중산국을 멸할 계획을 세움.
<둘>...중산국의 입장에서
- 애초에 중산국은 중립 외교를 표방했지만, 마릉지전 뒤에는 제와 위와 결맹하여 조에 맞서는 쪽으로 정책을 바꿈.
- 위의 공손연公孫衍이 '오국상왕五國相王'을 처음으로 제안하자,
> 중산국도 천승의 나라라며 칭왕하겠다고 나섬.
> 제는 노골적으로 중산국의 이런 행동에 불쾌감을 표시.
- 마침 연의 자지子之가 내란을 일으킨 틈을 타서, 제가 군사를 이끌고 연으로 침입하자,
> 중산국은 동맹 관계를 팽개치고 군사를 이끌고 북으로 연을 침공함.
- 제의 연 공격은 중원 여러 제후국의 강렬한 반대를 야기함.
- 중산국은 연을 침공함으로써 연과 나쁜 관계를 맺게 됨은 물론,
> 중원의 다른 제후국에게 따돌림을 받으며 고립됨---중산국 외교는 날로 곤경에 처함.
-전쟁의 흐름
<첫 번째 전쟁>
. 기원전 306년, 조무령왕 20년, 중산국 땅 일부를 공취함.
> 선봉은 영가寧葭(지금의 허베성 스자좡 서북)까지 이름.
. 같은 해, 서쪽으로 임호 땅까지 공격하여 손에 넣음.
> 선봉이 유중楡中(지금의 네이멍구 둥셩東勝 일대)까지 이르자,
> 임호왕은 말을 바치며 강화를 요청.
. 조무령왕은 여러 제후국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하여,
> 누완樓緩을 진에, 수액仇液을 한에, 왕분王賁을 초에, 부정富丁을 위에, 조작趙爵을 제에 사신으로 보내 외교 활동을 진행했다.
<두 번째 전쟁>
. 기원전 305년, 조무령왕 21년, 20만의 군사로 대거 중산국을 공격.
. 중산국은 네 개의 읍성을 할거하여 조에게 바치며 강화를 요청.
. 강화를 받아들였으나, 평화는 오래가지 아니함.
<세 번째 전쟁>
. 기원전 303년, 조무령왕 23년, 조는 다시 중산국을 공격함.
<네 번째 전쟁>
. 기원전 301년, 조무령왕 25년, 조는 또다시 중산국으로 진공하여,
> 중산국의 도성 영수靈壽(지금의 허베성 링수현靈壽縣)을 공격하여 손에 넣음.
> 중산왕은 제로 도망감.
<다섯 번째 전쟁>
. 기원전 300년, 조무령왕 26년, 조는 부류扶柳(지금의 허베이성 지현冀縣)을 손에 넣음.
> 중산국 동부는 모두 조가 차지하고,
> 조의 경계선은 북쪽으로 연의 변경까지 미침.
. 도망간 중산왕은 제에서 생을 마침.
-전쟁의 결과
. 조는 여러 해에 걸친 전쟁으로 국력을 크게 소모했지만,
> 조무령왕은 나라의 힘과 백성의 힘을 회복하기 위하여 끝까지 노력함.
.기원전 296년, 조혜문왕 3년, 조는 중산국의 군주 자리를 없앰-이른바 천승의 나라라던 중산국은 마침내 멸망함.
6. 수사지전垂沙之戰
-전쟁의 개요
. 참전국...제齊+위魏+한韓 : 초楚
. 전투 지점...수사垂沙(지금의 허난성 탕허현唐河縣 서남)
. 사상자...초군 사상자 불상, 역사 자료에 따르면 초군 약 2만 명이라 하나 명확하지 않음.
초군 사령관 당매唐昧 피살.
. 결과...초의 대패로 끝남.
. 주요 지휘관...제-광장匡章, 위-공손희公孫喜, 한-폭연暴鳶/초-당매
. 시간...기원전 301년
- 역사적 배경
. 전국시대 중엽, 제와 초는 '합종'을 견지하며 함께 진秦에 맞섰지만, 초의 군주 회왕懷王은 이 합종의 원칙을 깨고 진의 군주 소왕昭王과 연합한다.
. 제는 이제 초에 보복하려고 기회를 엿보기 시작한다.
. 이때, 제의 재상 맹상군孟嘗君은 계속 '합종'과 '원교근공'의 책략을 쓰며,
> 위, 한韓과 연합하며 동맹 관계를 맺는다.
. 그런데 한과 위, 이 두 나라는 진의 윽박지름을 견디지 못하고 제에 지원을 요청하며 빌붙기 시작한다.
> 따라서, 위, 제, 이 세 나라가 이제 굳은 연합관계를 갖게 된다.
. 칠웅은 제와 진, 이 두 강자가 대치하는 형국이 되고,
. 진은 동쪽 중원을 향해 확장 정책을 쓰며 한과 위의 땅덩어리 일부를 점거한다.
. 한과 위는 진의 잇단 진공에 제로 기울며,
> 제의 강력한 힘에 의지하며 진에 항거하기 시작한다.
. 제는 또 자기 영토의 확장을 위하여 초와 맹약을 맺는 한편,
> 한+위와 연합하여 진에 맞섰다.
. 진은 이들 네 나라의 연합을 깨뜨리기 위하여 이간책을 쓴다.
. 진은 이어 기원전 305년 초의 군주 회왕과 혼인으로 인척 관계를 맺으며,
> 값나가는 예물을 회왕에게 보낸다.
. 이듬해, 상용上庸(지금의 후베이성 주산현竹山縣 서남)을 초에 돌려주는 조건으로,
> 초와 황극黃棘(지금의 허난성 난양시南陽市 남)에서 동맹을 맺음.
. 이리하여 제는 초가 약속을 등졌다는 구실을 내세워,
> 기원전 303년, 한+위와 연합하여 세 나라가 함께 초를 공격한다.
. 그러자, 초는 태자 횡橫을 진에 인질로 보내고,
> 진은 객경 통通에게 군대를 주어 초를 구하도록 한다.
. 이 소식에 세 나라 연합군은 곧장 군대를 철수한다.
. 이듬해, 태자 횡이 사적인 자리에서 다투다가 진의 대부를 죽이고 초로 내빼는 상황이 발생하여,
> 진과 초의 연맹을 그만 깨지고 만다.
- 전쟁의 흐름
. 기원전 302년, 제의 장군 광장+위의 장군 공손희+한의 장군 폭연이 세 나라 연합군을 함께 이끌고 초의 방성方城으로 진공하자,
. 초의 군주 회왕은 당매에게 군사를 주어 세 나라 연합군을 맞아 싸우도록 명령한다.
. 쌍방은 추사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친 뒤 여섯 달 동안 서로 맞선다.
. 제의 장군 광장은 앞쪽의 강의 깊이를 측정한 뒤, 물을 건저 진격하려고 했으나,
> 초의 군사가 쏘아대는 화살 때문에 물을 건널 수 없었다.
. 얼마 뒤, 한 나무꾼이 건널 수 있는 얕은 물을 알려주자,
> 한밤을 틈타 정예병사를 보내 물을 건너게 하여 초군을 급습한다.
. 당매는 연합군이 여섯 달 동안 별다른 움직임이 없자 경계를 늦추다가,
> 연합군이 물을 건너 자기 진영 가까이 왔을 때에야 황급히 응전했지만,
> 초군은 대패하고 병사 2만여 명이 섬멸되고, 당매는 피살됐으며, 남은 병사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 연합군은 승리를 기세를 타고 수구垂丘(지금의 허난성 삐양현泌陽縣 북), 원宛(지금의 허난성 난양시), 엽葉(지금의 허난성 예현葉縣) 이북의 큰 땅덩이를 공격하여 점령한다.
. 이제 초는 어쩔 수 없이 제에 무릎을 꿇고, 태자 회을 인질로 보내 제에 강화를 요청함.
- 전쟁 뒤의 영향
. 초의 군주 회왕 재위 30년 동안은 칠웅이 각기 다른 측을 겸병하기 위하 전쟁이 한층 격렬해지던 때였다. 진은 이런 여러 전쟁을 치르며 더욱 강대해졌다. 이에 따라서 진의 웅심은 더욱 세차지면 온 제후국을 겸병하여 천하를 하나로 만들려는 뜻을 더욱 굳게 가지게 되었다.
. 그러나 초의 회왕은 큰 판을 읽을 수 있는 눈이 부족하여,
> 안으로는 부인 정수鄭袖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밖으로는 장의張儀의 꾐에 속으며,
> 마침내 자기 군대는 잇달아 패배하고, 땅덩어리는 점점 작아지는 상황에서,
> 회왕 자신은 진의 도성에서 객사한다.
> 초는 이로부터 쇠망으로 향하다가 끝내 멸망에 이른다.
7. 이궐지전伊闕之戰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진, 한, 위
. 병력...진군 10만 명, 위+한+동주東周 연합군 24만 명
. 사상자...한+위 24만 명
. 전투 지점...이궐伊闕(지금의 허난성 뤄양시洛陽市 롱먼진龍門鎭)
. 주요 지휘관...백기白起, 공손희, 폭연.
. 시간...기원전 293년
. 결과...진군 승리, 한군+위군 병력 24만 명 손실.
- 전쟁의 원인
. 기원전 296년, 위의 군주 양왕襄王과 한의 군주 양왕襄王이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자,
> 두 나라의 정국은 어수선해지며 요동치기 시작한다.
. 기원전 294년, 이런 틈을 타서 진의 군주 소왕昭王은 병사를 보내 한을 공격하게 함.
> 진의 장수 향수向壽가 무시武始(지금의 허베이성 우안시武安市 남)을 손에 넣고,
> 좌서장左庶長 백기白起는 신성新城(지금의 허난성 이촨현伊川縣 서남)을 손에 넣음.
. 이렇게 되자 한의 군주는 사신을 위로 보내 도움을 요청,
> 한과 위는 동맹 관계로서 진을 공통의 적으로 삼았기에,
> 위의 군주는 수수방관하지 않고 즉시 대장 공손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한을 도울 것을 명한다.
> 한+위가 온 힘을 다하여 진의 진공에 맞서며 싸우자,
> 동주東周도 파병하여 연합군 측에 선다.
-전쟁의 과정
. 기원전 293년, 진의 군주 소왕은 승상 위염魏冉의 천거를 받아들여 백기를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 같은 해, 하는 폭연에게 군사 8만을 주어 전장으로 내보내고,
. 위는 명장 공손희에게 군사 16만을 앞에서 이끌도록 한다.
. 폭연과 공손희, 이 두 장군은 일찍이 '추사지전'에서 초의 군사를 크게 물리친 명장이다.
. 한+위 연합군은 기세를 드날렸지만 진의 국경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한과 위는 진과 서로 경계로 만나는 곳 '이궐'에서 버티며 진이 다가오기만 기다렸다.
. 진의 병력은 한+위+동주 연합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태였다.
. 이궐은 낙양 남쪽에 위치하며 지세가 험요하지만 진이 동진하여 중원을 차지하는 데 반드시 지나야 할 곳이었다.
. 이곳을 흐르는 이수伊水 양쪽으로는 산이 서로 마주하여 먼 데서 보면 마치 천연으로 된 대궐문 같다.
. 한+위 연합군 가운데,
> 한의 군대는 세력이 미미하여, 장군 폭연은 위의 군대가 선봉에 서기를 바랐고,
> 위의 장군 공손희는 한군이 선봉에 나서서 적의 선봉을 깨주기를 바랐다.
. 진의 장군 백기가 이궐의 자기 진영 산기슭에 올라 한+위 연합군을 살피니, 약간 뒤쳐졌는데,
> 마침 정찰병이 한과 위의 두 장군이 겉으로는 친해 보이지만 서로 어려운 일을 맡지 않으려 하는 데다,
> 각자 자기 병력을 보존하려고 힘쓰며 진의 군사와 교전을 피한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 백기는 이런 정보를 접하자, 우수한 병력을 뽑아 상대방을 각개 격파하는 전술을 쓰기로 결정했다.
. 한과 위의 두 군대가 머뭇머뭇하며 결정을 미루는 때를 놓치지 않고,
> 백기는 상대적으로 실력이 우세한 한의 군대를 치는 체, 적을 속이는 전술을 쓰며, 오히려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비교적 약한 위의 군사를 향해 갑자기 공격을 퍼부었다.
-진의 승리
. 백기의 전술은 승리를 가져왔다.
. 백기는 자신의 정예 중 정예를 골라서, 멀리 위의 군사가 포진한 뒤쪽으로 가서 공격을 퍼부었다.
. 위는 아무런 방비도 못한 채, 이리저리 흩어지면 방어했지만, 지리멸렬, 참패했다.
. 한의 군사는 자신의 곁날개 위의 군사가 순식간에 궤멸했다는 소식에 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이렇게 흔들리는 군심을 사령관조차 안정시키지 못했다.
. 전투 한 번 못해 보고 도망병이 속출하기 시작하자, 장군 폭연도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 백기는 승세를 몰아 추격전을 펼쳐 한의 군사를 전멸시키고 다섯 개의 성읍을 손에 넣었다.
8. 제齊가 송宋을 멸한 전쟁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제齊, 송宋
. 전투 지점...송宋
. 지휘관...제군-한섭韓聶, 송군-송강왕宋康王
. 시간...기원전 286년
. 전쟁의 결과...송의 멸망
- 전쟁의 배경
. 기원전 329년, 대언戴偃이 무력으로 송의 군주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자,(이 곧 송의 서른다섯 번째 군주 송강왕宋康王이다)
> 그의 형 척성군剔成君은 제로 도망한다.
. 기원전 318년, 대언은 스스로 군주의 자리에 오른 뒤,
> 동쪽으로 제를 쳐서 다섯 개의 성을 차지하고,
> 남쪽으로 초의 군대를 격파하고 3백여 리의 땅을 차지한다.
> 게다가 서쪽으로는 위의 군대와 맞붙어 두 개의 성을 손에 넣자,
. 송은 이때부터 제, 위, 초와 원한을 맺는다.
. 대언, 곧 송의 강왕은 자그마한 제후국 등滕을 멸망시키고 설薛을 공격하여 무릎 꿇림으로써, 국력이 최고점에 이르며,
> '5천승의 강한 나라 송'이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 그러나 대언은 사람됨이 포악하고 교만하여,
> 자루에 피를 가득 담아 다니며 하늘 향해 뿌려 하늘까지 복종시키려고 위세를 떨쳤으며,
> 술을 좋아하고 색을 밝히는 데다, 직간하는 대신들은 화살로 쏘아죽이는 데까지 이르렀다.
. 이런 그를 다른 제후국에서는 '걸송桀宋'(하夏 왕조의 마지막 군주 걸과 같이 폭군이라는 의미)으로 일컬음.
. 제의 군주 민왕愍王은 이런 송을 멸망시키고 중원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심을 품었으나,
. 야심만만한 진의 간섭에 부딪친다.
- 전쟁의 과정
. 기원전 286년, 송에 내란이 일어나자,
. 제의 군주 민왕은 장군 한섭에게 군사를 주어 송을 공격하여 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 송의 백성들은 오랫동안 '걸송'의 학정에 고통당하던 터라,
> 제의 군대가 성에 이르러도 지킬 생각을 하지 않았다.
. 제의 군대는 신속하게 송의 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리자,
> 송의 군주 대언은 몸을 피했지만, 결국은 위의 온읍溫邑(지금의 허난성 원현溫縣)에서 사망함.>>송의 멸망.
- 이 전쟁이 끼친 영향
. 이 전쟁으로 제는 번창의 정점에 선다.
. 그러나 제가 송을 멸망시킴으로써, 제는 진이나 조와의 갈등은 물론,
> 한, 위, 초 등의 제후국에게도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 이는 결국 제가 다른 제후국들에게 눈엣가시가 되었다는 뜻이다.
. 북쪽의 연燕이 이런 형세를 이용하여 마침내 제를 제외한 다른 제후국과 어깨를 겯고,
> 기원전 284년, 연의 상장군 악의樂毅에게 군사를 주어 진을 치게 된다.
. 악의가 앞선 여섯 제후국의 연합군은 '제서지전濟西之戰'에서 제의 주력부대를 대파하고,
> 거莒와 즉묵即墨을 제외한 제의 성읍 일흔 개 남짓을 공격하여 손에 넣었다.
. 제는 거의 멸망 직전에 이르게 되는데...... .
9. 악의파제지전樂毅破齊之戰(악의 장군이 제를 깨뜨린 전쟁)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연+진+한+조+위 연합군 : 제
. 일어난 때...기원전 284년
. 일어난 곳...제 나라 경내
. 주요 지휘관...악의樂毅, 기겁騎劫, 전단田單
. 전쟁의 결과...연의 장군 악의가 먼저 제의 성읍 일흔두 개를 함락시키고, 뒤이어 제의 장군 전단이 잃었던 땅을 모두 되찾음.
- 전국칠웅 가운데 연+진+한+조+위, 이 여섯 제후국이 합종하여 제를 공격하다
. 당시, 제의 군주 민왕愍王은 참으로 강대하여,
> 남쪽으로는 중구重丘(지금의 산둥성 랴오청시聊城市)에서 초의 재상 당매唐昧가 이끄는 군대를 물리쳤으며,
> 서쪽으로는 관진觀津(지금의 허베이성 우이현武邑縣 동남)에서 위와 조를 깨고,
> 한, 조, 위, 이 셋과 연합하여 진을 쳤으며,
> 조가 중산국을 멸하는 데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
> 송까지 무너뜨리며 천 리 남짓한 영토를 더 넓혔다.
. 이어서 진의 소왕과 더불어 제왕의 칭호를 함께 쓰는 데 합의했으나,
> 동제東帝라는 칭호를 스스로 취소하고 왕으로 칭하는 데로 돌아갔다.
. 이 정도가 되자 여러 제후국들은 진을 등지고 제에 스스로 복종하는 데 이르렀다.
. 그러나 제의 백성들은 교만이 극에 이른 자기 군주 민왕의 폭정을 더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
. 연의 군주 소왕昭王은 드디어 제를 공략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며,
> 악의에게 제를 공략할 방안을 의논했다.
> 악의는 '제는 땅덩어리가 크고 인구도 많아서 패자의 위치에 설 만한 바탕이 넉넉합니다. 그러니 연 단독으로는 제를 공략하기가 쉽지 않으니, 다른 제후국, 일테면 조, 초, 위와 연합한다면 공격해볼 만합니다', 라고 의견을 내놓았다.
. 이리하여 연의 군주 소왕은 악의를 사자로 보내 조의 혜문왕과 맹약을 체결하게 하고,
> 또 다른 사자를 초와 위로 보내 연합을 모색하도록 했다.
. 게다가 진까지 이 연합에 참여하도록 꾀어냈다.
. 이때, 여러 제후국들은 제의 군주 민왕의 오만과 포악함을 두루 미워하고 있던 터라,
> 앞다투어 연의 편에 서서 공동으로 제를 토벌하는 데 뜻을 같이했다.
.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악의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연의 군주 소왕은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 악의를 상장군에 임명했다.
> 또 조의 군주 혜문왕은 상국의 인수를 악의에게 내렸다.
. 이리하여 악의는 조+진+한+위+연, 이 다섯 나라의 군대를 지위하며 제를 공격했다.
. 제의 군주 민왕은 이 소식을 접하자 주력 부대를 이끌고 직접 제수濟水(지금의 산둥성 지난시濟南市 서북)의서쪽으로 나아갔다.
. 악의는 다섯 제후국의 연합군을 앞서 이끌며 제의 군대를 향해 맹공을 퍼부었다.
. 이 전투에서 크게 패한 제의 민왕은 패잔병을 이끌고 도성 임치臨淄(지금의 산둥성 린보시臨博市)로 내뺐다.
. 악의는 먼 길을 달려온 여러 제후국의 군대를 돌려보내고,
> 연의 군대만을 이끌고 그대로 임치로 내달아 일거에 제를 멸했다.
. 연은 약하고 제는 강한 형세는 일거에 역전되자,
>악의는 승리의 여세를 몰아 제의 나머지 성읍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연전연승
. 악의는 연의 군대를 지휘하며 패주하는 적을 계속 추격하여,
> 제의 도성 임치까지 이르렀다.
. 제의 군주 민왕은 임치를 지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거읍莒邑(지금의 산둥성 쥐현莒縣 일대)으로 도망하여 성문을 굳게 잠그고 움직이지 않았다.
. 악의는 홀로 남은 병력을 데리고 점령한 지방을 순행했지만,
> 제의 여러 읍성은 성을 지키며 항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 그러자 악의는 온 힘을 다하여 집중적으로 임치를 공격하여 함락한 뒤,
> 제의 보물과 종묘 제사에 쓰는 기물을 몽땅 탈취하여 연으로 옮겼다.
. 연의 군주 소왕은 크게 기뻐하며 제수 언덕에까지 직접 찾아와서 군사를 위로하고, 술과 고기를 푸짐하게 내렸다.
> 게다가 악의를 창국군昌國君에 봉하며 그의 공로를 높여 기리고,
> 계속하여 제의 남은 성읍을 손에 넣으라고 명령했다.
. 악의는 제에 남아 순행하며 작전을 펼친 지 다섯 해, 제의 성읍 7십여 개를 손에 넣고 이들을 연의 군현으로 귀속시켰다
. 하지만 단 두 개의 성읍, 거莒와 즉묵即墨은 복속시키지 못했다.
. 악의는 성읍을 깨뜨려도 민심이 불복하는 한, 제를 몽땅 손에 넣어도 굳게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 거와 즉묵을 포위는 하되 공격은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우고,
> 이미 공격하여 점령한 지역에 대해서는 세금을 감면하고 그곳의 풍속과 관습을 존중하며,
> 제의 고유 문화를 보호하고 지방의 명사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펼치며,
> 제를 근본적으로 와해하려고 했다.
- 나라를 되찾은 전단田單
. 전단은 임치 사람으로 전국시대 전제田齊의 종족 중 아주 먼 친척으로, 제의 도성 임치의 시장 관리인이라는 아주 낮은 벼슬아치였다.
. 이 사람이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때조차 알 수 없다.
. 기원전 284년, 연의 장군 악의가 군사를 이끌고 임치를 점령하고, 뒤이어 제의 7십여 개 성을 손에 넣고,
> 마지막으로 거와 즉묵만 남았을 때,
> 전단은 가족을 이끌고 즉묵으로 도망했다.
. 전단은 비록 낮은 벼슬아치를 지낸 경력뿐이지만 생각이 조밀하고 다재다능하여,
> 즉묵을 지키던 대부가 전사한 뒤, 이곳 백성들이 천거로 장군의 자리에 올라,
> 그곳 백성들을 지휘하며 성을 지킨다.
. 민심을 한데 모은 전단은 독특한 전술과 전략으로 연의 군대를 물리치고 잃었던 땅덩어리를 모두 되찾는다.
> 그가 쓴 작전 가운데 '화우진火牛陣'은 세계 전쟁사에 특별히 기록해도 좋을 만한 독특한 전법이다.
...소를 전쟁에 대량으로 끌어들여 소의 꼬리에 불을 붙여 적을 공격했으니, 이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로 진군한 한니발 장군이 쓴 코끼리 전법보다 규모에서도 앞서는 데다 시기적으로도 몇 십 년 앞서는 이야기이다.
10. 연여지전閼與之戰
-전쟁의 개요
. 참전국...조趙, 진秦
. 참전 병력...조군 10만, 진군 10만.
. 사상자...진의 장군 호양胡陽 전사, 진군 손실 수만.
. 시간...기원전 269년
. 주요 지휘관...조사趙奢, 호양
. 전쟁의 결과...진군 대패, 이후 8년 동안 조와 진은 전략적인 평형을 이룸.
. 전투 지역...연여閼與(지금의 산시성 허순현和順縣 서쪽)
- 전쟁의 흐름
1. 약속을 어긴 조
. 기원전 269년, 조는 진을 향해 서로가 점령한 상대방의 성읍을 교환하자고 제의한다.
> 진의 군주 소양왕昭襄王(소양왕은 달리 소왕昭王으로 불린다. 같은 인물이다)은 이에 응하여 진이 차지했던 조의 성읍을 돌려주지만,
> 조의 군주 혜문왕惠文王은 진이 내놓은 성읍을 손에 넣은 뒤 신의를 버린 채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자,
> 진의 군주 소양왕은 격노한다.
. 진의 소양왕은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를 내세워 조를 칠 생각이었으나,
> 무안군 백기는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내세워 몸을 사리자,
> 호양胡陽을 조를 칠 장군으로 선정했다.
. 호양은 한의 상당 지역을 뛰어넘어 조의 서남쪽 요새 연여에 맹공을 퍼부었다.
2. 공세에 나선 진
. 호양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공격 루트를 택하지 않고, 진의 군사를 이끌고 한의 상당군을 가로질러 조의 중부 험난한 땅 연여에 이른다.
. 연여는 장수漳水 상류에 위치한 산간 지대로 동남쪽 조의 도성 한단과는 3백여 리 떨어진 곳으로, 조의 서북부 요새이다.
. 호양은 복싱 선수처럼 상대방의 두 손이 막아선 얼굴 부분을 때리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의 복부를 겨냥하여 큰 힘으로 주먹을 휘두를 작정이었다.
. 호양 자신은 군사에 대한 견해에서도 당시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며,
> 그의 이 한 수가 조의 혜문왕에게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을 안길 것이라고 판단했다.
. 연여에서 장수의 골짜기를 따라 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서, 다시 방향을 꺾어 동으로 백여 리를 가면,
> 바로 조의 도성 한단의 코앞, 그들의 요새 무안武安,
> 이곳에서 한단까지는 불과 백 리도 안 되는 거리, 진의 군사라면 하루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 호양은 연여를 에워싼 뒤, 급히 공격하지 않았지만,
> 자신의 군사 약간을 거느리고 친히 요새 무안을 공격한다.
. 이는 바로 백기가 전술과 그대로 닮을 꼴이었으니,
> 그의 속셈은 성을 공격하여 땅덩어리를 차지하려는 데 있지 않고, 상대방의 인구를 확 줄이려는 데 있었다.
3. 조의 반응
. 조의 군주 혜문왕은 진의 군대가 이미 연여를 에워쌌다는 보고를 받고,
> 조의 대장 염파廉頗를 곁으로 불러 이렇게 일렀다.
'장군, 진의 군대가 연여와 무안을 겹겹이 에워쌌소. 이제 장군이 포위를 풀기를 기다리고 있소.'
> 그러나 염파의 대답은, '길은 멀고 험한 데다 좁기까지 하니 도울 방법이 없소이다.', 이랬다.
. 혜문왕은 악승樂乘을 불렀으나, 대답은 앞의 염파와 다름이 없었다.
. 마지막으로 혜문왕은 조사趙奢를 불러, '장군 연여를 구할 수 있겠소?', 이렇게 물었다.
.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길이 멀고 지세가 험할지라도 더 용맹한 쪽이 이길 것이옵니다.', 조사의 대답이었다
. 혜문왕은 조사를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군사를 이끌고 연여를 구하도록 명령했다.
- 조사의 작전
. 군대를 이끌고 나선 조사는 한단 서쪽 3십 리 지점에 주둔한 채, 더 이상 서쪽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 1백여 리 밖의 무안은 물론 서북 방향으로 수백 리 떨어진 연여를 구할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 조사는 군대를 주둔시키고 보루를 손본 뒤, 즉시 명령을 내렸다.
> 마음대로 출전하지 말라, 나에게 출전하자는 말도 입 밖으로 내지 말라, 군사에 관한 어떤 간언도 올리지 말라,
> 이를 어기면 목을 내리겠노라.
. 이때, 진의 군사는 무안을 진공하며 북을 울리고 위세를 올리는지 무안이 흔들릴 정도였으며,
> 무안을 지키는 군사들도 사뭇 긴장된 상태였으며,
> 이곳 백성들도 불안에 떨고 있었다.
. 진의 장수 호양은 이를 빌미로 조의 출격을 이끈 뒤, 바로 조의 군대를 섬멸할 작정이었다.
. 바로 이때, 조사의 앞선 명령에 불복한 고급 장교가 무안을 구하는 데 나서자는 간언을 올렸지만,
> 조사는 이 장교의 목을 당장 내렸다.
. 또 한 장교가 이와 같은 간언을 올렸지만 조사는 눈물을 흘리며 이 장교의 목을 내려 군영에 매달았다.
. 이렇게 되자 군중에서는 감히 계책을 올리는 자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 조사는 그의 군사에게 오로지 참호를 손보고 쌓는 데만 힘쓰게 하여,
> 그들의 보루는 날이 갈수록 견고해졌다.
. 조사는 그래도 무안을 구하기 위하여 나서지 않았다.
- 속임을 당한 진의 장군 호양
. 무안 성 아래 몸을 둔 진의 군사는 무안 동쪽에 진을 친 조사의 위협은 물론,
. 무안 서쪽으로부터 닥아오는 또 하나의 위협이 더 무서웠다.
> 무안 서쪽 1백여 리 지점에는 태항산이 있었고, 태항산을 넘으면 바로 한의 상당군이었다.
> 이곳 상당군에는 한의 무장한 병력이 주둔하며 이 땅을 지키고 있었다.
> 만약 이곳에 주둔한 한의 군사가 태항산을 넘어 조를 구하려고 나선다면,
> 무안 성 밖의 진군은 앞뒤로 적을 맞아야 하는 형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더구나 이들 한의 군사가 태항산을 따라 북상하여 무안에 있는 진군의 보급로를 끊기라고 한다면,
> 진군은 빠져나올 수 없는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 게다가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한의 군사가 상당에서 북상하여 조의 연여 구원에 직접 나서서,
> 진군이 돌아갈 길마저 끊어버린다면, 무안의 진군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가 될 판이었다.
. 이런 상황에서 진의 장군 호양은 상인으로 위장시킨 간첩을 조사의 군중으로 보낸다.
> 조사는 진군에서 보낸 이 상인을 잘 맞았고,
> 이 상인은 조군의 동향에 관심을 기울이며 조사의 작전 방향을 은밀히 탐지했다.
> 조사는 이 인물의 속내를 이미 짚어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일렀다.
'호양은 진의 노련한 장수외다. 그러나 이 사람도 결코 그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을 것이외다. 내 한단과 무안 사이를 굳게 지키면 호양은 보급이 끊겨 분명 퇴각할 것이외다.'
>그러고는 이내 한 마디 덧붙였다.
'이는 우리의 군사 기밀이니 입을 굳게 다물어야 할 것이오.'
. 상인은, '아무렴요, 제가 입을 다물 것입니다.', 몇 번이나 이렇게 되뇌었지만,
> 돌아가자마자 호양에게 그대로 보고했다.
. 호양은 적을 유인하려는 계획은 이미 실패했음을 알고,
'조사가 무안을 구하러 나오지 않으면, 할 수 없다, 내 다시 사람을 한단으로 보내 조의 대신에게 뇌물을 뿌려, 너 조사가 출전하도록 재촉하리라.', 이렇게 뇌었다.
. 그러면서 호양은 부대를 다시 배치하며 지구전에 들어갔다.
. 바로 이때, 조사의 군대가 연여를 급히 이동하고 있다는 정보가 날아왔다.
. 당시, 조사가 한단에서 출병한 지 스무여드레, 그날 진이 보낸 '상인'을 돌려보낸 뒤,
> 조사는 즉시 전군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 전군은 경무장을 한 채 무안을 돌아 그대로 연여를 내달았던 것이다.
- 정면으로 맞선 두 나라
. 호양은 조사가 이끄는 군대가 연여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자,
> 즉시 군대를 이끌고 조군의 뒤를 추격했다.
. 하룻밤을 지나고 이틀만에 조군은 연여 부근에 이르렀다.
. 곧이어 도착한 호양은 무안과 연여에 있던 진군을 한곳으로 집결시킨 뒤, 북산 기슭에 진을 쳤다.
. 이제 호양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만 있을 뿐이었다.
> 산을 에워싸고 공격은 하지 않는 방법,
> 즉시 산을 올라 공격하여 전쟁의 승부를 결정하는 방법.
. 첫 번째 방법은 식량이 끊긴 조군을 북산에서 그대로 굶겨죽이기에 참으로 괜찮은 전략이지만,
> 진군도 마찬가지로 식량이 부족한 사태로 맞을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다.
. 또 하나, 조군이 점거한 북산은 이미 감제고지로서 진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대로 드러나기에 진군에게는 참으로 불리했다.
> 이는 조군이 절대적인 주도권을 손에 쥐고 있다는 뜻이다.
. 게다가 조군은 북산에서 먹을 수 있는 야채나 과일로써 요기를 할 수 있는 데다, 전투에 참여한 말의 먹이도 쉬 확보할 수 있었다.
. 그런데 호양의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공격하지 않으면, 보루를 쌓는 데 능한 조군에게 시간을 주게 되고, 이는 오히려 진군에게 불리한 국면을 가져올 것이라 판단하고,
> 즉시 공격을 명령한다.
. 이제 두 진영의 군대는 결사전을 벌일 판이었다.
. 그런데 산으로 오르는 길이 좁고 험한 점은,
> 작전 경험이 들쭉날쭉한 조의 군사들에게는 약점을 감출 수 있게 했다.
. 양 진영이 일선에서 치고받으며 사생 결단의 싸움을 벌일 때, 조군의 신병은 뒤쪽에서 화살과 돌 따위를 열심히 운송했다.
. 또 조군 뒤를 받치는 궁노병弓弩兵은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좁고 험한 길에서 다가오는 아래쪽의 진군을 향해 화살을 퍼부었다.
- 전쟁의 결과
. 진군은 대패하고 사령관 호양은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 그리고 수만에 이르는 진군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 연어지전은 막을 내렸다.
* '閼與'는 '연여'라고 읽어야 맞다. 많은 곳에서 이를 '알여'라고 표기했지만, 틀렸다. '閼'은 몇 가지 다른 음이 있지만, 지명이나 흉노의 왕비를 가리킬 때는 '연'으로 읽는다.
11. 장평지전長平之戰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진秦, 조趙
. 참전 병력...진군 약 60만 명, 조군 약 45만 명.
. 사상자...진군 사상자 약 20만 명, 조군 사망자 45만 명.
. 주요 지휘관...진군-백기白起, 왕흘王齕, 조군-염파廉頗, 조괄趙括
. 시간...기원전 262년~기원전 260년
. 주요 전투 지점...장평長平(지금의 산시성 가오핑시高平市)
. 전쟁의 결과...조의 전군은 거의 전멸, 진군의 승리.
- 전쟁의 원인
. 기원전 270년, 진은 한을 가로지르며 넘어 조를 쳤다.
> 그러나 조의 장군 조사에게 연어에서 대패했다.
. 이때, 위 출신 범저范雎라는 인물이 진에 들어가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는 책략을 내놓았고,
> 진의 군주 소왕은 이 책략을 받아들여 먼저 위를 공격했으며,
> 이어서 칼끝을 한으로 돌렸다.
. 기원전 262년, 진은 한의 야왕野王(지금의 허난성 친양시沁陽市)를 쳐서 손에 넣음으로써,
>한의 상당군과 본토의 연결을 완전히 차단했다.
. 그러자 한의 군주 환혜왕桓惠王은 상당군의 군수 풍정馮亭에게 이 땅을 진에 바치도록 종용한다.
> 그리고 진을 향해 싸움을 멈출 것을 요청했다.
. 그러나 풍정은 진에 무릎 꿇지 않고 그곳 백성들과 손을 맞잡고 조의 힘을 이용하여 진에 맞서기로 결심하고,
> 이렇게 결정한 뒤, 곧바로 상당군의 열일곱 개 성읍을 모두 조에 바치기로 하고,
> 급히 사자를 조로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 조의 군주 효성왕孝成王은 평양군平陽君 조표趙豹와 이 사실을 두고 상의했지만, 평양군 조표는 오히려 화근이 될 뿐이라며 받아들이지 말라고 강력히 진언했다.
. 효성왕은 다시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과 조우趙禹를 곁으로 불러 상의했다.
> 이 두 사람은 풍정이 내민 상당군을 접수하라고 권했다.
'백만 대군을 이끌고 몇 년 몇 개월을 작전해도 한 개 성읍을 손에 넣기 힘든데, 앉아서 열일곱 개나 되는 성읍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큰 이익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소서.', 이것이 이 두 사람이 내세운 이유였다.
. 효성왕은 평원군에게 다시 물었다.
'상당의 땅덩어리를 접수하면 진이 분명 무안군 백기에게 군사를 주어 우리를 침공할 텐데, 그러면 누가 나서서 막을 수 있겠소?'
>평원군의 대답은 이랬다.
'백기와 맞설 장군은 오로지 염파뿐입니다. 야전에서는 백기만 못하지만 성문을 굳게 잠그고 지킨다면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리하여 효성왕은 평원군의 계략을 좇아 풍정을 화양군華陽君으로 봉하고,
> 평원군을 상당으로 보내 땅덩어리를 접수하도록 조치하고,
> 동시에 염파에게 군대를 주어 장평으로 나아가서 주둔하며 진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 조가 상당을 접수하자 진은 불만을 드러내며 군사를 이끌고 조를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 전쟁의 흐름
1. 상당을 점령한 진군
. 기원전 261년 초, 진의 군주 소왕은 한의 구씨緱氏(지금의 허난성 옌스시偃師市 남쪽)과 윤씨綸氏(지금의 허난성 덩펑시登封市 서남)을 점령함으로써 한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 기원전 260년 초, 진의 군주 소왕은 좌서장左庶長 왕흘王齕에게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상당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 상당의 백성들은 잇달아 조의 경내로 도망했다.
. 조의 군대는 장평에서 도망오는 상당의 백성들을 맞이했다.
2. 성을 굳게 지킨 염파
. 기원전 260년 음력 4월, 왕흘은 군사를 이끌고 장평의 조군을 향해 진공했다.
. 효성왕은 염파에게 이들을 맞아 싸울 것을 명령했고,
> 염파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진군을 향해 공격을 전개했다.
. 조군은 진군 정찰병을 공격하여 상처를 입히고,
. 진의 정찰병은 조군의 비장 가茄의 목을 벴다.
. 기원전 260년 음력 7월, 조군은 성벽을 높이 두르고 영내에 머물며 싸움에 응하지 않았다.
. 그러자 진군은 강공을 퍼부었으나 겨우 조군 서쪽 진영 일부를 손에 넣고 초급 장교 몇 명만 포로로 잡았다.
. 몇 차례 전투에서 그때마다 패배하자 조군의 장수 염파는 유리한 지형에 의지하여 진영을 고수하라고 명령했다.
> 이 작전은 진군을 피로에 지치게 만들었지만,
. 조의 군주 효성왕은 빨리 끝나지 않는 전쟁에 자못 불만을 품고,
> 몇 차례나 사람을 보내 염파를 책망했다.
. 염파는 자기 군대의 힘을 비축함과 동시에 적을 피로하게 만들어, 적의 예봉을 꺾은 뒤, 유리한 기회를 잡아서 출격할 작정이었다.
. 그런데 염파로서는 예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 진은 청장년 백만 명을 소집하여 수로를 파더니,
> 이 수로를 통하여 군량을 운반하는데, 조의 군량 운반 속도보다 더 빨랐을 뿐만 아니라 막힘도 없었다.
. 군량과 마초까지 부족하게 된 염파가 방어전으로 버티기에는 힘들게 되었다.
. 진군은 조의 후방을 수시로 공격하며 식량 보급로를 끊임없이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 이는 조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게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었다.
> 동시에 외교상의 실패로 구원병까지 요청할 수 없는 처지였다.(위, 한, 초는 모두 진을 두려워했으며, 제는 지난날 연의 악의가 제를 토벌할 때 조가 연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조를 미워하고 있었고, 연과 진은 이제 가까워진 사이였다.)
- 강화를 요청한 조의 효성왕
. 초반, 조군이 자기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형세가 불리한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 조의 군주 효성왕은 누창樓昌, 우경虞卿 등과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며,
> 자신이 직접 부대를 이끌고 나아가 진군과 결전을 치르겠다고 했다.
> '임금께서 그렇게 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신을 보내 진과 강화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이건 누창의 견해였다.
> 그러나 우경은 달랐다. 금은보화를 사신에게 쥐어보내 초와 위와 합종하며 진에 맞서면, 진도 강화하는 쪽으로 기울 것이라고 했다.
. 효성왕은 누창의 건의를 받아들이며, 정주鄭朱를 진으로 보내 강화에 나서기로 했다.
. 우경은 이에 한 마디 더 진언했으니,
> 정주가 진에 이르면, 진의 군주와 재상 범저는 분명 접대를 융숭하게 하며 이를 천하에 내보일 것입니다. 그러면 초와 위는 이미 강화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며 그들의 군사를 내보내 우리 조를 구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은 온 천하가 조를 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결국 강화를 맺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조군은 필패입니다.'
. 효성왕은 결국은 우경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누창 쪽으로 기울며 정주를 진에 보내 강화를 요청했다.
> 진은 조를 마비시키고 각국의 합종을 막기로 했다.
> 그리고 시간을 벌며 군사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다.
> 이렇게 하여 조군에 심각한 타격을 주기로 했다.
. 과연 진은 조가 강화를 요청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조의 사자 정주를 따스하게 대접하며,
> 각국에 조와 진은 화해했다는 신호를 널리 알렸다.
> 각국이 힘을 합하여 조를 구하는 데 나서지 않도록 방비한 것이다.
. 이렇게 되자 조는 더욱 고립된 상태에 처하게 된다.
- 사령관을 교체한 진과 조
. 조의 군주 효성왕은 벌써부터 염파의 군대가 몇 차례 패배하자 화가 난 데다,
> 보루를 굳게 지키며 감히 싸움에 나서지 않으려는 염파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있었다.
. 진의 재상 범저는 첩자에게 금은보화를 딸려 조의 도성으로 들어가서 이간책을 펼치도록 하는 한편,
> '염파쯤이야 쉽게 꺾을 수 있다, 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는 마복군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다.', 이런 말을 퍼뜨렸다.
. 조의 군주 효성왕은 장군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조괄을 전선으로 내보내고 염파를 도성으로 불러들인다.
>효성왕은 인상여藺相如와 조괄 어머니의 간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 기원전 260년 음력 7월, 조괄은 장평에 이르러 염파의 자리를 차지하며 군사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 조괄은 염파의 작전 방침을 바꾸고, 군사를 이끌고 진군을 공격했다.
. 진의 군주 소왕은 조가 염파를 소환하고 그 자리에 조괄을 앉혔다는 소식을 듣자,
> 비밀리에 무안군 백기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왕흘을 백기 밑 부장副將의 자리에 앉혔다.
> 그리고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그대로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 백기의 계략
. 조괄이 진군을 공격할 때, 백기는 진군에게 짐짓 패퇴하는 모습을 보인다.
. 이때까지 조괄은 왕흘을 대신하여 백기가 총사령관에 임명된 사실조차 모른 채,
> 진군이 패퇴한다고 믿으며 계속 추격하여 진군의 진영까지 추격했다.
. 그러나 조군은 두 해 동안 굳게 쌓은 진의 군영을 끝내 깨뜨릴 수 없었다.
. 두 진영이 공방전을 펴는 동안,
> 백기는 2만 5천의 날랜 병사를 조군의 출격한 부대 후방을 기습하여 조군의 퇴로를 끊었다.
> 백기는 또 5천의 날랜 기병을 조군과 그들이 병영 사이로 돌진시켜 조군의 주력을 두 개로 분할함으로써,
> 이들을 고립시키는 한편, 조군의 식량 보급로를 절단했다.
. 백기는 또 경무장 정예병을 여러 차례 내보내 조군을 공격했다.
. 몇 차례의 공격으로 조군은 전의를 상실한 채, 방어로 전환하고 구원병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 조군의 주력 부대에 이르는 식량 보급로가 끊겼다는 소식을 접한 진의 군주 소왕은 친히 하내군河內郡(지금의 허난성 친양시沁陽市 부근)까지 나아가서 그곳 백성 모두에게 작위를 내리는 한편,
> 전국에서 15세 이상 청장년을 소집하여 장평의 싸움터로 나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 진의 승리, 조의 패배
. 기원전 260년, 음력 9월, 조군의 주력 부대에 군량이 떨어진 지 벌써 46일, 병사들은 서로 잡아먹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 조괄은 남은 병사로 포위 돌파하기로 하고 네댓 차례 몇 곳을 공격했으나 포위 상태는 뚫리지않았다.
. 조괄은 정예병으로 다시 조직한 뒤 포위 돌파 작전을 강행했지만, 결과는 진군이 쏜 화살에 거의 다 쓰러졌다.
. 장군을 잃은 조군의 남은 병사는 진의 장수 백기에 투항했다.
. 백기는, '조의 병사들은 이랬다저랬다 변덕이 심한 놈들이다. 이들을 살려두었다간 또 무슨 사단을 일으킬지 모른다.', 이렇게 말하며,
> 이들 투항한 조의 병사 45만 명을 모두 생매장하고 말았다.
> 다만 아직 나이 어린 병사 2백 4십 명만 조로 돌려보냈다.
. 진의 승리, 조의 완패였다.
> 이제 진의 영역은 북으로는 연, 동으로는 제, 남으로는 한과 위에 이르렀지만,
> 진이 손에 넣은 백성은 아주 적은 수에 불과했다. 진이 두려웠던 백성들이 사는 곳을 진이 아닌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 중국의 CCTV '백가강단'에서 <전국칠웅>을 강의한 리산李山 교수는 '장평대전'으로 강의를 끝냈다. 진왕 영정이 전국칠웅 가운데 마지막 일웅이 되며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40년이나 남아 있었지만, 이미 '장평대전'으로 전국시대의 패권 다툼의 승패는 끝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 전쟁의 결과
. 장평에서 벌어진 전쟁은 진의 승리로 끝났다.
. 조는 원기가 크게 상하여 이제는 두 번 다시 자기 혼자 진에 맞설 수 없게 되었다.
. 이 전쟁 뒤, 진이 전국칠웅 가운데 일웅의 자리에 오르는 일은 그저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 조의 군주 효성왕은 평양군 조표의 건의에 귀기울지 않은 지난 날을 돌아보며 후회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다. (참, 조의 군주 효성왕은 '호복기사'로 조를 크게 일으킨 '무령왕'의 손자이다.)
> 또, 조괄의 출정을 반대한 그의 어머니를 주살할 수도 없었다.
12. 한단지전邯鄲之戰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조+위+초 연합군 : 진
. 참전 병력...조+위+조 연합군 60만 명, 진 60만 명
. 전쟁이 벌어진 곳...한단邯鄲(지금의 허베이성 한단시邯鄲市)
. 시간...기원전 259년~기원전 257년
. 사상자...진군 약 30만 명
. 주요 지휘관...염파廉頗, 조승趙勝, 위무기魏無忌, 왕릉王陵, 왕흘王紇
. 전쟁의 결과...조+위+초 연합군의 승리, 진의 패배
- 전쟁의 배경
. 기원전 259년, 장평에서 맞붙었던 전쟁(장평지전)이 끝난 뒤, 진의 장군 백기는 승리의 기세를 몰라 조의 도성 한단을 포위 공격하여 조를 멸망시키려고 마음먹었다.
. 진의 재상 범저는 백기가 세운 전공을 시기한 나머지,
> 오랜 전쟁에 지친 진군의 피로를 덜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 한에게는 원옹垣雍(지금의 허난성 위안양현原陽縣)을 할양 받고,
> 조에게는 여섯 성읍을 할양 받으며 강화를 요구하자고 소양왕에게 건의하자, 왕은 이에 동의한다.
. 조의 효성왕이 여섯 성읍을 할양하려고 할 때,
> 대신 우경이 앞으로 나서며, '그렇게 되면 진은 더욱 강대해지니, 장차 조는 망하게 생겼다.'라며,
'차라리 그 땅을 제에 뇌물로 바쳐서, 제와 연합하여 진에 맞서야 한다.'고 진언했다.
> 효성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우경을 제에 사신으로 보내 제의 군주 건建과 진에 맞설 계획을 세우도록 했다.
> 마침 위의 사자가 조를 찾아 합종할 수 있는 기회까지 만들어지자, 조는 위와 당장 맹약을 체결한다.
> 동시에 영구靈丘(지금의 산시성 링치우현靈丘縣)를 초의 재상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에게 보내며, 초와도 우호관계를 맺었다.
> 또 한과 연과도 온 힘을 다해 우호관계를 맺었다.
. 게다가 나라 안에서는 생산을 적극적으로 발전하는 데 힘을 쏟는 한편, 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 장비를 다시 확충하며,
진에 맞설 준비를 착착 갖추어 나갔다.
- 전쟁의 흐름
. 진의 소양왕은 조가 여섯 성 할양 약속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 동방의 여러 나라가 합종하여 진에 맞서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 기원전 259년 가을,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에게 군사 60만을 주어 조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60만 가운데 북쪽으로 나선 한 부분의 진군은 상당을 공격하여 점령하며 북방 경계에 나선 조군이 한단으로 못 내려오록 견제했으며,
> 남쪽으로 나선 한 부분의 진군은 위+초 연합군이 접근을 방비했으며,
> 중앙을 맡은 진의 주력 부대 40만은 그대로 조의 도성 한단을 직접 공격했다.
> 무안관武安關과 피뇌관皮牢關을 손에 넣은 진군은 그대로 내달아, 기원전 258년 정월에는 조의 도성 한단성 아래 이르렀다.
. 조는 상경上卿 염파에게 40만의 군사를 주어 진의 침공에 완강하게 저항하도록 하자,
> 재상 평원군 조승은 가산을 몽땅 다 털어 병사들에게 내놓는 한편, 처첩까지 전투에 참여시키는 등 군과 민을 격려하며 국난에 함께했다.
> 게다가 날랜 병사 3천을 지휘하며 끊임없이 출격하여 진군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 진의 장군 왕릉은 전쟁이 벌어진 지 이태가 되도록 4천의 진군을 희생시키면서도 승리를 거머쥐지 못하자,
> 왕릉을 물리고 백기를 사령관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 백기는 병을 핑게로 끝내 고사했다.
> 그러자 소양왕은 왕흘을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병력 10만을 더 주어 조의 도성 한단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도록 하였다.
> 그러나 진군은 사상자가 반을 넘어서면서도 여전히 한단을 손에 넣지 못하자,
> 정안평鄭安平을 장군에게 5만의 군사와 대량의 식량을 가지고 왕흘을 지원했다. 이로써 조에 대한 공격에 힘을 보탰다.
. 한단성에 식량이 동날 지경이 되자, 효성왕은 위와 초, 이 두 나라를 향해 구원을 요청했다.
. 기원전 258년, 평원군 조승은 효성왕의 명을 받들어 사신의 임무를 띠고 초를 방문한다.
> 이때, 평원군 조승이 수행한 인물 가운데 모수毛遂라는 사내가 있었으니,
> 초의 군주 고열왕考烈王이 합종에 머뭇머뭇하며 결정을 미루는 상황에서,
> 모수가 홀연 칼을 빼어들고 고열왕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
'지금 초의 강역이 5천 리요 창을 든 병사가 백만이니, 이는 패왕이 될 충분한 바탕이외다. 이런 초의 강대함은 천하에맞설 상대가 없습니다. 그런데 백기, 그 새파란놈이 수만의 병력을 이끌고 초와 맞붙어 한 번 싸워 언鄢과 영郢을 손에 넣고, 두 번 싸움에 이릉夷陵(초의 선왕의 능묘)을 불사르고, 세 번 싸움에 왕의 조상을 욕보였으니, 이는 백 세가 지나도록 원통스러운 일이며, 우리 조에게도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도 왕께서는 부끄러움을 모르십니다. 합종은 초를 위한 일이지 우리 조를 위한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 초의 군주 고열왕은 수치에 잠겨, '맞는 말이오, 정말 맞는 말이오.', 하고 뇌었다.
> 모수의 용맹과 언변으로 이날, 노와 초는 합종의 맹약을 맺었다.
> 평원군 일행이 조로 돌아간 뒤, 초는 십만의 병력을 내보내 조를 구원한 데 나섰다.
. 진의 군주 소양왕은 사람을 위로 보내 그곳 군주 안희왕安僖王 앞에서
' 만약 조를 돕는다면 우린 조를 돕는 나라를 곧 공격할 것이오.'라고 윽박질렀다.
> 안희왕은 공포에 질려 대군을 이끌고 있던 진비晉鄙에게 더 이상 진군하지 말고, 업鄴(지금의 허베성 린장현臨漳縣 서남)에 잠시 멈춰서 사태를 관망하라고 명령했다.
. 그러나 위의 신릉군信陵君 위무기는 안희왕의 총비 여희如姬를 꼬드겨 호부虎符를 훔쳐 내고, 이를 바탕으로 용사 주해朱亥를 데리고 가서 진비의 목을 내리고 병권을 탈취한 뒤, 정예 병사 8천을 뽑아 진군을 공격했다.
*호부는 옛적에 황제가 부대를 이동시키고 장군을 파견하는 데 쓰이던 병부兵符로서, 청동이나 황금으로 만든 호랑이 가 엎딘 모양의 동원 표지이다. 이를 둘로 쪼개어 한 쪽은 장수에게 주고 다른 한 쪽은 황제가 보존한다. 이 두 쪽의 호부가 동시에 맞아야만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 '절부구조竊符救趙'라는 네 글자 성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 초의 춘신군 황헐은 군사를 이끌고 조를 구출하기 위한 작전에 나섰고, 진군은 작전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 그러자 진의 군주 소양왕은 다시 백기에서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조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지만,
> 백기는 끝내 병을 핑게로 나서지 않았다.
> 화가 난 소양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백기의 관작을 빼앗았다.
> 백기는 두우杜郵(지금의 시안시西安市 서북)에서 제 목숨 제가 끊으며 세상을 마쳤다.
- 전쟁의 결과
. 기원전 257년12월, 위+초 두 나라 군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단성 교외에 이르러, 몇 차례나 붙은 전투에서 진에게 패배를 안겼다.
. 성을 지키던 조군도 성 밖의 위와 초 두 나라의 군대와 호응하며 성문을 열고 나와서 반격했다.
. 이렇게 세 나라 군대가 안팎으로 협공을 가하자 진군은 크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
. 왕흘은 잔존 병사를 이끌고 분성汾城(지금의 산시성 허우마시侯馬市 북쪽)으로 도망했지만,
> 정안평이 이끌던 병사 2만여 명은 연합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자 어쩔 수 없이 손을 들고 조에 투항했다.
. 한단의 포위는 풀리고,
> 연합군은 승리를 기세를 몰아 하동河東(지금의 산시성 서남 지역)까지 내달아 진군에게 다시 패배를 안겼다.
> 진군은 하서河西(지금의 산시山西와 산시陝西 사이 황하 남단)까지 물러서야 했다.
. 전쟁이 끝난 뒤, 진은 조+위+초와 전쟁을 하지 않기로 서명하고, 이미 점령하고 있던 하동군河東郡을 위에, 태원군太原郡은 조에, 상당군은 한에 돌려주었다.
13. 진멸육국지전秦滅六國之戰
-머리말
.'진멸육국지전'은 달리 '진조통일지전秦朝統一之戰'이라고도 이르며,
> 전국시대 말엽 다른 여섯 제후국을 소멸시키기 위해 시작되어 통일을 완성한 전쟁으로서,
> 기원전 230년 한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221년 제를 멸함으로써 끝났으니,
> 모두 10년에 걸쳐 진행된 전쟁이다.
- 전쟁의 개요
. 참전국...진, 관동육국關東六國(함곡관函谷關 동쪽의 여섯 나라)
. 참전국 병력...진군 60만 명, 관동육국은 불명
. 사상자...십수만 명
. 전투가 벌어진 곳...중국 북방과 남방
. 시간...기원전 230년~기원전 221년
. 주요 지휘관...왕전王翦, 왕분王賁, 이신李信, 양단화楊端和, 내사등內史騰, 몽무蒙武, 몽염 蒙恬
. 전쟁의 결과...육국 멸망, 진의 중국 통일
* 함곡관은 중국 옛적의 관문으로 허난성 링보오시靈寶市 북쪽 15km 지점 왕둬촌王垛村에 있다. 이곳 서쪽으로는 고원이, 동쪽으로는 버티고 선 계곡 아래로 흐르는 물이, 남쪽으로는 친링산맥秦嶺山脈이. 북쪽으로는 황화가 흘러 천하의 요새지이다. 전국시대 진의 군주 효공孝公 때에 세웠다. (지금의 시안西安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위치함)
- 전쟁의 배경
1. 진의 굴기
. 춘추시대 각 제후국이 중원을 두고 패권을 다툴 때, 진은 언제나 서쪽 변방에 위치한 진은 주목조차 받지 못했지만,
> 전국시대에 이르러 진의 군주 효공孝公은 상앙商鞅을 곁에 두어 변법으로 혁신을 꾀하며,
> 귀족의 특권 가운데 하나인 세경세록제도世卿世祿制度를 없애고,
> 중앙집권을 점차 강화하며 봉권통치정권을 굳게 세워 나갔다.
> 또 안으로는 전장에서 세운 공을 높이 장려하며 농사와 전투를 함께하는 방안을 세웠으며,
> 밖으로는 연횡連橫을 통하여 다른 제후국과 맞붙었다.
. 장군 사마조司馬錯는 남쪽의 한중漢中과 파촉巴蜀을 병탄하고, 북으로는 의거義渠를 멸함으로써,
> 진에게 광대한 땅덩어리를 연속으로 안겼다.
. 그 뒤, 장군 백기는 군대를 이끌고 초의 도성 영郢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 이어서 조+위의 연합군을 화양華陽에서 궤멸시켰으며,
> 조의 대군을 장평에서 섬멸하여, 중원의 큰 땅덩어리가 진의 통제 안으로 들어왔다.
. 기원전 246년, 진의 군주 정政이 자리에 올랐다.(정은 통일 진의 첫 번째 황제 진시황이다.)
> 이때부터 진이 어섯 제후국을 멸하며 천하를 통일하는 전쟁에 돌입했다고 볼 수 있다.
. 진왕 정의 재상 이사李斯가 올린 글에서, '우리 진은 이미 천하를 통일할 조건을 갖추었습니다, 관동육국은 사실살 우리 진의 한낱 군현郡縣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라고 이름으로써,
> 진은 이미 통일의 주도권을 손에 쥔 상태임을 자신하고 있다.
. 어떻든, 진왕 정이 집권했을 때, 관동육국은 앞뒤로 쇠패하며 오로지 한 나라 진을 점점 더 강하게 만들었다
2. 관동육국의 쇠락
. 제는 동방의 강국이었지만, 전국시대 말엽 군주 건建에 이르면, 위왕威王 때 이룩한 패업은 이제 지나간 옛일이 되고 말았다.
> 이름만 '강국'인 제는 정치는 낙후하고 경제 발전은 멈추었으며, 그 많던 현신과 양장은 사라지고,
> 나라는 외세에 맞설 전투 의지 없이, 진의 동방육국을 멸할 전쟁에 맞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 이름뿐이 나라로 멸망할 때만 기다리는 형국이 되었다.
. 한은 본래 삼진三晉(진晉에서 나뉜 세 제후국, 곧 위魏, 조趙, 한韓) 가운데 가장 약한 제후국이었다.
> 한의 군주 환혜왕 때에 이르면 이미 진에 신복臣服한 상태였다.
> 전국시대 말엽, 산의 강역은 더욱 줄어들어, 도성 양적陽翟(지금의 허난성 위저우시禹州市)과 그 주위의 십여 개 성읍만 남아서,
> 이름만 있지 사실상 망한 나라에 불과했다.
. 위는 일찍이 전국시대 초기만 해도 열국 가운데 가장 강한 제후국이었다.
> 광대한 강역 안에는 산과 강이 이리저리 얽혀 있고, 지세는 험요했지만,
> 진의 동방 진출의 통로 함곡관의 목줄을 죄는 곳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에,
> 언제나 진이 물리쳐야 할 상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 더구나 군주 혜왕이 자리에 오른 이래, 진과의 전쟁에서 연달아 패배하며 강역이 점점 줄어들었다.
> 위의 군주 안리왕安厘王 말엽에는 나라의 세력이 더욱 쇠약해지지만,
> 신릉군의 '절부구조' 사건을 통한 다른 제후국과의 연합으로 진을 크게 이김으로써 위세를 잠시 떨친다.
> 그러나 안리왕은 아둔하고 무능하여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 조는 중원의 북방에 위치한 제후국으로 사방 2천 리나 되는 강국이었다.
> 무령왕 때에는 '호복기사'를 창도하며 정치를 혁신하여 나라는 부강하고 병사는 강했다.
> 조는 북방의 흉노와 맞서며 남쪽의 진과도 힘의 균형을 이룰 만큼 강한 나라였다.
> 그러나 무령왕이 세상을 떠난 뒤, 잇달아 진의 공격을 받은 데다, 염파나 이목李牧 등의 훌륭한 장수를 멀리 내침으로써 끝내는 진에게 깨지고 말았다.
. 연은 춘추시대 초기만 해도 참으로 약소한 국가였지만,
> 소왕昭王 때에 이르러 힘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린 결과, 강역은 더욱 넓어지고 국력은 날로 강해지며,
> 북으로는 요동, 서로는 상곡上谷에 이르고 남으로는 제와 조에 국경이 맞닿게 되었다.
> 그런데 군주 희喜가 정권을 오로지할 때, 이웃 조나 제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지 않은 데다,
> 걸핏하면 전쟁을 일으키며 백성을 혹사시키고 물자를 낭비하여,
> 국력이 몹시 낭비하여 가장 약소국인 한보다 조금 나은 상태에 이르렀다.
. 초는 춘추시대부터 전국시대까지 줄곧 남방 대국의 자리를 잃지 않았다.
> 강역은 사방 5천 리에 이르는 데다 군사도 백만이나 되고 큰 땅덩어리에 물산도 풍부하여
> 제후국 가운데 상당히 실력이 넘치는 나라였지만,
> 진의 장군 백기가 초의 도성을 공략한 뒤부터 나라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기 시작했다.
> 그뒤, 여러 번 도성을 옮기며 힘을 추스리려고 했지만,
> 떠난 민심을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군주 고열왕 전후로 초는 이미 강국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었음은 물론,
> 진과 맞서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지경에 이르렀다.
- 관동육국을 멸할 준비
. 기원전 238년, 진왕 정은 승상 여불위呂不韋와 장신후長信侯 노애嫪毐를 제거하고 친정에 들어간다.
(촛불횃불의 이 티스토리 '역사 인물 산책' 꼭지 <다 가지려다 다 놓친 사나이-노애> 참조)
> 그리고 이사, 위료尉繚 등의 도움을 받으며 천하통일의 전략을 마련한다.
> 진이 육국을 멸한 전략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육국이 혼전하는 틈을 타서 이들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한다.
진왕은 위료가 내놓은 육국의 합종을 깰 방안, 곧 '재물을 아끼지 않고 상대의 힘 있는 신하를 매수하여 내부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는 적국을 내부 분화로 와해시키는 방안이다.
..> 지금까지의 원교근공의 정책을 계승하고, '선약후강先弱後强'과 '선근후원先近後遠'의 구체적 전략을 구사한다.
> 이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이사는 먼저 한과 조를 공격하도록 진왕 정을 설득했다. '조를 점거하며 한은 망할 수밖에 없고, 한이 망하면 위도 제 홀로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일거에 한과 위를 무너뜨리고 제와 연까지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사가 자기 주장에 받침으로 내세운 근거였다.
. 이와 같은 전략 방침에 따라 천하통일을 위한 전쟁은 시작되었다.
- 전쟁의 과정
1. 한을 병탄하고 조를 멸하다
. 진은 조를 치기에 앞서, 이사와 위료의 지략에 따라 연과 조, 이 두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 두 나라가 전쟁으로 맞붙자, 진은 연을 돕는다는 구실로 조를 공격했다.
> 진은 서북, 서, 남, 이렇게 세 방향에서 조를 공격했지만, 조의 남쪽에 공격의 초점을 맞추었다.
> 앞과 뒤에서 적을 맞은 조를 큰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전략이었따.
. 기원전 236년 겨울, 연과 조 두 나라가 맹렬히 싸우는 중에, 진은 장군 왕전王翦을 보내 태항산의 전략적 요충지 연여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 기원전 234년에는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여 조의 남쪽을 다시공격하였다.
. 그러자, 조왕은 북쪽 변방에 배치하였던 명장 이목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이목은 일찍이 변경을 침입한 흉노의 10만 병사를 물리친 전투력 최강의 부대를 지휘한 장군이었다.)
> 이목은 군사를 이끌고 조로 돌아와서 진의 장군 환기桓齮가 이끄는 진군과 의안宜安과 비하肥下 지역에서 맞붙었다.
> 진군은 이 전투에서 전군이 전멸할 정도의 큰 패배를 당하고, 진의 장군 환기는 겨우 몇 명의 호위병과 함께 포위를 뚫고 달아났다.
. 한은 전국칠웅 가운데 가장 약소국이었지만 지리적 위치는 자못 중요했다.
> 한은 진의 관동 진출을 막을 수 있는 곳에 위치했기에, 진이 육국을 병탄하며 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부터 멸해야 했다.
> 이 때문에 진과 한, 이 두 나라는 잇달아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 여러 차례 진의 공격을 받은 한은 점차 움츠러들며 진을 향해 속국이 되기를 청하기도 했다.
. 기원전 230년, 진은 철저하게 한을 멸했다. 한의 군주 안安을 포로로 잡고 손에 넣은 한의 땅덩어리에 영천군潁川郡을 세웠다. 이렇게 한은 당시 여섯 제후국 가운데 가장 먼저 멸망했다.
. 기원전 232년, 진은 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조를 공격했다.
> 조의 사령관 이목은 병력을 집중하여 북쪽으로 쳐들어온 진군을 물리친 뒤, 다시 남쪽으로 쳐들어온 진군과 싸울 작적이었다.
> 번오番五(지금의 허베이성 핑산현平山縣 동남)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진의 군대는 심각할 타격을 입고 조의 국경 밖으로 퇴각했다.
> 이를 비롯한 세 차례 전투에서 진군은 모두 패배했지만,
> 이목이 이끄는 조의 군대도 병력 손실을 보충하지 못하여 이제 단독으로는 진과 맞서며 버틸 수 없게 되어,
> 외부의 도움을 얻어야 할 판이었다,
. 당시 초와 위는 이미 쇠약해진 상태였고, 연의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아, 오로지 제의 인력과 물자의 도움을 얻지 않으면 진과 맞설 수 없었다.
. 진도 조의 이런 상황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사신과 몇몇 책사를 함께 제로 보내 조와 제의 연합을 미리 막아 조를 고립시키려고 했다.
> 진은 이렇게 만든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또 다시 병력을 일으켜 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 기원전 230년, 조는 일찍이 없었던 큰 한해를 당했다.
> 이를 안 진은 그 이듬해 또 다시 조를 향한 대대적인 진공에 나섰다.
. 기원전 228년, 조의 장군 조총趙葱과 안취顔聚 등이 몇 달 동안 분전했지만, 결국은 진의 장군 왕전에게 격파되자,
> 안취는 패잔병을 수습하여 한단으로 물러나 군사를 정돈하며 성을 지켰으나,
> 내부의 첩자 곽개郭開가 진에게 매수되어 조정을 향해 여러 차례 투항을 권했다.
> 조의 공자 가嘉가 단호히 반대하며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고,
> 종족과 빈객을 이끌고 나선 한단 방어전에 나서지만,
> 조왕은 전투 의지를 상실하고 내부의 첩자 곽개의 꾐에 따라 진군에게 성문을 열어주며 투항했다.
. 진이 한단을 공격하여 함락한 뒤, 조는 멸망하고 공자 가는 대代(지금의 허베이성 위현蔚縣 동북)으로 달아나 왕으로 스스로 칭하니, 이 곧 대왕代王이다.
. 기원전 222년, 진은 장군 왕분王賁을 보내 대를 멸하자, 공자 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서융西戎으로 이주되었다는 설도 있음)
. 나라 세운 지 250년, 조는 마침내 멸망을 고한다.
2. 위를 멸하다
. 진은 조를 멸한 뒤, 즉시 남쪽으로 내려와 초를 멸할 작정이었지만,
> 먼저 위를 멸하기로 결정하고, 초는 그 뒤에 치기로 한다.
. 위는 원래 '천하의 지도리(가장 중요한 부분)'로서 상당히 훌륭한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 그러나 잦은 전쟁으로 국력은 크게 손상된 상태였다.
> 또 여러 해에 걸친 진의 공격에 그때마다 패퇴하며 땅덩어리를 떼어주며 강화를 요청했기에,
> 위의 황하 이북의 영토는 거의 다 먹힌 상황이었다.
. 기원전 225년, 진은 군대를 파견하여 위의 도성 대량大梁(지금의 카이펑시 開封市)으로 진공했다.
> 진의 장수 왕분은 위의 도성 대량의 성곽이 견고하여 단기간에 공략하기에는 힘들다고 판단하며,
> 위를 통과하는 운하의 물을 끌어다 대량성으로 부어넣기 시작했다.
> 석 달 동안 전투를 벌이며 이렇게 하자 성곽은 무너지고,
> 위왕 가는 성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 왕분은 항복한 위왕 가의 목을 내렸다.
. 위는 멸망하고, 진은 이 땅에 동군東郡을 세웠다.
3. 초를 멸하다
- 서막
. 기원전 227년, 진왕 정은 왕분에게 군사를 주어 초의 북부를 침공하도록 명령한다.
> 진의 초의 북부 성읍 십여 개를 손에 넣으며 초를 멸한 전쟁의 막을 올렸다.
- 최초의 전투
. 기원전 225년, 진왕 정은 이신李信과 몽무蒙武에게 20만 대군을 준 뒤 군사를 둘로 나누어 초를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 이신은 군사를 이끌고 평여平輿(지금의 허난성 핑위平輿 서북)으로 진공하고,
> 몽무는 군사를 이끌고 침寢(지금의 허난성 구스현固始縣 부근)을 쳐서,
> 이신과 몽무가 이끄는 군사가 모두 초군을 격파했다.
. 이신은 또 언영鄢郢(지금의 후베성 샹양시襄陽市 부근)을 또 깨뜨렸다.
> 이리하여 이신과 몽무의 군사는 다시 동으로 나아가 성보城父(지금이 안후이성 보저우亳州 동남)에서 모였다.
. 초왕은 장군 항연項燕(이 곧 서초패왕 항우項羽의 조부이다)에게 군사를 주어 진군에 맞서게 했다.
> 항연은 군사를 지휘하여 진을 추격하기 밤낮 사흘, 진군이 적을 허술하게 여기며 방비를 소홀히 한 틈을 타서 기습, 진군을 대파하고 초급 장교 일곱을 사살하는 전공을 세움.
> 진의 장군 이신은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한다.
- 평여平輿에서 벌어진 전투
. 진왕 정은 초가 비록 쇠약해졌다고는 하지만 땅 넓고 사람 많아 일정한 힘이 있음을 깨닫고,
> 쉽게 멸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 진왕 정은 친히 빈양頻陽(지금의 산시성陝西省 푸청蒲城 서쪽)으로 왕전을 찾아가서 군사를 이끌고 출정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한다.
> 기원전 224년, 왕전과 몽무는 6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초를 공략한다.
> 초는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장군항연에게 평여에서 진군과 결전을 벌이도록 한다.
> 진왕은 영진郢陳(지금의 허난성 저우커우시周口市 화이양현淮陽縣)에 나와 전투를 독려했다.
> 왕전은 견고한 장벽을 바탕으로 자리를 지키며 결전에 나서지 않고, 출격할 기회를 기다리는 작전을 펼쳤다.
> 초군은 몇 차례나 싸움을 걸었지만 진군은 나서려고 하지 않는 상태가 계속됐다.
> 왕전은 병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먹거리와 잠자리에 신경을 쏟으며 마음을 합치는 데 힘썼다.
> 이와 동시에 왕전은 돌을 멀리 던지는 훈련을 시키며 병사들의 체력과 전투 기능을 높이려고 했다.
. 초는 맞붙기를 바랐지만 날이 갈수록 투지는 해이해지자, 항연은 어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철수했다.
- 결전
. 왕전은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날랜 병사를 가려 뽑아 추격전을 벌여,
> 기蘄(지금의 안후이성 수저우宿州 동남)에서 초군을 크게 이기고,
> 장군 항연의 목을 내렸다.(항연이 죽은 장소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다)
. 진군은 승리를 기세를 몰아 초의 여러 성읍을 공격하여 손에 넣었다.
- 전쟁의 결과
. 기원전 223년, 왕전과 몽무가 이끄는 진군은 초를 세로로 깊숙이 진공하여,
. 일거에 초의 도성 수춘壽春(지금의 안후이성 셔우현壽縣 서남)을 공파하고,
>초왕 부추負芻를 사로잡았다. 초는 이로써 멸망을 고했다.
. 왕전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 강남으로 진군하여 월越의 영토까지 점령했다.
> 진은 초의 땅에 초군楚郡을 세웠으나, 오래지 않아 이를 구강군九江郡과 장하군長河郡, 그리고 회계군會稽郡으로 분할했다.
4. 연을 멸하다
- 전쟁의 배경
. 진이 조의 도성 한단을 깨자, 조의 공자 가嘉는 대代로 몸을 피한다.
> 진군은 이수易水(지금의 허베이성 이현易縣 남쪽)까지 이른다.
> 이렇게 되자 연의 통치 집단은 두려움에 빠진다.
. 이때, 연의 공자 국무鞠武는 서쪽으로 연합하고, 남으로는 제와 초와 동맹을 맺고, 북으로는 흉노와 좋은 관계를 맺어,
> 함께 진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 한편 연의 태자 단丹은 다른 제후국이 모두 진에 복속했다고 판단하고, 합종은 불가능한 일이니 오히려 진왕을 찔러 죽이는 방법을 쓰기로 한다.
> 그리하여 형가荊軻에게 연의 독항督亢의 지도와 진을 등지고 연에 망명한 장군 번오기樊於期의 목을 주어 진왕을 살해할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 형가는 진왕 앞에서 지도를 펼치려는 순간, 지도 속에 감췄던 비수를 꺼내 진왕을 찌르려고 했으니 성공하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고, 그는 몸뚱이가 갈가리 찢기며 죽음을 맞는다.
- 전쟁의 흐름
. 진왕 정은 왕전과 신승辛勝에게 군사를 주어 대거 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 이수 서쪽에서 진군은 연과 대의 연합군을 크게 이긴다.
. 기원전 226년, 진군을 병력을 증파하고, 왕전은 군사를 이끌고 일거에 연의 도성 계薊(지금의 베이징北京 서남)을 공파한다.
> 연왕 희喜와 태자 단은 가족과 금위군을 데리고 요동(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遼陽)으로 도망했다.
> 장군 이신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힘껏 추격하여 연수衍水(지금의 랴오닝성 훈허渾河)에 이르러 태자 단이 거느린 군대를 깨뜨리고, 연의 근위군의 주력까지 섬멸했다.
> 연은 태자 단까지 죽이고 진을 향해 강화를 요청했지만, 진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 전쟁의 결과
. 기원전 223년, 초와 위를 멸한 진왕 정은 왕분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까지 진군토록 했다.
> 연왕 희는 포로로 잡히고, 연은 결국 멸망했다.
. 진은 손에 넣은 연 땅에 어양군漁陽郡, 우북평군右北平郡, 요서군遙西郡, 그리고 요동군遙東郡 등을 설치했다.
5. 제를 멸하다
- 전쟁의 경과
. 제는 기원전 283년, 제서濟西에서 벌어진 전쟁으로부터 연의 군대에게 큰 상처를 입은 이래, 나라의 힘을 줄곧 회복하지 못했다.
. 제의 군주는 자신의 눈앞 이익을 위하여 진에 대한 우호 정책을 견지하며 다른 제후국이 진에 맞서는 데 힘을 보태지 않았다.
> 게다가 제의 승상 후승后勝은 진이 보낸 뇌물에 매수되어, 진과 연맹하는 환상에 젖으며, 아예 다른 제후국과 합종하여 진에 맞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의 전쟁 준비에도 마음을 두지 않았다.
> 여기에 더하여 제의 군주는 후승의 주장에 좇기만 할 뿐이었다.
. 진이 다섯 나라를 멸한 뒤에야 비로서 진의 위협을 느낀 제의 군주는 황망히 군대를 서쪽에 집결시키며 진군의 진공에 대비한다.
> 진의 군주 정은 제가 진의 사신 방문을 거절했다는 이유를 들어 제의 서부 주력 부대를 피하여,
> 연의 남부(지금의 허베이성 북부)를 통하여 남하하여 제의 도성 임치를 공격하도록 왕분에게 명령했다.
. 제군은 아예 사기가 저하된 데다 진군이 돌연 북쪽에서 공격해오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댈 뿐이었다.
> 그대로 궤멸된 제군은 진군이 임치를 공략하여 점령하자 그대로 와해되고 말았다.
. 제왕 건建은 포로로 잡히고 제는 멸망을 고했다.
. 진왕은 이곳에 제군齊郡과 낭야군琅邪郡을 설치했다.
>>>진이 관동육국을 멸한 전쟁에 대한 평가
-진왕 정(영정嬴政 또는 조정趙政이라고도 한다)은 채 스무 해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여섯 제후국을 멸하고,
> 춘추시대 이래 550년에 걸친 전란의 시대를 끝내며,
>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중앙집권적 봉건 제국을 세웠다.
> 이 대제국은 중국 봉건사회 정치제도에 한 획을 긋는 시대적 의의를 가지며,
> 중국 역사의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
> 이리하여 중국 고대 사회는 한 걸음 성큼 미래를 향해 내닫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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