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춘추시대 초기의 지도를 잘 살펴보자.
1. 수갈지전繻葛之戰
- 기원전 707년에 정鄭이 수갈繻葛(지금의 허난성 창거시長葛市 북쪽)에서 주왕실의 연합군을 크게 물리친 전쟁.
- 주평왕周平王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주환왕周桓王은 제후국 정鄭에 대하여 강경정책을 실시.
- 정의 장공莊公이 이에 반기를 들며 주왕을 다시는 알현하지 않자,
- 주환왕은 채蔡, 진陳, 위衛(卫) 등 제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정을 공격.
- 정의 군사가 쏜 화살이 주환왕의 어깨에 명중 - 주왕의 군대는 크게 패함.
> 이 전쟁으로 주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며 쇠락하기 시작하지만,
> 제후국은 세력을 크게 불리며 패권을 다투기 시작.
-정장공이 승리한 원인
> 진공 방향의 정확한 선택-주왕실 연합군의 취약점을 면밀히 파악한 결과.
> 전차와 보병의 능률적인 배합으로 전술을 정확하게 운용.
> 멈춤과 진격을 때맞춰 구사.
*쌍방 병사와 사상자 숫자는 분명치 않음.
2. 장작지전長勺之戰
- 기원전 684년, 노魯와 제齊, 이 두 제후국이 장작長勺(지금의 산둥성 라이우시萊蕪市 동북쪽)에서 맞붙은 전쟁.
- 주장왕周莊王 14년, 노장공魯莊公 10년, 제환공齊桓公 2년.
- 전쟁 직전의 흐름
> 먼저 제나라 내부의 혼란 끝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환공의 노나라에 대한 원한이 컸음.
> 제양공齊襄公을 시해하고 자리에 오른 공손무기公孫無知가 한 해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시해당하자,
> 거莒에 피신하고 있던 공자 소백小白과 노魯에 피신하고 있던 공자 규糾가 서로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려고 바삐 귀국길에 오른다.
> 이때, 공자 소백은 포숙아鮑叔兒의 호송을 받으며 급히 돌아오다가,
> 중간에 공자 규 편에 섰던 관중管仲이 쏜 화살이 다행히 요대腰帶를 맞추어 위기를 넘기며 군주의 자리에 오르니,
> 이 곧 제환공이다.
> 관중은 그대로 노나라로 달려가서 피신하니, 제나라와 노나라의 관계는 사뭇 긴장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 새로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른 제환공 소백은 일찍이 노나라가 공자 규를 지지했기에 불만 가득했고,
> 노장공은 자기가 지지하던 공자 규가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에 제나라를 적대시함.
> 노장공은 대군을 이끌고 공자 규를 강제로 제나라로 송환하려고 했으나,
> 국경 가까이 다다른 이들을 제환공은 병력을 동원하여 물리치기로 결정.
- 전쟁의 경과 1.
> 양국이 각각 장작에 병거 5백 량을 투입하며 전투에 돌입.
> 제나라 군대가 일거에 노나라 우군을 격파한 뒤,
> 노나라 장군이 직접 이끄는 중군을 포위함.
> 노장공은 전략을 일시에 바꾸어 공자 규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관중을 제나라로 압송함.
- 전쟁의 경과 2.
> 노장공은 온 힘을 모아 제나라를 다시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명장 조귀曹刿를 등용.
> 포숙아가 이끄는 제나라 군대가 몇 차례나 공격했지만,
> 조귀가 이끄는 노나라 군대는 진지를 굳게 지키며 출격하지 않았고,
> 위세를 올리며 달려드는 포숙아의 세 번째 공격을 앞의 두 차례 공격보다 기세가 못함을 꿰뚫은 명장 조귀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 포숙아의 제나라 군대는 깨어지며 패퇴함으로써,
> 노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
> 제나라 군사 사상자 1천 명.
- 장작지전에 대한 분석
> 제후국 사이에 맞붙은 첫 번째 전쟁으로,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다.
> 정략과 전략, 그리고 책략이 함께한 전쟁이었다.
> 노나라 장군 조귀가 <조귀논전曹刿論戰>에서 이른 '후발제인後發制人'은 뒷날에도 방어전략의 귀중한 거울이 됨.
* 후발제인 : 일보 물러나 있다가 뒤에 손을 써서 적을 제압함/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려 적을 제압함.
3. 홍수지전泓水之戰
-개요
> 기원전 638년, 송宋 나라와 초楚 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두고 맞선 전쟁.
> 싸움터는 홍수泓水(지금의 허난성 저청현柘城縣 북쪽 30리 지점).
> 초나라는 우세한 병력과 왕성한 사기, 게다가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송나라를 무릎 꿇리며 승리.
> 이 전쟁 후 초나라의 세력을 황하 북쪽까지 이르며 성복지전城濮之戰이 일어난 기원전 632년까지 막아설 제후국이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유지함.
. 이와는 달리 송나라는 일류 국가에서 이류 국가로 전락하며 이 시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함.
- 전쟁의 배경
> 기원전 643년(주양왕周襄王 9년), 이 시대 첫 번째 패자 제환공이 세상을 떠난 뒤, 제나라에서는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으로 내란이 발생.
> 이듬해, 송양공宋襄公은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제효공齊孝公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도록 협조함.
> 이와 동시에 초성공楚成公은 제나라가 혼란한 틈을 중원을 제패할 기회로 삼아 자기 세력을 침투시킴.
> 그러자 송양공은 자기 국력이 초성공보다 못함을 돌보지 않고 맞섬.
- 홍수지전에 대한 분석
> 전쟁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전쟁을 하더라도 '예禮' 와 '의儀'에 어긋하는 병력 운용은 하지 않는다는 이제까지의 원칙이 허물어지고,
> '속이기'와 '기이한 모략'을 위주로 하는 작전 방식이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 중국 고대 전쟁사에서 자못 큰 의의를 가진 전쟁이었음.
> 송양공이 병력으로는 초성공에 비하여 열세였지만, 홍수의 험난함을 이용하여 기선을 잡았더라면
> 적은 병력으로 초나라의 큰 병력을 패퇴시킬 수 있었지만,
> 송양공은 초나라 군대가 홍수 중간쯤 왔을 때, 진격하여 물리치자는 부하의 건의에 귀기울이지 않았음.
> 마오저둥毛澤東은 이런 송양공을 가리켜 '어리석은 돼지나 가져야 할 인의仁義'라고 했음.
4. 성복지전城濮之戰
- 개요
> 기원전 632년 4월, 진晉과 초楚, 두 나라가 위衛의 성복城濮(지금의 산동성 쥐안청현鄄城縣 서남)에서 맞붙은 전쟁.
> 이 전쟁도 앞의 홍수지전과 마찬가지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데서 비롯됨.
> 진晉의 공자 중이重耳가 열아홉 해 동안 나라 밖으로 떠돌다가 문공文公으로 자리에 오르면서 밖을 향해 발전하자,
> 지금까지 세력을 떨치던 초楚와 자연스럽게 갈등을 유발함.
> 전쟁은 진의 승리, 초의 패배로 끝남.
> 진문공이 이 시대 패주가 되어 천토踐土(지금의 허난성 경내)에서 회맹(참가국...진晉, 노魯, 제齊, 송宋, 채蔡, 정鄭, 위衛 등)...진이 맹주로 추대됨.
- 전쟁 중 주요 지휘관 및 병력
> 진 쪽...선진先軫, 조최趙衰, 서신胥臣 등, 병력은 4만 2천여 명.
> 초 쪽...성득신成得臣, 두월초斗越椒, 두발斗勃 등, 병력은 3만 1천 5백여 명.
- 전쟁의 결과
> 진의 대승으로 진문공 춘추시대 패주로 등장...중원의 여러 제후국이 진을 향해 머리를 조아림.
> 북진하던 초의 서슬이 꺾임.,,동백산桐栢産, 대별산大別山 이남으로 물러남.
> 초의 대장 자옥子玉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
5. 진진효지전秦晉崤之戰
- 개요
> 기원전 627년, 춘추시대 패권을 두고 진秦과 진晉이 효산崤山(지금의 허난성 뤄닝현洛寧縣 북쪽)에서 벌인 전쟁.
> 진목공秦穆公이 정鄭을 기습...진지 구축 뒤 회군,
> 진양공晉襄公, 군사를 이끌고 효산 기슭 좁은 도로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 회군하는 진秦의 군사를 섬멸하고 장수 셋을 포로로 잡음...진의 군사 3만여 명 전멸.
> 진秦의 중원을 향한 동진 정책이 진晉에 의해 저지됨.
> 진목공은 어쩔 수 없이 서쪽을 향해 용병用兵.
> 두 나라는 우호적인 관계에서 대대로 원수 관계로 변함.
6. 필지전邲之戰(달리 '양당지전兩棠之戰'이라고도 함)
- 개요
> 기원전 597년, 이 시대 최강의 두 제후국, 곧 진晉과 초楚가 중원을 제패하기 위하여 벌인 회전會戰.
> 초장왕楚莊王,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정鄭을 포위 공격하자,
> 진晉은 순림보荀林父에게 군사를 주어 정을 구하기 위한 작전을 펼침.
> 두 진영, 필邲(지금의 허난성 정저우鄭州 북쪽)에서 쟁탈전 전개.
> 작전 중, 진의 내부 분열---지휘관들 사이의 불화,
> 초는 진의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전격 출격하여 승리를 움켜쥠...두 진영의 사상자 숫자는 불명확.
> 3십여 년 전, '성복지전'에서의 치욕적인 패배를 설욕하고,
> 중원 패권 다툼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함.
> 초장왕, 이 전쟁의 승리로 일거에 '춘추오패'의 지위에 오름.
- 전쟁의 결과
> 초의 승리, 진의 패배, 정은 자연스레 초에 굴복.
> 초장왕, 중원을 모두 제압하기 위하여, 기원전 595년, 송宋으로 진격하여,
> 아홉 달 동안 겹겹이 포위하자 곤경에 빠진 송에서는 '역자이식易子而食', 곧 자식을 남의 자식과 바꾸어 먹는 지경에 이름.
> 이듬해, 송이 초에 항복하자, 노魯도 어쩔 수 없이 초장왕에게 복속함.
> 초는 이와 함께 제齊와 우호관계를 맺음.
> 초는 일시에 중원을 완전히 장악함...중원의 패권을 쥐려는 초장왕의 꿈이 이루어짐.
* 이제 춘추 중기를 지난 시대의 형세도를 잘 살펴보자.
7. 안지전鞍之戰
- 개요
> 기원전 589년, 진晉과 제齊가 안鞍(지금의 산둥성 지난濟南 부근)에서 패권을 두고 맞붙은 전쟁.
> 춘추 중기, 진의 패권이 점차 쇠해지자, 진과 맞서던 제가 진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임.
> 이즈음 자리에 오른 제의 군주 경공頃公은 제의 힘을 떨치기 위하여 고심함.
> 이때, 진은 각극卻克을 제에 사신을 보내는데, 제경공의 모친과 부인, 그리고 궁녀들이 장막 안에서 다리를 저는 각극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림으로써 각극을 수치스럽게 만듦.
> 마침 이 해에 노魯와 위衛(위 지도 상에는 간체자 '卫'로 표시됨)가 제의 침공에 시달리던 중 진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함.
> 진의 패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꿈꾸던 진경공晉景公은 각극을 원수로 삼아 병거 8백 량을 주어,
> 노魯, 위衛, 조曹, 그리고 적인狄人의 군대와 연합하여 제를 공격케 함.
> 이들은 바로 안鞍에서 결전을 벌임.
- 전쟁의 경과 > 전선의 앞에 나선 제경공은 교만하게도, '짐이 먼저 진군을 섬멸한 뒤 아침밥을 먹으리라.'고 호언하며 앞으로 나섬. > 제경공의 부하 방추보逄丑父는 자못 용맹하여 전투 개시 후 곧장 진의 장수 각극에게 부상을 입힘. > 각극은 부상을 입고도 군사를 지휘하여 용기를 얻은 진의 군사는 제를 대파함. > 이 과정에서 제경공은 진의 장수 한궐韓厥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도주하는 일이 발생함. > 제경공은 어쩔 수 없이 진에 강화를 요청...이미 점령했던 노와 위의 영토를 되돌려줌.
> 제는 대량의 재물을 바쳤지만, 각극은 자신의 절름발을 비웃었던 제경공의 모친 소동숙자萧桐叔子를 인질로 내놓을 것을 요구함.
> 제가 이 요구를 끝내 받지 않자, 진은 결국 양보함.
> '필지전' 이후 쇠퇴하던 진의 패주로서의 지위를 다시 획득하고,
> 제는 진을 대신하여 패주가 되려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음.
* 사마천의 <사기>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와 '진세가晉世家'에 이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전개됨.
8. 마수지전麻隧之戰
-개요
> 기원전 578년, 진晉과 진秦이 패권을 두고 다투는 과정에, 진晉을 머리로 한 제후 연합군이 진秦 땅 마수麻隧(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징양현涇陽縣 북쪽)에서 진秦을 격파한 전투.
> 참전국...진晉, 주周, 제齊, 송宋, 위衛, 노魯, 정鄭, 조 曹, 주邾, 등滕, 진秦 등.
> 병력---연합군 약 12만 명, 진군秦軍 약 5,6만 명.
> 사상자 숫자...불명.
> 결과...연합군 승리, 진秦 패배.
-전쟁의 결과와 영향
> 진秦은 오랫동안 떨쳐일어나지 못하고 진晉의 서쪽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지 못함.
> 진秦과 적狄, 그리고 제齊, 이 세 나라는 진晉에 복속하고
> 중원의 여러 제후군은 진晉의 속국이 됨.
9. 언릉지전鄢陵之戰
- 개요
> 기원전 575년, 진晉과 초楚가 중원의 패권을 두고 언릉鄢陵(지금의 허난성 옌링현鄢陵縣)에서 벌인 전쟁.
> 참전 병력과 사상자 숫자는 모두 불명.
> 진의 승리, 패배한 초의 군대 철수.
> 양쪽 장수...진여공晉厲公, 초공왕楚共王
- 전쟁의 결과와 영향
> 언릉지전은 진晉과 초楚가 패주의 자리를 놓고 벌인 '성복지전'과 '필지전' 뒤 세 번째로 벌인 회전會戰.
> 이 세 번째 전투 뒤, 초는 중원을 향한 쟁패를 두고 쇠퇴하기 시작.
> 진은 비록 이 전쟁으로 패업을 이루긴 했지만 중원의 여러 제후국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약화됨.
> 주요 지휘관...오의 공자 광光(이 뒤, 오의 군주 자리를 차지한 합려闔閭), 위월薳越 등.
11. 월멸오지전越滅吳之戰
...개요
- 기원전 510년 ~ 기원전 475년에 걸쳐 양자강 하류에 위치한 두 제후국, 오吳와 월越이 패권을 차기하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벌인 전쟁.
>오가 월을 침으로써 벌어진 '추리지전槜李之戰', 월이 오를 침으로써 벌어진 '부초지전夫椒之戰', 그리고 '입택지전笠澤之戰'과 '고소포위전姑蘇圍困戰' 등이 잇달았으며,
- 결국은 오왕 부차夫差가 자살함으로써 오는 멸망하고,
- 월왕 구천勾踐이 승리하여 춘추시대 마지막 패자가 됨
- 주요 지휘관...부차, 구천
- 주요 전투 지점...양자강 삼각주
...추리지전槜李之戰
- 기원전 496년 5월, 월왕 윤상允常이 세상을 떠나자,
- 오왕 합려는 여러 해 동안 쌓인 원한을 풀기 위해 월왕 윤상의 장례 기간을 틈타 군사를 일으켜 월을 침공.
- 윤상을 이어 자리에 오른 월왕 구천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방어함.
- 추리(지금의 저장성 자싱嘉興 서쪽)에서 전투를 벌임.
- 부초산에서 월의 군대를 격멸,
>월은 오에 굴복하고, 월왕 구천은 포로로 잡혀 오왕을 세 해 동안 받들어 모심.
> 이 전쟁으로 오는 패업을 이루지만 ,
> 부차는 그만 소인의 말을 믿으며 구천을 석방하고 월과 친밀한 관계를 가짐.
> 그 뒤, 오는 군사를 이끌고 제를 쳐서 크게 이김.
- 그러나 이는 오의 멸망을 앞당기는 화근이 됨.
12. 백거지전柏擧之戰
- 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초 나라 깊숙이 들어가서,
- 백거(지금의 후베이성 마청시麻城市 경내)에서 초의 군사 20만을 격파한 전쟁.
- 전쟁의 결과
. 오군은 초의 도성 영郢(지금의 후베이성 장링江陵 부근)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을 일삼음.
> 초나라 사람들에게 원함을 남김.
. 오자서伍子胥,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주검에 3백 대의 매질을 가함.
. 이로써 초는 원기에 크게 상처를 입고 다시는 크게 일어서지 못함.
13. 진양지전晉陽之戰
.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53년, 진晉의 명문대가 지씨智氏,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 사이에 벌어진 성읍 공수전.
. 이 전쟁 뒤, 중국 역사는 춘추시대를 끝내고 더 이상 도道와 의義를 중시하지 않는 시대, 곧 전국시대로 들어섬.
. 전쟁의 개략
> 조, 한, 위, 이 세 집안이 연합하여 손을 맞잡고 함께 지백씨智伯氏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 그 땅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차지한 뒤 전쟁을 끝냄.
> 이 '삼가분진三家分晉'으로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듦. ... . 전국시대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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