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 이야기

지도와 함께하는 춘추시대 전쟁 13 장면

촛불횃불 2021. 12. 22. 20:40

*먼저 춘추시대 초기의 지도를 잘 살펴보자.

 

1. 수갈지전繻葛之戰

 - 기원전 707년에 정鄭이 수갈繻葛(지금의 허난성 창거시長葛市 북쪽)에서 주왕실의 연합군을 크게 물리친 전쟁.

 - 주평왕周平王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주환왕周桓王은 제후국 정鄭에 대하여 강경정책을 실시.

 - 정의 장공莊公이 이에 반기를 들며 주왕을 다시는 알현하지 않자,

 - 주환왕은 채蔡, 진陳, 위衛(卫) 등 제후국의 군대와 연합하여 정을 공격.

 

수갈지전 안내도

 - 정의 군사가 쏜 화살이 주환왕의 어깨에 명중 - 주왕의 군대는 크게 패함.

  > 이 전쟁으로 주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며 쇠락하기 시작하지만,

  > 제후국은 세력을 크게 불리며 패권을 다투기 시작.

 -정장공이 승리한 원인

  > 진공 방향의 정확한 선택-주왕실 연합군의 취약점을 면밀히 파악한 결과.

  > 전차와 보병의 능률적인 배합으로 전술을 정확하게 운용.

  > 멈춤과 진격을 때맞춰 구사.

 *쌍방 병사와 사상자 숫자는 분명치 않음.

 

2. 장작지전長勺之戰

 - 기원전 684년, 노魯와 제齊, 이 두 제후국이 장작長勺(지금의 산둥성 라이우시萊蕪市 동북쪽)에서 맞붙은 전쟁. 

 - 주장왕周莊王 14년, 노장공魯莊公 10년, 제환공齊桓公 2년.

 

장작지전 안내도

 - 전쟁 직전의 흐름

  > 먼저 제나라 내부의 혼란 끝에 군주의 자리에 오른 환공의 노나라에 대한 원한이 컸음.

  > 제양공齊襄公을 시해하고 자리에 오른 공손무기公孫無知가 한 해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시해당하자,

  > 거莒에 피신하고 있던 공자 소백小白과 노魯에 피신하고 있던 공자 규糾가 서로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려고 바삐 귀국길에 오른다.

  > 이때, 공자 소백은 포숙아鮑叔兒의 호송을 받으며 급히 돌아오다가,

  > 중간에 공자 규 편에 섰던 관중管仲이 쏜 화살이 다행히 요대腰帶를 맞추어 위기를 넘기며 군주의 자리에 오르니,

  > 이 곧 제환공이다.

  > 관중은 그대로 노나라로 달려가서 피신하니, 제나라와 노나라의 관계는 사뭇 긴장 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 새로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른 제환공 소백은 일찍이 노나라가 공자 규를 지지했기에 불만 가득했고,

  > 노장공은 자기가 지지하던 공자 규가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기에 제나라를 적대시함.

  > 노장공은 대군을 이끌고 공자 규를 강제로 제나라로 송환하려고 했으나,

  > 국경 가까이 다다른 이들을 제환공은 병력을 동원하여 물리치기로 결정. 

 

 - 전쟁의 경과 1.

  > 양국이 각각 장작에 병거 5백 량을 투입하며 전투에 돌입.

  > 제나라 군대가 일거에 노나라 우군을 격파한 뒤, 

  > 노나라 장군이 직접 이끄는 중군을 포위함.

  > 노장공은 전략을 일시에 바꾸어 공자 규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관중을 제나라로 압송함.

 

- 전쟁의 경과 2.

 > 노장공은 온 힘을 모아 제나라를 다시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명장 조귀曹刿를 등용.

 > 포숙아가 이끄는 제나라 군대가 몇 차례나 공격했지만,

 > 조귀가 이끄는 노나라 군대는 진지를 굳게 지키며 출격하지 않았고,

 > 위세를 올리며 달려드는 포숙아의 세 번째 공격을 앞의 두 차례 공격보다 기세가 못함을 꿰뚫은 명장 조귀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 포숙아의 제나라 군대는 깨어지며 패퇴함으로써,

 > 노나라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

 > 제나라 군사 사상자 1천 명.

 

- 장작지전에 대한 분석

 > 제후국 사이에 맞붙은 첫 번째 전쟁으로, 규모는 별로 크지 않았다.

 > 정략과 전략, 그리고 책략이 함께한 전쟁이었다.

 > 노나라 장군 조귀가 <조귀논전曹刿論戰>에서 이른 '후발제인後發制人'은 뒷날에도 방어전략의 귀중한 거울이 됨.

   * 후발제인 : 일보 물러나 있다가 뒤에 손을 써서 적을 제압함/상대가 먼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려 적을 제압함.

 

3. 홍수지전泓水之戰

 -개요 

  > 기원전 638년, 송宋 나라와 초楚 나라가 중원의 패권을 두고 맞선 전쟁.

  > 싸움터는 홍수泓水(지금의 허난성 저청현柘城縣 북쪽 30리 지점).

 

홍수지전 안내도

  > 초나라는 우세한 병력과 왕성한 사기, 게다가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바탕으로 송나라를 무릎 꿇리며 승리.

  > 이 전쟁 후 초나라의 세력을 황하 북쪽까지 이르며 성복지전城濮之戰이 일어난 기원전 632년까지 막아설 제후국이 없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유지함.

  . 이와는 달리 송나라는 일류 국가에서 이류 국가로 전락하며 이 시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 못함.

 

 - 전쟁의 배경

  > 기원전 643년(주양왕周襄王 9년), 이 시대 첫 번째 패자 제환공이 세상을 떠난 뒤, 제나라에서는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으로 내란이 발생.

  > 이듬해, 송양공宋襄公은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제효공齊孝公이 군주의 자리에 오르도록 협조함.

  > 이와 동시에 초성공楚成公은 제나라가 혼란한 틈을 중원을 제패할 기회로 삼아 자기 세력을 침투시킴.

  > 그러자 송양공은 자기 국력이 초성공보다 못함을 돌보지 않고 맞섬. 

 

 - 홍수지전에 대한 분석

  > 전쟁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전쟁을 하더라도 '예禮' 와 '의儀'에 어긋하는 병력 운용은 하지 않는다는 이제까지의 원칙이 허물어지고,

  > '속이기'와 '기이한 모략'을 위주로 하는 작전 방식이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 중국 고대 전쟁사에서 자못 큰 의의를 가진 전쟁이었음.

  > 송양공이 병력으로는 초성공에 비하여 열세였지만, 홍수의 험난함을 이용하여 기선을 잡았더라면 

  > 적은 병력으로 초나라의 큰 병력을 패퇴시킬 수 있었지만, 

  > 송양공은 초나라 군대가 홍수 중간쯤 왔을 때, 진격하여 물리치자는 부하의 건의에 귀기울이지 않았음. 

  > 마오저둥毛澤東은 이런 송양공을 가리켜 '어리석은 돼지나 가져야 할 인의仁義'라고 했음. 

 

4. 성복지전城濮之戰

 - 개요

  > 기원전 632년 4월, 진晉과 초楚, 두 나라가 위衛의 성복城濮(지금의 산동성 쥐안청현鄄城縣 서남)에서 맞붙은 전쟁.

  > 이 전쟁도 앞의 홍수지전과 마찬가지로 중원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데서 비롯됨.

  > 진晉의 공자 중이重耳가 열아홉 해 동안 나라 밖으로 떠돌다가 문공文公으로 자리에 오르면서 밖을 향해 발전하자,

  > 지금까지 세력을 떨치던 초楚와 자연스럽게 갈등을 유발함.

  > 전쟁은 진의 승리, 초의 패배로 끝남.

  > 진문공이 이 시대 패주가 되어 천토踐土(지금의 허난성 경내)에서 회맹(참가국...진晉, 노魯, 제齊, 송宋, 채蔡, 정鄭, 위衛 등)...진이 맹주로 추대됨.  

 

성복지전 안내도

 - 전쟁 중 주요 지휘관 및 병력

  > 진 쪽...선진先軫, 조최趙衰, 서신胥臣 등, 병력은 4만 2천여 명.

  > 초 쪽...성득신成得臣, 두월초斗越椒, 두발斗勃 등, 병력은 3만 1천 5백여 명.

 

 - 전쟁의 결과

  > 진의 대승으로 진문공 춘추시대 패주로 등장...중원의 여러 제후국이 진을 향해 머리를 조아림.

  > 북진하던 초의 서슬이 꺾임.,,동백산桐栢産, 대별산大別山 이남으로 물러남.

  > 초의 대장 자옥子玉은 스스로 목숨을 끊음.

 

5. 진진효지전秦晉崤之戰

 - 개요

  > 기원전 627년, 춘추시대 패권을 두고 진秦과 진晉이 효산崤山(지금의 허난성 뤄닝현洛寧縣 북쪽)에서 벌인 전쟁.

  > 진목공秦穆公이 정鄭을 기습...진지 구축 뒤 회군,

  > 진양공晉襄公, 군사를 이끌고 효산 기슭 좁은 도로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 회군하는 진秦의 군사를 섬멸하고 장수 셋을 포로로 잡음...진의 군사 3만여 명 전멸.

  > 진秦의 중원을 향한 동진 정책이 진晉에 의해 저지됨.

  > 진목공은 어쩔 수 없이 서쪽을 향해 용병用兵.

  > 두 나라는 우호적인 관계에서 대대로 원수 관계로 변함.

 

진秦과 진晉이 효산崤山에서 벌인 전쟁 안내도

 

 6. 필지전邲之戰(달리 '양당지전兩棠之戰'이라고도 함)

  - 개요

   > 기원전 597년, 이 시대 최강의 두 제후국, 곧 진晉과 초楚가 중원을 제패하기 위하여 벌인 회전會戰.

   > 초장왕楚莊王, 친히 군사를 이끌고 정鄭을 포위 공격하자,

   > 진晉은 순림보荀林父에게 군사를 주어 정을 구하기 위한 작전을 펼침.

   > 두 진영, 필邲(지금의 허난성 정저우鄭州 북쪽)에서 쟁탈전 전개.

   > 작전 중, 진의 내부 분열---지휘관들 사이의 불화,

   > 초는 진의 이런 약점을 이용하여 전격 출격하여 승리를 움켜쥠...두 진영의 사상자 숫자는 불명확.

   > 3십여 년 전, '성복지전'에서의 치욕적인 패배를 설욕하고,

   > 중원 패권 다툼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함.

   > 초장왕, 이 전쟁의 승리로 일거에 '춘추오패'의 지위에 오름.

 

춘추시대 여러 제후국의 형세도(중원 부분)

 

 - 전쟁의 결과

  > 초의 승리, 진의 패배, 정은 자연스레 초에 굴복.

  > 초장왕, 중원을 모두 제압하기 위하여, 기원전 595년, 송宋으로 진격하여, 

  > 아홉 달 동안 겹겹이 포위하자 곤경에 빠진 송에서는 '역자이식易子而食', 곧 자식을 남의 자식과 바꾸어 먹는 지경에 이름.

  > 이듬해, 송이 초에 항복하자, 노魯도 어쩔 수 없이 초장왕에게 복속함.

  > 초는 이와 함께 제齊와 우호관계를 맺음.

  > 초는 일시에 중원을 완전히 장악함...중원의 패권을 쥐려는 초장왕의 꿈이 이루어짐.

* 이제 춘추 중기를 지난 시대의 형세도를 잘 살펴보자.

 

 

춘추 중후기 형세도

 

7. 안지전鞍之戰

 - 개요

  > 기원전 589년, 진晉과 제齊가 안鞍(지금의 산둥성 지난濟南 부근)에서 패권을 두고 맞붙은 전쟁.

  > 춘추 중기, 진의 패권이 점차 쇠해지자, 진과 맞서던 제가 진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임.

  > 이즈음 자리에 오른 제의 군주 경공頃公은 제의 힘을 떨치기 위하여 고심함.

  > 이때, 진은 각극卻克을 제에 사신을 보내는데, 제경공의 모친과 부인, 그리고 궁녀들이 장막 안에서 다리를 저는 각극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림으로써 각극을 수치스럽게 만듦.

  > 마침 이 해에 노魯와 위衛(위 지도 상에는 간체자 ''로 표시됨)가 제의 침공에 시달리던 중 진에 군사적 도움을 요청함.

  > 진의 패업을 다시 일으키려고 꿈꾸던 진경공晉景公은 각극을 원수로 삼아 병거 8백 량을 주어,

  > 노魯, 위衛, 조曹, 그리고 적인狄人의 군대와 연합하여 제를 공격케 함.

  > 이들은 바로 안鞍에서 결전을 벌임.

안지전 안내도

 

 - 전쟁의 경과  > 전선의 앞에 나선 제경공은 교만하게도, '짐이 먼저 진군을 섬멸한 뒤 아침밥을 먹으리라.'고 호언하며 앞으로 나섬.  > 제경공의 부하 방추보逄丑父는 자못 용맹하여 전투 개시 후 곧장 진의 장수 각극에게 부상을 입힘.  > 각극은 부상을 입고도 군사를 지휘하여 용기를 얻은 진의 군사는 제를 대파함.  > 이 과정에서 제경공은 진의 장수 한궐韓厥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도주하는 일이 발생함.  > 제경공은 어쩔 수 없이 진에 강화를 요청...이미 점령했던 노와 위의 영토를 되돌려줌.

  > 제는 대량의 재물을 바쳤지만, 각극은 자신의 절름발을 비웃었던 제경공의 모친 소동숙자萧桐叔子를 인질로 내놓을 것을 요구함.

  > 제가 이 요구를 끝내 받지 않자, 진은 결국 양보함.

  > '필지전' 이후 쇠퇴하던 진의 패주로서의 지위를 다시 획득하고, 

  > 제는 진을 대신하여 패주가 되려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음.

  * 사마천의 <사기>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와 '진세가晉世家'에 이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게 전개됨.

 

8. 마수지전麻隧之戰

 -개요

  > 기원전 578년, 진晉과 진秦이 패권을 두고 다투는 과정에, 진晉을 머리로 한 제후 연합군이 진秦 땅 마수麻隧(지금의 산시성陝西省 징양현涇陽縣 북쪽)에서 진秦을 격파한 전투.

  > 참전국...진晉, 주周, 제齊, 송宋, 위衛, 노魯, 정鄭, 조 曹, 주邾, 등滕, 진秦 등.

  > 병력---연합군 약 12만 명, 진군秦軍 약 5,6만 명.

  > 사상자 숫자...불명.

  > 결과...연합군 승리, 진秦 패배.

 -전쟁의 결과와 영향

  > 진秦은 오랫동안 떨쳐일어나지 못하고 진晉의 서쪽을 위협하는 세력이 되지 못함.

  > 진秦과 적狄, 그리고 제齊, 이 세 나라는 진晉에 복속하고

  > 중원의 여러 제후군은 진晉의 속국이 됨.

  

9. 언릉지전鄢陵之戰

 - 개요

  > 기원전 575년, 진晉과 초楚가 중원의 패권을 두고 언릉鄢陵(지금의 허난성 옌링현鄢陵縣)에서 벌인 전쟁.

  > 참전 병력과 사상자 숫자는 모두 불명.

  > 진의 승리, 패배한 초의 군대 철수.

  > 양쪽 장수...진여공晉厲公, 초공왕楚共王

 

언릉지전 안내도

 - 전쟁의 결과와 영향

  > 언릉지전은 진晉과 초楚가 패주의 자리를 놓고 벌인 '성복지전'과 '필지전' 뒤 세 번째로 벌인 회전會戰.

  > 이 세 번째 전투 뒤, 초는 중원을 향한 쟁패를 두고 쇠퇴하기 시작.

  > 진은 비록 이 전쟁으로 패업을 이루긴 했지만 중원의 여러 제후국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약화됨.

10. 계보지전鷄父之戰
 -개요
  > 기원전 519년 여름, 오吳와 초楚의 패권을 둔 전쟁 중, 오가 회하 유역의 전략적 요충지 주래州來(지금의 안후이성 펑타이현鳳台顯)을 쟁취하기 위하여 
  > 오가 초楚, 돈頓, 호胡, 심沈, 채蔡, 진陳, 허許 등 일곱 제후국의 연합군을 계보(지금의 허난성 구스현固始縣 동남)에서 대파한 전쟁.
  > 이 전쟁 뒤, 초는 전략상 수세에 몰림.
 
계보지전 안내도

   > 주요 지휘관...오의 공자 광光(이 뒤, 오의 군주 자리를 차지한 합려闔閭), 위월薳越 등.

11. 월멸오지전越滅吳之戰

...개요 

- 기원전 510년 ~ 기원전 475년에 걸쳐 양자강 하류에 위치한 두 제후국, 오吳와 월越이 패권을 차기하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벌인 전쟁.

  >오가 월을 침으로써 벌어진 '추리지전槜李之戰', 월이 오를 침으로써 벌어진 '부초지전夫椒之戰', 그리고 '입택지전笠澤之戰'과 '고소포위전姑蘇圍困戰' 등이 잇달았으며,

 - 결국은 오왕 부차夫差가 자살함으로써 오는 멸망하고,

 - 월왕 구천勾踐이 승리하여 춘추시대 마지막 패자가 됨 

 - 주요 지휘관...부차, 구천

 - 주요 전투 지점...양자강 삼각주

 

춘추시대 오와 월 형세도

 

...추리지전槜李之戰

 - 기원전 496년 5월, 월왕 윤상允常이 세상을 떠나자,

 - 오왕 합려는 여러 해 동안 쌓인 원한을 풀기 위해 월왕 윤상의 장례 기간을 틈타 군사를 일으켜 월을 침공.

 - 윤상을 이어 자리에 오른 월왕 구천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서 방어함.

 - 추리(지금의 저장성 자싱嘉興 서쪽)에서 전투를 벌임. 

 - 월의 대부 영고부靈姑浮가 휘두른 창날에 발을 크게 다친 오왕 합려는 패퇴하는 도중에 사망.
   >아들 부차에게 '결코 월을 잊어서는 안 된다'(必毋忘越)는 유언을 남김. 
 
...부초지전夫椒之戰
 - 기원전 494년, 오왕 부차가 선왕 합려가 월왕에게 당한 원수를 갚기 위하여 전 병력을 이끌고 월로 진공,
 
태호太湖 가 서남쪽에 '부초'(지금의 둥팅산洞庭山)가 보인다

  - 부초산에서 월의 군대를 격멸,

  >월은 오에 굴복하고, 월왕 구천은 포로로 잡혀 오왕을 세 해 동안 받들어 모심.

 

와신상담하는 월왕 구천

  > 이 전쟁으로 오는 패업을 이루지만 ,

  > 부차는 그만 소인의 말을 믿으며 구천을 석방하고 월과 친밀한 관계를 가짐.

  > 그 뒤, 오는 군사를 이끌고 제를 쳐서 크게 이김.

 - 그러나 이는 오의 멸망을 앞당기는 화근이 됨.

 
 
 - 전쟁에 참가한 두 나라 군대...오 5만 5천, 월 3만.
 
...입택지전笠澤之戰과 고소포위전姑蘇圍困
 
 - 기원전 478년, 월이 입택(지금의 장쑤성 우강吳江 일대)에서 오를 물리친 전쟁.
 - 몇 차례 벌어진 전투에서 오는 전패, 
  > 오왕 부차는 패잔병을 이끌고 고소성姑蘇城(지금의 장쑤성 쑤저우시蘇州市)로 도망,
  > 성문을 잠근 채 움츠리고 나오지 않음.
 - 월의 큰 승리로 끝남.
 
 - 기원전 473년, 고소성은 포위된 지 몇 년, 오군의 세력을 점차 고갈되어 스스로 궤멸함.
 - 부차는 결국 고소산으로 들어가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 > 오 멸망.
입택지전 안내도

 

12. 백거지전柏擧之戰

 - 기원전 506년, 오왕 합려가 군사 3만을 거느리고 초 나라 깊숙이 들어가서,

 - 백거(지금의 후베이성 마청시麻城市 경내)에서 초의 군사 20만을 격파한 전쟁.

 

백거지전 안내도

 - 전쟁의 결과

 . 오군은 초의 도성 영郢(지금의 후베이성 장링江陵 부근)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곳곳에서 방화와 약탈을 일삼음.

  > 초나라 사람들에게 원함을 남김.

 . 오자서伍子胥, 초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주검에 3백 대의 매질을 가함.

 . 이로써 초는 원기에 크게 상처를 입고 다시는 크게 일어서지 못함.

 

13. 진양지전晉陽之戰

 .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53년, 진晉의 명문대가 지씨智氏, 조씨趙氏, 한씨韓氏, 위씨魏氏 사이에 벌어진 성읍 공수전.

 . 이 전쟁 뒤, 중국 역사는 춘추시대를 끝내고 더 이상 도道와 의義를 중시하지 않는 시대, 곧 전국시대로 들어섬.

 

&lsquo;삼가분진' 직전의 세력도

 . 전쟁의 개략

  > 조, 한, 위, 이 세 집안이 연합하여 손을 맞잡고 함께 지백씨智伯氏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 그 땅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차지한 뒤 전쟁을 끝냄.

  > 이 '삼가분진三家分晉'으로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듦. ... . 전국시대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