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한평생 세 번 시집간 여인 - 해우공주解憂公主

촛불횃불 2021. 12. 13. 16:30

 광왕이 또 해우공주를 맞아 사내아이 치미를 낳았지만 공주와 화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포학하기까지 하여 민심을 잃었다. (狂王復尙楚主解憂, 生一男鴟靡, 不與主和, 又暴惡失衆.)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

 

뭇 산들이 그대 아름다운 적곡성을 에워쌌도다;

만경창파 전지호闐池湖여, 찬미 노래로 물결 일렁이도다.

벌 나비 춤추듯이 모여든 인민이여, 온갖 새들 봉황을 향하는 것 같도다;

오손산 탑 위 소나무 높이 솟아 구름에 이르러 서천산 푸른 하늘도 장식하도다.

한 왕조 다시 번성함이 대단하다는 걸 세상에 어느 누가 모르랴.

달콤한 물 마음껏 들이켤 때 수원을 잊지 말아야지, 오손국 흥성도 한나라와 어깨 결었기 때문이지.

덕망 높은 오손왕이여, 오손국의 뛰어난 영웅이여.

눈 있는 이 알아야 하리, 한 나라 화친공주 모두 온 힘을 쏟았음을.

 

群山環抱着你啊, 美麗的赤谷都城;

碧波萬頃的闐池湖啊, 也好似揚波歌頌.

蜂飛蝶舞般的各族人民啊, 如同百鳥朝鳳;

烏孫山的塔松高聳入雲啊, 裝點着西天山的蒼穹.

四海之內誰不知道啊, 大漢王朝的中興天下無比;

暢飮甛水時要思源啊, 烏孫國的興盛來源于烏漢聯盟.

德高望重的烏孫王啊, 堪稱烏孫國的一代精英;

有目共睹啊, 漢家的和親公主個個都瀝血嘔心.

 

 한 나라 선제宣帝가 황제의 자리에 있던 기원전 65년, 오손의 도성 적곡성 왕궁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맛있는 요리에 훌륭한 안주는 물론 제철에 맞는 갖가지 과일이 상에 올랐고 아름다운 음악도 흥을 돋우었다. 게다가 이 잔치에 초대된 서역 서른여섯 나라 왕공들도 함께했다. 귀빈들은 오손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제는 흉노와 같은 지위와 힘을 갖게 된 현실을 기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지난날 겪어야 했던 고통도 이제는 다 잊었다는 듯 술잔을 맞부딪쳤다.

 

지도에서 왼쪽 누른색 부분이 서한의 힘이 미치는 서역의 여러 나라들이다. 그 가운데 왼쪽 윗부분이 오손이다

 이 날은 해우공주解憂公主의 쉰여섯 번째 생일, 몇 차례 술잔이 돌자 불콰해진 장군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 즉흥적으로 지은 시를 읊기 시작했다. 해우공주와 오랫동안 함께한 상혜常惠 장군이었다. 장군은 서역의 평화에 큰 힘을 쏟은 해우공주를 추어올림과 동시에 이전의 화친공주 세군도 잊지 않았다. 그랬다. 해우는 바로 앞의 세군공주에 이어 오손에 화친을 위해 온 두 번째 공주였다. 세군이나 해우는 당시 서한의 도성 장안에서 1만 리 멀리 떨어진 적곡성까지 온 화번공주였다. 내가 쓴 다른 글에서 세군공주를 비록 성글게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해우공주도 낯설고 물선 이곳 오손에서 꽃다운 젊은 나이 때부터 일흔이 넘도록 생활했으니, 고향 그리워하며 이리저리 몸 뒤척였던 밤은 얼마나 많았을 것이며 가슴 찢어질 아픔은 또 얼마나 잦았겠는가?

 

오손으로 가는 해우공주

 

 서한 경제 때 어사대부였던 조조晁錯는 제후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의 권한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건의를 최고 권력자인 경제에게 올렸다. 이른바 삭번책削蕃策으로 불리는 이 건의에 따라 황제는 초楚나 조趙 등의 봉지 일부를 거두어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유씨 성을 가진 제후왕들이 어깨를 겯고 황제 곁의 간신들을 제거한다는 기치를 올리며 들고 일어났다. 바로 ‘칠국의 난七國之亂’이었다. 당시, 초 땅의 제후왕은 유무劉戊였다. 이 양반이 바로 해우의 조부이다. 칠국의 난에 앞장서서 병사를 이끌고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은 유무를 할아버지로 두었기에 해우는 다른 가족과 마찬가지로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집안사람들은 이때부터 오랫동안 질시와 배척을 받으며 헤어날 길 없는 고통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서한 여섯 번째 황제 효경제

 기원전 101년, 오손의 곤막(오손에서는 군주를 곤막이라 일렀음) 군수미에게 시집갔던 서한의 공주 세군이 세상을 떠났다. 한 왕조는 오손과 어깨를 겯고 흉노를 견제하려는 외교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또 다른 공주를 군수미에게 안겨야 했다. 황제의 조서 한 장이 곧 법이었던 때, 누구도 이에 맞서지 못했다. 해우와 가족들은 눈물을 머금고 꿇어앉아 성지를 받들며 황제의 은총이라며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떠난 뒤 해우가 겪은 50년의 세월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수한 간난과 신고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오손에 온 지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이를 가지지 못하여 냉대를 받았다. 이를 지켜보던 흉노공주의 즐거운 모습은 그녀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흉노에서 온 이 공주는 해우보다 먼저 왔기에 좌부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 발 늦게 온 해우는 이보다 한 칸 낮은 우부인이었던 것이다.

군수미의 모습(극중 인물)

 또 하나, 오손의 곤막 군수미가 세상을 떠나자 해우는 흉노공주와 함께 뒤를 이은 곤막 옹귀미翁歸靡에게 재가해야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손의 습속이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이와 똑같은 상황을 맞았던 세군공주가 이를 벗어나게 해 달라고 한 무제에게 글을 올렸지만, ‘우리 한 왕조는 오손과 어깨를 겯고 흉노를 무릎 꿇릴 작정이니, 공주는 오손의 풍속을 따르라.’는 회신만 받았을 뿐이었다. 해우도 어쩔 수 없었다. 자기 뜻과 판단에 따라 선택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기회’가 되었을 터였다. 자기 뜻과 판단이 상수도 변수도 아닐 때, 우리는 그런 경우를 일러 ‘운명’이라 한다.

 운명이었기에 맞설 수 없었다. 해우는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길은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군수미의 동생 옹귀미에게 재가한 해우는, 연분이 맞았던 것일까, 자녀를 다섯이나 낳았다. 그런데 옹귀미가 곤막의 자리에 있던 때에도 해우가 풀어야 할 힘든 문제는 여전히 존재했다. 해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부인이라는 불리한 자리에 있었고, 궁중에는 여전히 친한파와 친흉노파가 날카롭게 대립하며 충돌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현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역경 속에서도 해우는 자기 의지를 꿋꿋하게 지키며 한 왕조와 오손의 연맹 관계를 유지시키기 위하여 온 힘을 기울였다. 게다가 오손의 흥성을 위해 고통을 마다않고 자기 입장을 분명히 했다.

 

TV 연속극 <解憂公主>의 한 장면

 운명은 이상하고 짓궂어 얄미울 때도 있다. 해우가 선택하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했던 운명이 바로 그랬다. 흉노공주가 낳은 아들 이미泥靡에게 세 번째로 시집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또 하나의 아들이 태어났다. 해우의 고향 한 나라에서는 그녀가 떠나올 때 황제의 자리에 있던 무제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무제의 뒤를 이은 소제昭帝도 세상을 떠나고 이제 선제宣帝의 시대였다. 해우가 오손에 온 지도 어느덧 반세기가 흘렀던 것이다. 그녀는 그동안 서역의 정치 무대에서 한 왕조의 외교 정책을 도와 흉노 세력의 억제를 위해 줄곧 활약했다.

 

서한의 여덟 번째 황제 소제

 이제 해우공주의 나이도 일흔에 이르렀다. 어느 한 때라도 그리운 고향을 잊었으랴만 바로 이때에 다다라 고향에 뼈를 묻고 싶은 마음은 이미 누르래야 누를 수 없을 만큼 큰 키로 자라 있었다. 그녀는 한 왕실에 자기 뜻을 담은 글을 올렸다.

 “저는 이제 늘그막에 이르러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칩니다. 이제 돌아가서 뼈라도 그곳에 묻히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은 잇달아 이렇게 기록했다.

-천자께서는 이를 가엾이 여겨 공주를 맞아들였다. 오손의 남녀 세 사람도 함께 도성으로 왔다. 때는 감로甘露 3년[기원전 51년], 그녀의 나이 일흔이었다. 천자는 공주에게 전답과 집은 물론 노비까지 내리고 공주에 비길 만한 예의를 갖춰 정성을 다해 모셨다. 그녀는 두 해 뒤 세상을 떠났다.

 

늘그막에 이른 해우공주의 모습을 담은 소상&nbsp;

 세군과 해우, 이 두 공주가 오손에 옴으로써 세운 ‘흉노 오른팔 자르기’라는 전략은 반세기 동안 철저히 기초를 닦으며 실행된 결과 원만하게 실현되었다. 흉노가 크게 패함으로써 해우공주의 명성은 최고점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자 옹귀미는 한 왕조를 향해 맏아들 윈귀미元貴靡가 한 왕조의 공주를 맞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했다. 선제는 해우공주의 조카딸 유상부劉上夫를 공주로 봉한 뒤 오손의 언어와 습속을 익히도록 했다. 장차 오손의 새로운 국모에 앉힐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열흘 붉은 꽃이 없다고 했던가. 오손으로 가는 공주의 대오가 기세도 등등하게 돈황敦煌에 이르러 이제 막 국경을 넘으려는 때, 오손에서 부음이 날아들었다.

 -옹귀미, 병으로 세상을 떠나다.

 이에 따라 곧 이어진 왕권을 둘러싼 싸움에서도 해우공주는 자기 조국을 위하여 앞에 나서야 했다. 옹귀미가 세상에 있을 때, 해우가 낳은 맏아들 원귀미를 태자로 세웠던 데다 한 왕실의 공주를 맞으려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앞뒤 어그러짐 없이 척척 아귀를 맞추며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옹귀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일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윗대 곤막 군수미가 살아생전 바라던 뜻을 따라 흉노공주가 낳은 왕자 이미가 곤막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오늘날 옛 오손 지방의 풍경

 원귀미가 오손의 곤막에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한 왕조는 그때까지 돈황에 머물며 관망하던 공주 유상부를 도성으로 불러들이며 오손과 맺었던 혼약도 일방적으로 취소했다.

 예나 이제나 국가와 국가 사이는 이해관계에 따라 자못 차갑게 움직였다. 이것이 바로 외교였기 때문이다. 한바탕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자 한 왕조의 오손에 대한 영향력도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변하고 말았다. 물론 해우가 오랫동안 오손에서 힘들여 이룩한 성과도 우르르 내려앉았다. 해도 하늘 한복판에 있을 때는 이글거리는 햇빛이 쇠라도 녹일 듯 뜨겁지만 서산으로 기울 때는 사그라지는 짚불일 뿐이다. 서한도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정치, 군사, 외교는 모두 선이나 악, 옳음이나 그름이 없다. 오로지 이익과 손해 관계만 있을 뿐이다. 때가 되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알맞게 처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비록 선이나 악, 옳음이나 그름은 없을지라도 여전히 원인과 결과는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政治, 軍事, 外交都是沒有善惡是非的, 只有利害關係. 怎麽臨時處理, 要憧得應變. 但是要注意, 雖然沒有善惡是非, 都還是有因果的.)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작가 난화이진南懷瑾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