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의거왕義渠王과 사통하여 두 아들 낳은 선태후宣太后

촛불횃불 2021. 12. 19. 19:10

 천하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훨씬 전, 진秦 나라는 주周 나라 서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나라로 이적夷狄의 땅이라 불렸다. 이렇게 여러 제후국들이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진나라는 야금야금 세력을 불려 나갔다. 그리하여 전국시대 말엽 소양왕昭襄王에 이르렀을 때에는 조趙 나라와 크게 맞붙을 수 있는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진나라는 장평長平에서 조나라의 대군을 꺾으며 승리함으로써 마침내 칠웅 가운데 일웅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때는 기원전 260년, 소양왕이 진나라 왕의 자리에 오른 지 마흔일곱 해째 되는 해였다.

 진나라 역사를 통틀어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소양왕을 제 몸으로 낳은 여인이 선태후宣太后이다. 먼저 사마천의 <진본기>에서 한 부분을 가져온다.

 

 소양왕의 어머니는 초楚 나라 사람으로, 성은 미羋 씨이며 선태후라 불렸다. 무왕武王이 죽었을 때, 소양왕은 연燕 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지만 연나라 사람이 돌려보냈기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昭襄母楚人, 姓羋氏, 號宣太后. 武王死時, 昭襄王爲質于燕, 燕人送歸, 得立.)

 

진秦의 북쪽, 위魏의 서쪽 회색 부분이 바로 의거義渠

  애초에 진나라 혜문왕惠文王의 희첩으로 입궁한 이 여인은 당연히 왕비가 아니었다. 위魏 나라에서 맞은 혜문후惠文后라 불린 여인이 혜문왕의 정실이었기에 초나라에서 온 미씨 성을 가진 이 여인은 ‘미팔자羋八子’에 그쳤다. 진나라에도 왕의 정실과 첩실의 등급에 따른 칭호가 달랐다. 말할 것도 없이 ‘왕후王后’가 가장 앞을 차지했고, ‘부인夫人’, ‘미인美人’, ‘양인良人’, ‘팔자八子’, ‘칠자七子’, ‘장사長使’, ‘소사少使’가 차례로 그 뒤를 이었다. 그러니까 미팔자는 혜문왕의 여인으로서 그 등급이 중간쯤에 자리했다. 이 ‘팔자’는 당唐 나라 때의 ‘재인才人’과 그 위치가 거의 비슷했으니, 중국 역사에 크게 이름을 떨친 무측천武則天이 바로 당태종唐太宗 이세민의 ‘재인’이 아니었던가. 

 

혜문왕 동상

 

 어느 시대이든 여인에게는 권력을 한 손에 쥔 이의 굄을 받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앞이었다. 이는 구중궁궐 닫힌 공간에 살 수밖에 없는 여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했다. 미팔자가 태후가 되는 길목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혜문왕의 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혜문왕에게 아들을 셋이나 안겼다. 아들 셋은 혜문왕의 굄이 일시적이 아니라 오랫동안 계속되었음을 알리는 분명한 표지였다. 그런데도 혜문왕은 무슨 까닭으로 그녀를 ‘팔자’에 봉하는 데 그쳤을까. 그녀의 출신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탓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의 친정붙이를 진나라 궁중으로 불러들여 벼슬살이를 하게 만들었다. 혜문왕도 처갓집 말뚝에 절을 올렸던 것이다.

 

선태후의 모습

 기원전 311년, 자리에 오른 지 스물일곱 해 되던 해, 혜문왕이 세상을 떠났다. 혜문후의 아들이 뒤를 이어 자리에 올랐다. 이가 바로 무왕武王이다. 그는 용맹스럽고 위세가 넘치는 젊은이였다. 어려서부터 군막에서 생활하기를 즐겼으며 장군들도 이 젊은 태자의 담력과 지모에 탄복할 정도였다. 문제는 이런 장점도 때로는 단점이 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장점의 단점을 알아 수신할 줄 알고 단점의 장점을 찾아 키울 줄 알 때 세상은 밝게 열리게 마련이다. 그런데 젊은 무왕은 자기가 가진 남다른 힘을 ‘힘자랑’하다 세상을 끝내고 말았다. 역사 맹열孟說과 큰 솥 들어올리기를 겨루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결국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왕의 자리에 오른 지 네 해째 되는 해, 기원전 307년이었다. 당시 무왕의 나이는 스물셋, 한창 피가 끓을 때였다. 피는 끓어도 머리는 차가워야 했지만, 그는 그러하지 못했다.

 

힘 자랑하는 무왕의 모습

 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뒤를 이을 이는 그의 여러 동생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었다. 미팔자의 맏아들 직稷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직은 당시 연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 1천 킬로미터도 더 멀리 떨어진 곳에 볼모로 잡혀 있던 직이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무왕이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배다른 동생 직을 후계자로 삼는 조서를 남겼던 것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어머니 배에서 태어난 동생 장壯을 두고 이런 조서를 남겼을 리는 없을 것 같다. 어떻든 당시 우승상 저리자樗里子는 천리 밖 먼 곳 연나라에 볼모로 있던 공자 직을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지낭智囊’, 곧 지혜 주머니로 널리 알려진 저리자는 궁중에서 힘을 쥐고 있던 미팔자의 친정붙이의 위세를 셈했을지도 모른다.

 

소양왕

 

 연나라에서 돌아온 공자 직이 왕의 자리를 이으니, 이 곧 소양왕이다. 아들의 지위가 높고 귀해지면 그 어머니의 지위도 따라서 높고 귀해지기 마련이다. 미팔자는 한달음에 하늘 끝까지 뛰어올라 ‘선태후’가 되었다.

 바람도 달려가다 앞을 막아서는 바윗덩이 만나 멈칫할 때가 있듯이 사람 사는 세상도 막힘없이 펼쳐지던 제 권세가 맞서는 반대 세력 만나 주춤할 때가 있다. 무왕을 제 몸으로 낳은 혜문태후가 가만있지 않았던 것이다. 무왕과 같은 배에서 태어난 동생 장壯이 뜻을 같이하는 세력을 규합하여 궁중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이 상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선태후의 동생 미융羋戎과 위염魏冉이 이 나라에서 차지하고 있던 힘을 얕보았다. 더구나 선태후와는 같은 어머니이지만 다른 아버지의 자식으로 태어난 동생 위염은 수도 함양을 지키는 장군으로서 이들 정변을 일으킨 무리를 일망타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소양왕의 형제일지라도 사정없이 목을 내렸던 것이다. 혜문태후는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선태후의 남동생 위염.(극중 인물)

 이제 선태후의 시대가 제대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선태후는 손에 쥔 권력을 한동안 움켜쥐고 아들인 소양왕에게 넘기지 않았다. 동생 위염에게는 재상 자리를 안겼다. 그리고 선태후의 동생 미융에게도 힘을 실어주었다. 게다가 소양왕의 동생으로 선태후가 제 몸으로 낳은 회悝(고릉군高陵君)와 불芾(경양군涇陽君)도 귀한 몸이 되었다. 위염, 미융, 공자 회와 불, 이들 네 사람을 당시 사람들은 ‘사귀四貴’라고 불렀다. 이들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그 기세가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성하면 쇠해지는 사물의 법칙은 권력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위魏 나라에서 진나라로 도망 온 범저范雎가 올린 ‘사귀’를 물리치라는 건의를 소양왕이 받아들였다. 마냥 어린 아이가 아니었던 소양왕도 움츠렸던 어깨를 펼칠 기회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소양왕은 이들 ‘사귀’를 도성 함양에서 내쫓고 선태후는 태후의 자리에서 물렸다. 흥망과 성쇠는 자연의 법칙이다. 달도 차면 기울지 않던가. 궁중에서 미씨 성을 가진 ‘팔자’에 지나지 않던 그녀가 ‘선태후’가 되어 친정붙이와 함께 영화를 누렸지만 결국은 권력의 정점에서 폐위되고 말았다.

 그런데 사마천은 선태후와 관련된 흥미로운 사건 한 가지를 지나치지 않고 <흉노열전匈奴列傳>에 기록으로 남겼다.

  

 진秦 나라 소왕昭王 때, 의거義渠의 융왕戎王이 선태후와 음란하게 사통하여 아들 둘을 낳았다. 선태후는 의거의 융왕을 속여 감천궁甘泉宮에서 죽인 뒤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쳐서 멸망시켰다.

(秦昭王時, 義渠戎王與宣太后亂, 有二子. 宣太后詐而殺義渠戎王於甘泉, 遂起兵伐殘義渠.)

 

 여기서 이르는 소왕은 곧 소양왕이다. 의거는 중국 고대에 목축을 위주로 살았던 강융족羌戎族이 세운 나라로 지금의 간쑤성甘肅省 닝현寧縣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들이 세운 의거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면 진秦 나라나 위魏 나라와도 맞설 만한 힘을 가진 강국이 되었다. 진나라의 도성 함양과 의거의 도성 닝현은 불과 2백 킬로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 진나라로서는 그들의 서북쪽에 국경을 맞댄 이들의 존재가 언제나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TV 연속극 &amp;lt;미월전羋月傳&amp;gt; 속의 의거왕

 

 선태후가 하례차 진나라 조정을 찾은 의거의 융왕을 꼬드겨 ‘음란하게 사통한’ 일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계획적이라고 본다. ‘아들 둘을 낳은’ 뒤, ‘의거의 융왕을 속여 감천궁에서 죽인 뒤 마침내 군사를 일으켜 의거를 쳐서 멸망시켰다’라고 사마천이 잇달아 기록한 두 번째 문장이 이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오직 두 개뿐인 문장은 건조하지만 제 몸으로 낳은 아들 소양왕과 몇 날 몇 밤을 머리 맞대고 남몰래 계략을 짜내었을 선태후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리하여 의거의 옛 땅에 진나라는 세 개의 군郡을 설치하고 이들의 역사에 의거라는 근심거리를 영원히 제거할 수 있었다. 서북쪽의 후환을 없앤 진나라는 이제 동쪽으로 세력을 넓히며 최후의 일웅을 향해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했다. 진나라 역사에서 선태후가 세운 공을 외면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 있다. 이런 점에서 가짜 환관 노애와 사통하여 두 아들을 얻은 진시황의 생모 조희를 선태후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는 일은 빛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선태후宣太后, 미팔자羋八子, 미월羋月은 모두 한 인물이다. 한 인물이 때와 장소,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역할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불리는 경우를 생각하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