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아직도 사랑하는 그 사람 기다리는 여인 - 소소소蘇小小

촛불횃불 2021. 12. 28. 10:00

저는 유벽거를 탔고요,

그대는 청총마를 탔군요.

어디에서 우리 마음 맺을까요?

서릉의 송백나무 아래지요.

 

妾乘油壁車, 郞騎靑驄馬.

何處結同心, 西陵松柏下.

 

 중국판 ‘춘희椿姬’로 이름난 소소소蘇小小의『동심가同心歌』이다. 진실한 사랑만이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들고 영혼을 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알렉산드르 뒤마의『춘희』보다 무려 1천 3백여 년 전, 중국 땅 남북조 시대 남쪽 왕조 제齊 나라에 살았던 가냘픈 여인의 진실한 사랑 이야기가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을 울린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딸로서 사랑을 독차지했던 소소소였다. 그러나 그녀가 열다섯 살 되던 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어머니마저 잇달아 세상을 버리자, 그녀는 집안의 재산을 다 팔아버린 뒤 유모를 따라 서쪽 서령교西泠橋 부근으로 옮겨 송백나무 숲속 자그마한 집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 뒤, 그녀는 날마다 자신이 직접 만든 유벽거에 올라 서호西湖 주변을 노닐며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껏 즐겼다. 영리하고 총명한 데다 뛰어나게 아름다운 용모, 게다가 기품이 한껏 넘치는 모습에 그가 지나는 길목에는 언제나 운치 있고 기상 꿋꿋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더구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통제가 없었기에 풍류를 아는 젊은 선비들과 자유로이 오갈 수 있었다. 그녀의 자그마한 집엔 시와 음률을 아는 젊은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전당錢塘 일대에 이름을 날리는 ‘시기詩伎’가 되었다.

 

소소소

 소소소는 원래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녀의 선대는 일찍이 동진 조정에서 벼슬을 했다. 그러나 동진이 망한 뒤, 그녀의 선대는 가족들을 이끌고 낯선 땅 전당으로 와서 정착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올 때 지니고 온 금은붙이를 밑천으로 장사에 뛰어들었다. 소소소 부모 대에 이르렀을 때는 그 지방 부호의 대열에 낄 수 있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소소소는 무남독녀 외딸이었기에 어려서부터 금지옥엽이었다. 그녀는 몸집이 여리고 작았기에 ‘소소小小’라는 이름을 얻었다. 비록 소씨네는 장사를 하고 있었지만 조상이 남긴 선비의 유풍이 아직도 집안 곳곳에 배어 있었다. 총명하고 영민한 소소소가 이런 영향을 받지 않았을 리 없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서예는 물론 시에도 능했다. 그 밖에도 온갖 재주가 넘쳤다. 그러나 불행은 그녀 나이 겨우 열다섯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면서 비롯되었다.

 

'서령교'의 풍광

 쌓인 재산도 아무 일 하지 않고 곶감 빼어먹듯이 야금야금 쓰면 금세 비어버리는 법. 소소소도 이 점을 알았던 듯하다. 그녀는 자기가 가진 재주를 밑천 삼아 찾아온 시인 묵객과 시를 주고받으며 거문고를 뜯고 노래를 불렀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일러 ‘가기歌伎’라 부르기도 했으며 또 한 편으로는 ‘시기詩伎’라 이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몸뚱이를 팔아 삶을 영위하는 ‘기녀妓女’와는 구별해야 할 듯하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와 예술적인 재능은 수없이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녀가 손수 제작했다는 유벽거가 서령교를 비롯한 서호의 풍광 속에 나타나면 젊은 남성들이 줄을 이어 뒤를 따랐다. 생각하면 오늘의 ‘오빠부대’의 모습이 그대로 겹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소소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청총마

 그녀의 사랑은 어느 날 운명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청총마에 탄 기백 넘치는 젊은이가 나타났던 것이다. 젊은이의 이름은 완욱阮郁. 풍채가 빼어나고 재주와 슬기가 넘쳤다. 청총마란 갈기와 꼬리 부분은 파르스름하고 몸통은 흰색의 준마를 가리킨다. 그날, 소소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유벽거를 타고 있었다. 유벽거란 옛 사람의 탈것 가운데 하나로 사방 겉면을 기름으로 색칠하여 꾸민 수레를 말한다. 이는 원래 혼사 때 신부를 맞이할 때 부귀한 집안에서 사용한 수레였다. 어떻든 소소소는 완욱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잠시 뒤, 그녀는『동심가』를 불렀다. 사랑 고백이었다. 사랑 고백도 이 정도면 날것 그대로였다. 하기야 사랑 고백에 포장이 웬 말인가, 진심으로 사랑하는데 무슨 수사가 필요할까? ‘서릉의 송백나무 아래지요.’, 이렇게 노래할 때, 소소소는 방긋 웃으며 오른손 집게손가락 곧게 펼치고 저쪽 서릉 송백나무를 분명히 가리켰을 것 같다. 그녀는 그곳에서 우리 마음을 맺자며 사랑을 고백한다. 완욱도 그 자리에서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날 해질 무렵, 그녀의 집을 찾은 완욱은 예를 온전히 갖춘 미인의 영접을 받는다. 그리고 어둠이 짙어지자 둘은 함께 잠자리에 들었다.

 

전당의 풍광

 이날 이후, 둘은 몸에 붙은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날이면 날마다 함께 서호 주변의 산수에 노닐며 즐거움에 빠졌다. 그러나 즐거움은 오래 가지 않았다. 남제의 도성 금릉金陵(지금의 난징南京)에 있던 완욱의 아버지가 아들이 전당에서 날이면 날마다 기녀와 정신을 잃은 채 세월을 보낸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솟구친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린 명령은 짤막했다.

 -집으로 돌아오라!

 

 이제 소소소의 하루는 사랑하는 그 사람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일로 채워졌다. 그러나 사랑하는 그 사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날이 길어지면서 그녀는 결국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래도 그녀는 앞뒤 꽉 막힌 고집불통은 아니었다. 그녀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유모가 품위 넘치는 젊은 선비를 골라 한담을 나누도록 배려하자 차츰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그녀의 집 앞에는 예전처럼 찾아오는 시인 묵객들로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소소소의 또 다른 모습

그러나 열아홉 한창 나이에 첫눈에 빠졌던 그 사람을 어찌 한시라도 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너무도 투명한 가을날, 호숫가로 나섰던 소소소는 그만 가슴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사람 완욱을 그대로 빼닮은 젊은이와 마주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 젊은이의 옷차림은 수수했으며 표정은 어두웠다. 가진 돈이 부족하여 과것길에 나서지 못하고 멈춰서야 했기 때문이다. 용기 잃고 실의에 빠진 이 젊은이의 이름은 포인鮑仁이었다.

 ‘이 젊은이는 분명 급제할 거야.’

 그녀의 이런 판단에는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이 젊은이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던 것이다.

 “내가 젊은이에게 도움을 주겠습니다.”

 포인은 감격으로 뭉클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포인은 가슴 가득 큰 포부를 안고 과거 시험장을 향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 그녀를 깊이 알 수 있는 일화가 한 가지 있다. 당시 양자강 상류 지역을 관장하던 관찰사 맹랑孟浪이 공적인 업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전당에 들렀다. 그는 소소소의 아름다운 용모와 넘치는 재능을 잘 알았기에 한 번 만나고 싶었지만 관찰사의 신분으로 직접 찾아 나서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사람을 보내 그녀를 자기가 머무는 거처로 오도록 전갈했다. 그러나 그녀가 이렇게 버틸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오기가 돋은 그는 몇 차례 더 사람을 보내 그녀가 자기 앞으로 오라고 채근했다. 화가 난 그는 그녀를 한번 골탕 먹이기로 마음먹었다. 몇 번의 채근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가 나타났다. 그러자 관찰사 맹랑은 뜰 저쪽에 꽃망울이 벌고 있는 매화 한 그루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자, 저 매화를 보고 시 한 수를 올리게.”

 

매화

 소소소는 태연자약했다. 결코 서두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그대로 입을 열어 노래하듯이 읊었다.

 

매화 설령 도도할지라도,

어찌 감히 봄추위에 맞서겠어요?

만약 콩팥 헤아릴 줄 안다면,

마땅히 받들어 공경해야지요.

 

梅花雖傲骨, 怎敢敵春寒.

若更分紅白, 還須靑眼看.

 

 이 시에서 말하는 이의 목소리는 자못 공손하지만 세상을 읽을 줄 아는 젊은 여성의 도저함이 흐른다. 관찰사 맹랑도 그녀의 번뜩이는 재기에 마음속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아버지의 불호령 한 마디에 금릉으로 간 완욱은 한번 떠나간 뒤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움이 마음속에 켜켜이 쌓일 때마다 온몸을 도려내는 아픔도 함께 뒤따랐을 소소소는 이듬해 어느 봄날 깊은 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버렸다.  서령에서 태어나 서령에서 죽어 서령에 묻히기를 바랐던 그녀의 소망은 이루어졌지만, 뒷사람들은 그녀의 넘치는 재기와 한 남자를 향한 고귀한 사랑을 깊이 찬미했다. 그리고 또 한편, ‘가인박명佳人薄命’을 안타까워했다.

 

소소소의 무덤

 때마침 과거에 급제한 뒤 활주滑州 지방 자사로 임명되어 이곳을 지나던 포인은 소소소의 죽음에 직면하여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팠다. 그는 소소소의 관을 어루만지며 통곡했다. 포인에게는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소소소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었던 그녀의 무덤 앞에 비석을 세웠다.

 -전당 사람 소소소의 무덤錢塘蘇小小之墓

 오늘도 그녀는 서령교 부근 모재정慕才亭 아래 누워 사랑하는 그 사람 완욱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의 남다른 천재를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에서 ‘모재정’이라 했지만 사람들 마음속엔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하는 젊은이 완욱을 끝까지 그렸던 그녀의 넋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더 기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기에 날아갈 듯 맵시 있게 하늘 향해 치솟은 처마를 받친 기둥마다 주련이 이곳을 찾는 이들의 발길을 한참이나 붙든다.

 

소소소 무덤의 주련柱聯

 

복사꽃은 흐르는 물 따라 아마득하니 사라지고,

향내 나던 유벽거는 이제 다시 못 보네.

 

桃花流水杳然去,

油壁香車不再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