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인물 산책

복사꽃처럼 아름다운 여인-식부인息夫人

촛불횃불 2022. 1. 11. 17:00

가는 허리 좋아하는 초 임금 궁 안에 복사꽃 새로 피었는데,

한마디 말 없이 몇 번의 봄이 지났구나.

끝내 식국息國이 망한 건 무엇 때문인고,

가엾어라 금곡의 누각에서 몸 던진 여인이여.

 

細腰宮裏露桃新,

脈脈無言度幾春.

畢竟息亡緣底事,

可憐金谷墜樓人. 

 

842년, 황주黃州 지방 자사刺史로 지방에 좌천된 시인 두목杜牧이 그보다 무려 1천 5백 년 앞서 춘추시대를 살았던 '도화부인桃花夫人'을 그리며 읊은 칠언시, '제도화부인묘題桃花夫人廟'이다.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웠기에 '도화부인'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불렸던 여인 식부인息夫人의 죽음을 떠올리며, 다시 서진 때의 부호 석숭石崇의 애첩 녹주綠珠를 데려온 시인의 놀라운 상상력을 우리는 이 시에서 만난다. 두 여인은 모두 자기의 참사랑 한 남자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온전히 던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식부인

 

 도화부인, 곧 식부인은 기원전 700년 무렵, 춘추시대 자그마한 제후국 진陳의 도성 완구宛丘(지금의 허난성 저우커우周口 화이양淮陽)에서 장공莊公의 딸로 태어난다. 기원전 684년, 그녀는 또 다른 자그마한 제후국 식息의 군주에게 시집을 간다. 여기까지는 옛적 여인의 삶의 궤적 그대로이다. 자그마한 제후국일망정 군주의 딸로 태어났으니, 이웃 제후국 군주나 그 아들에게 시집가는 일은 셈본이 아닌가. 자, 이제 이 글을 읽는 이는 아래의 지도를 살피며 진陳[陈]과 채蔡, 그리고 식息을 찾아보기 바란다. 그리고 남쪽 연두색의 넓은 땅 초楚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 넓은 땅덩이를 가진 나라와 앞의 자그마한 세 제후국이 어떤 관계로 엮어질지 상상하기 바란다. 

 

춘추시대 초엽의 제후국, 진陳.채蔡.식息, 그리고 초楚를 찾아보기 바란다

 식부인,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공주의 몸이었으니, 보통사람이 그린 아름다운 한 폭 풍경화처럼 세상 떠날 때까지 줄곧 행복했다면, 그랬다면 역사는 그녀를 무대에 다시 불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불행은 자기가 태어난 진에서 식으로 시집가는 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그녀의 나이 얼마나 되었을까? 역사는 그녀가 태어난 날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식의 군주에게 시집가던 때를 기원전 684년이라고 했으니, 태어난 때는 어림잡아 기원전 700년으로 짚었다. 열여섯 살이면 시집가는 나이로 그렇게 이른 시기가 아닐 수도 있지만. 태어난 해를 어림잡아 역산하는 데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어떻든 시집가는 길에서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든, 또 다른 설에 의하여, 시집간 지 얼마 뒤, 식에서 친정 진으로 부모를 뵈러 돌아오는 길에서 비롯되었든, 진과 식 사이에 놓인 채가 불행의 진원지였음은 분명하다. 위 지도를 살피면 진에서 식으로, 아니면 식에서 진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나라가 바로 채이다. 이 제후국 채에는 식부인의 언니가 진즉 채의 군주 애후哀侯에게 시집와서 그의 부인이 된 지 몇 년이 지나고 있었다. 

 

식부인을 마주한 채애후

  

 채의 군주 애후가 자기 땅을 지나는 식부인을 무례하게 대했다. 따지자면, 애후는 식부인의 형부요, 식부인은 애후의 처제이다. 형부인 애후가 처제인 식부인을 어떻게 대했는지, '무례'의 구체적인 모습이 어떠했는지, 역사가 남긴 자료는, 그것도 조각으로 남은 자료는, '처제인데..... .', 하면서 식부인과 얼굴을 마주 대했다는 것인데, 이 일을 식부인으로부터 전해 들은 식후는 이만저만 노한 게 아니었다. 앞뒤를 살피며 상상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2천 7백여 년 전, 당시 문법으로는 이런 일이 '불규칙'이었음이 분명하다. 식후는 당장 이웃한 남방의 큰 나라 초楚로 은밀히 사자를 보냈다. 이때, 초의 군주는 문왕文王이었고 도성은 영郢(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시荊州市 장링현江陵縣), 식의 도읍은 지금의 시현息縣, 두 도성 사이의 거리는 무려 4백 4십 km, 식후의 밀서를 품에 넣은 사자가 잘 달리는 말을 타고 달려도 하루에 도달하기에는 버거운 거리였다. 옛글에서 이르는 '천리마'라도 온전히 도달하기 힘든 곳에 두 도성은 떨어져 있었다. 물론 식후는 잔뜩 화가 난 상태였기에 사자에게 밀서를 건네며 빨리 전하라며 채근했을 터. 

 

-짐짓 우리 식 땅으로 진공하소서. 그럼 제가 채의 군주 애후에게 구원을 요청할 테고, 애후는 분명 군대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려고 나설 것입니다. 그때, 문왕께서는 채를 공격한다면 전공을 세울 수 있습니다.

 식후가 내놓은 이 계략을 초의 군주 문왕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기원전 684년 9월, 채의 군주 애후가 사로잡혔다. 초의 문왕이 보낸 군대가 신莘(지금의 허난성 루난현汝南縣 인근)에서 채의 군대를 대파한 뒤 애후를 생포했던 것이다. 

 

식부인과 초의 군주 문왕

 초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채의 군주 애후는 자기의 '무례'를 돌아보며 자기 탓을 하지 않았다. 자기를 곤경에 빠뜨린 이로써 식부인을 가리켰다. 집게손가락 하나만이 상대를 가리킬 뿐, 나머지 세 손가락이 네 탓이라며 자신을 가리켰지만, 그는 여느 사람처럼 자신의 잘못은 애써 감추고 있었다. 복수, 앙갚음의 대상은 당연히 식후와 식부인이었다. 포로로 잡혀 초의 군주 문왕 앞에 무릎 꿇린 애후는 고개를 들어 이렇게 말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식부인의 용모가."

 이 말에 문왕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셈하기 시작했다. 욕망은 키를 키웠고, 그 욕망은 식부인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서 끝났다. 문왕은 먼저 '순유巡遊'를 이유로 내세우며 식을 방문했다. 식후는 말할 것도 없이 그를 환대했다. 이 자리에서 얼핏 곁눈으로 본 식부인의 모습은 과연 천하절색이었다. 이튿날, 문왕은 무력으로 식후를 사로잡았다. 이날, 춘추시대 역사에서 자그마한 제후국 식은 사라졌다. 식의 군주 식후는 당장 초의 도성 영의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로 배치되었다. 그리고 식부인은 문왕의 것이 되었다. 

 

식부인과 두 아들

 

 제 목숨 스스로 끊으며 한생을 마치려던 식부인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자기가 죽으면 문지기가 된 남편의 목도 성할 수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참으로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이 치욕을 견디자, 언젠가는 그를 만날 날 있으리라, 그리고 그녀는 말문을 닫았다. 초의 군주 문왕의 애첩이 된 지 세 해, 그녀는 문왕에게 아들 둘을 안겼지만, 묻는 말 이외에는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무슨 까닭이오?"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 식부인에게 던진 문왕의 물음이었다.

 "한 여인이 두 사내를 모시게 되었는데 죽지는 못할망정 어찌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식부인과 문왕 사이의 맏아들 도오

 

 초의 궁전에서 문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어느 가을날, 문왕은 식부인에게 사나흘 뒤에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사냥에 나섰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문으로 내달았다. 문지기가 된 그녀의 사랑, 식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식후를 만난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온갖 치욕을 견디면서 살았습니다. 처음엔 당신의 목숨을 위해서, 그리고 그 뒤로는 당신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구차하게 견뎠습니다. 당신을 보았으니, 그래요, 당신을 보았으니 제 소원은 이루어졌고, 이젠 죽어도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어요."

 식후는 가슴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그는 식부인의 손을 잡고 위로했다.

 "하늘이 우리 부부를 불쌍히 여기신다면 언젠가 다시 합칠 날 있으리다. 내 비록 하찮은 문지기이지만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리다."

 그러나 식부인은 고통을 견디며 구차스럽게 사느니 차라리 옥처럼 부서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던 터라, 온 힘을 다해 성벽으로 내달아 제 머리를 들이받았다. 순식간이었다. 말릴 틈도 없었던 식후도 성 아래로 몸을 날렸다. 

 

식부인 상

 

 사냥에서 돌아온 문왕은 이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졌지만 몸을 날려 세상을 끝낸 두 사람의 사랑에 깊이 감동했다. 문왕은 제후의 예로써 성밖 도화산 기슭에 합장했다. 뒷날 사람들은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한 해 네 차례 계절이 바뀔 때면 제사를 올렸다. 물론 이 사당의 이름이 '도화부인묘'이다. 

 

 식부인이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역사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이 여인의 아름다움이 자그마한 제후국 몇 개를 망치고 두 번째 남자 문왕과의 사이에 낳은 두 아들이 왕위를 두고 피 터지는 싸움을 벌인 데만 초점을 맞춘다. '화수禍水'라는 낱말을 만들어 나라 망친 재앙의 원인을 힘없는 여인의 아름다움으로 돌리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애후나 문왕의 뒤집힌 눈과 욕망이 지배하는 마음은 애써 외면한다. 사실 여인의 아름다움이 나라를 기우뚱 비틀거리게 만드는 게 아니라, 힘있는 남자의 뒤틀린 욕망이 나라를 망친다. 따라서 '경국傾國'의 책임을 여성에게 덮어씌우기는 역사를 기록하는 이가 저지른 최대의 죄악이다. 

 참 이즈음에서, 박종화의 단편소설 <아랑의 정조>를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1천 5백여 년 전, 한 사내 도미都彌의 아내의 아름다움에 빠지며 한 나라 왕으로서 지켜야 할 궤도를 심히 이탈한 백제 개로왕, 그리고 도미의 아내 아랑이 등장 인물이다. 힘있는 자는 예나 이제나 자기가 가진 힘으로 모든 것을 다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하여, 보이지 않는 마음까지 손에 넣을 수는 없는 법이다. 

 채의 군주 애후도 식부인의 마음을 제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큰 나라 초의 군주 문왕도 식부인의 마음까지는 차지하지 못했다. 마음은 권력으로 빼앗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