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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파국으로 이끈 군주의 난륜-위선공衛宣公

사마천은『사기』곳곳에 인륜을 어지럽히는 문란한 남녀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다. 게다가 군주가 맞아들인 서로 다른 빛깔의 여인들이 보이지 않게 벌이는 투쟁에다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들의 암투를 읽노라면 곧장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으로 우리를 이끈다. 위衛 나라 열다섯 번째 군주 선공宣公은 이 나라 열두 번째 군주 장공莊公의 아들이다. 이들을 둘러싸고 얽히고설킨 관계를 제대로 알려면 A4 용지를 가로로 펼친 채 가계도를 그린 뒤, 한 차례 더 정리해야만 실타래가 제대로 풀린다. ‘장공 5년,……’으로 시작되는「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의 이 단락은 제나라 여자, 진陳 나라 여자1, 진나라 여자2, 애첩, 이렇게 네 여자가 장공 곁에 등장한다. 게다가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 셋도 등장한다. 사마천이 무대에..

귀 닫은 군주의 최후-송宋 양공襄公

몇 백 년 이어오던 주周 왕실이 무너진 것도 또한 왕조가 바뀔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당장은 서북쪽 변방에 살던 이민족 견융족犬戎族의 공격 때문이었다. 이렇게 서주西周는 유왕幽王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태자의 자리에서 내쳐졌던 의구宜臼가 제후들의 추대로 평왕平王으로 왕위에 오르니 바로 동주東周의 시작이다. 때는 기원전 770년, 바로 춘추전국시대는 이로써 비롯된다. 그 앞쪽,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좌전左傳』에 따르면 14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경계를 맞댄 이웃끼리 벌어졌을 다툼을 가히 상상할 만하다.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지 130년을 이제 막 지난 기원전 638년, 송宋 나라와 초楚 나라가 맞붙었다. 당시 송나라의 군주는 양공襄公, 초나라의 군주는 성왕成王이었다. 여기서 주周..

한무제 유철이 각별히 대우한 여인-젖어머니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무제 유철의 생모는 왕지王娡이다. 이 여인은 애초 금왕손金王孫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지만 그녀의 어미를 따라 황태자 유계劉啓의 궁중에 들어와서 미인美人에 봉해진다. 유계는 서한의 여섯 번째 황제로 자리에 오르니, 이 곧 경제景帝이다. 왕미인이 경제에게 안긴 아들이 바로 유철이다. 유철은 왕미인에게는 첫 번째 아들이지만 경제에게는 열 번째 아들이다. 왕미인의 몸으로 낳은 유철에게는 유모가 따로 있었다. 유모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자못 특수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만들어진 따스한 젖을 받아먹으며 자란 아이가 귀족의 자제일 경우 이 여인의 신분도 따라서 현귀해질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왕공 귀족의 자제는 그 아비의 신분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어린 시절 ..

한무제 유철이 죽인 여인-구익부인鉤弋夫人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무제 유철은 열여섯에 등극하여 일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쉰다섯 해 동안 절대 왕권을 휘둘렀다. 재위 기간이 긴 만큼 역사에 남긴 업적도 적지 않지만 어두운 흔적도 또한 적지 않다. 중국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강대한 제국의 바탕을 마련하며 지구 서쪽 로마 제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문명을 이룩한 데는 무제 유철의 공로에 힘입은 바 크다. 오랫동안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던 북방의 흉노를 복속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큰 업적이다. 반면 그는 늘그막에 이르러 궁중을 혼돈으로 밀어 넣은 ‘무고巫蠱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태자 유거劉据와 그의 어머니 위자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에 이르게 만들었다.『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는 무제 유철이 자신의 이런 허물을 뉘우치며 쓴 반성문이다...

한무제 유철의 추봉된 황후-이부인李夫人

위자부의 아름다운 용모도 나이를 먹어가자 스러지기 시작했다. 무제 유철의 시선은 다른 여인에게로 옮겨갔다. 조나라 출신의 왕부인王夫人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 그러나 왕부인은 아들 하나를 무제 유철에게 안기고 그만 일찍 세상을 버렸다. 이때 이부인李夫人이 때맞춰 등장한다. 이부인의 오라비 이연년李延年이 무제 유철 앞에서 부른 노래 한 곡이 이부인을 황제 곁으로 오게 만들었으니 역사는 우연이 만드는 필연처럼 극적이다.「영행열전佞幸列傳」은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아첨쟁이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이 가운데 세 번째 인물이 이연년이다. 이 부분을 먼저 보기로 한다. 이연년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그는 부모, 형제, 자매와 함께 모두 노래와 춤을 추던 배우였다. 이연년은 법을 어겨 궁형을 받은 뒤 황제의 사냥개를 담당하는..

한무제 유철의 두 번째 여인-위자부衛子夫

집안은 물론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마저 구차하고 변변치 못했던 위자부의 팔자가 백팔십도로 바뀐 건 오로지 황제의 느닷없는 굄 때문이었다. 기원전 139년, 자리에 오른 지 세 해째 되던 해 춘삼월, 열여덟 살 난 황제 유철은 복을 기원하고 재앙을 멀리하려는 마음으로 황궁 동남쪽 패상霸上으로 나아가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올리고 황궁으로 돌아오던 무제 유철이 손윗누이 평양공주의 집에 잠시 들른 게 위자부와의 첫 만남을 만들어냈다. 참으로 우연이었다. 당시 위자부는 평양공주의 한낱 가희였을 뿐이었다. 평양공주 집에는 공주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위자부도 이들 여러 미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날, 평양공주는 이들을 무제 유철에게 보였다. 그러나 무제 유철은 전혀 달가운 표정을 보..

한무제 유철의 첫 번째 여인-진아교陳阿嬌

사마천의 「외척세가」세 번째 인물 첫 번째 단락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 여태후는 자신이 득세할 때, 궁녀들을 각각 다섯 명씩 나누어 여러 제후 왕들에게 내려 보낸 일이 있었다. 당시 조나라 땅 두 씨 집안의 딸 하나가 여태후를 시중드는 직분을 받으며 입궁했었는데, 자기 뜻과는 달리 대代 땅으로 가게 되었다. 대 땅에 이른 이 여인 두 씨는 이곳 제후왕 유항의 굄을 받으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대왕 유항에게 안긴다. 유항은 여태후 천하가 끝난 뒤, 여러 대신들의 추대를 받으며 서한의 다섯 번째 황제로 자리에 오르니 이가 곧 문제이다. 여태후의 시중을 들던 궁녀 두 씨는 두황후가 된다. 문제가 붕어하자 그녀의 몸으로 낳은 맏아들 유계가 자리를 이어 오르니 이가 곧 경제이다. 대 땅에서 유항의 굄을 받으며 ..

난륜亂倫이 만든 비극-위衛 선공宣公

사마천은『사기』곳곳에 인륜을 어지럽히는 문란한 남녀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다. 게다가 군주가 맞아들인 서로 다른 빛깔의 여인들이 보이지 않게 벌이는 투쟁에다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들의 암투를 읽노라면 곧장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위衛 나라 열다섯 번째 군주 선공宣公은 이 나라 열두 번째 군주 장공莊公의 아들이다. 이들을 둘러싸고 얽히고설킨 관계를 제대로 알려면 A4 용지를 가로로 펼친 채 가계도를 그린 뒤, 한 차례 더 정리해야만 실타래가 제대로 풀린다. ‘장공 5년,……’으로 시작되는「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의 이 단락은 제나라 여자, 진陳 나라 여자1, 진나라 여자2, 애첩, 이렇게 네 여자가 장공 곁에 등장한다. 게다가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 셋도 등장한다. 사마천이 무대에 올린..

최후의 승자-박희薄姬

여치呂雉와 척부인戚夫人의 화해 없는 갈등 1. 어귀 사마천은 기전체紀傳體라는 독특한 얼개로 3천여 년의 역사를 아울렀다. 역사의 지평을 한껏 밀어 올리며 황제黃帝를 비롯한 오제五帝의 시대부터 사마천 자신이 살았던 한무제漢武帝까지의 중국 고대사를 기록한 ‘본기’는 자신의 눈에 비친 제왕들의 이야기로서 편년체編年體로 되어 있다. 이 ‘본기’ 열두 편 가운데 보란 듯이 의젓하게 한 편장을 차지한 「여태후본기」를 두고 뒤의 여러 학자들이「항우본기」와 더불어 갑론을박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여태후본기」는『이십사사二十四史』로서『사기』의 바로 뒤를 이은『전한서前漢書』도「고후기高后紀」로써 황제의 역사에 편입시켜 사마천과 같은 시각으로 취급했다. 이는「항우본기」를『한서』에서는「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으로 한데 엮은 것..

백등산白登山에 갇힌/가둔 군주-유방劉邦 & 묵돌冒顿

백등산白登山은 지금의 마포산馬鋪山, 산시성山西省 북쪽 네이멍구 자치주와 접경을 이루는 다퉁시大同市 동쪽 5km 지점에 위치한다. 기원전 200년, 서한의 개국 황제 고조 유방이 이곳에서 흉노의 선우單于 묵돌冒頓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곤욕을 치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찬찬히 짚어 보자. 더하여 잠시 찾아온 평화도 한번 셈해 보자. ▶ 머리 먼저「고조본기」부터 펼친다. 고조 7년, 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韓王 신信을 공격했다. 한왕 신은 곧 흉노와 함께 태원太原에서 모반했다. (그의 부장) 백토만구신白土曼丘臣과 왕황王黃은 원래 조나라 장군이었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세우고 한漢 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고조는 친히 나아가서 토벌했다. 七年, 匈奴攻韓王信馬邑, 信因與謀叛太原. 白土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