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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다

잘 달리는 말 열 필을 얻는 것보다 백락伯樂 한 사람 곁에 두는 게 낫고, 보검 열 자루 손에 넣는 것보다 구야歐冶 한 사람 얻는 게 나으며, 천리 땅덩이 차지하는 것보다 성인 한 분 모시는 게 낫다. 『여씨춘추呂氏春秋』「불구론不苟論」에서 데려왔다. 백락은 춘추시대 진秦 나라 사람으로 말을 잘 보기로 이름을 날렸다. 나라의 인재를 골라 쓰는 데 지혜로운 안목을 가진 이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곧잘 백락의 이야기를 끌어오곤 한다. 구야는 춘추시대에 훌륭한 검을 주조하는 데 뛰어난 인물이었다. 순舜은 고요皐陶를 씀으로써 천하를 멋지게 이끌 수 있었고, 탕湯은 이윤伊尹을 곁에 둠으로써 하夏 나라 백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주周의 문왕文王은 여망呂望을 얻었기에 은상殷商을 정복할 수 있었으니 성인 한 분 모시면 ..

산문 마당 2022.09.07

'경제'나 '안보'보다 앞서는 '신뢰'

초楚 나라 여왕厲王이 전선의 위급함을 알리는 북을 울려 백성들이 모두 방어에 나서도록 했다. 그가 술에 취한 뒤 잘못 북을 울렸기에 백성들이 매우 놀라서 허둥댔다. 여왕은 사람을 보내 백성들을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몸이 취하여 곁에 있던 측근과 농담하다가 장난삼아 북을 울리고 말았소.” 이리하여 백성들은 긴장을 늦추었다. 몇 달이 지나 전선의 위급함을 보고 받은 여왕이 북을 울렸지만 사람들은 전쟁 준비에 나서지 않았다. 여왕은 이제 명확한 경고로 바꾸어 명령을 내렸다. 그제야 백성들이 믿고 따랐다. 『한비자韓非子』「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가운데 한 부분이다. 이보다 불과 몇 십 년 전, 서주의 마지막 군주 유왕幽王이 포사褒姒의 미소 짓는 모습을 보려고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희롱한 이야기가 겹쳐서 떠오..

산문 마당 2022.09.07

물의 큰 힘

노魯 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여인의 손에 자랐기에 이제껏 무엇이 슬픔인지 그리고 무엇이 근심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무엇이 고생인지 또 무엇이 두려움인지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엇이 위험인지도 모릅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임금께서 말씀하신 건 슬기롭고 영명한 군주께서도 물으시는 문제입니다. 저 같이 하찮은 인물이 어찌 그런 것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애공이 다시 말했다. “선생이 아니면 어디 물어볼 데가 없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일렀다. “임금께서 종묘의 큰문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향해 동편 계단으로 본채에 올라 고개를 들면 서까래와 용마루가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위패가 보일 것입니다. 이런 기물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조상은 벌써 돌아가셨습니..

산문 마당 2022.09.07

참으로 귀한 것

송나라 어느 시골 사람이 박옥璞玉 한 덩어리를 손에 넣자 자한子罕에게 바쳤다. 자한이 받지 않자, 이 시골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진귀한 옥 덩어리를 어르신께서 가지셔야지 저희 같은 하찮은 사람이 쓸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한이 이렇게 일렀다. “그대는 이 옥 덩어리를 보배로 여기지만, 나는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이 옥 덩어리를 받지 않는 걸 보배로 여기오.” 『한비자韓非子』「유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이르는 송宋은 춘추시대 자그마한 제후국이다. 자한은 이 나라 조정에서 육경六卿 안에 들 만큼 높은 인물이었다. 이런 양반이 ‘옥 덩어리를 받지 않는 걸 보배로 여겼다’고 하니, 참으로 청렴결백한 관리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관리들이 있었으니, 이 나라 백성의 삶은 날이면 날마다..

산문 마당 2022.09.07

나의 소원은 '민주공화국'

조고趙高는 부소扶蘇에게 내리는 황제의 조서를 제 손에 쥐고 있었기에 공자 호해胡亥에게 이렇게 일렀다.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셨지만 왕으로 봉해진 여러 아들에게 내린 조서는 없고 오로지 맏아들에게 내린 조서만 있을 뿐입니다. 그가 오면 곧 자리에 올라 황제가 될 터인데, 그러면 그대에게는 한 뼘의 봉토도 없을 터이니, 이를 어쩌렵니까?” 趙高因留所賜扶蘇璽書, 而謂公子胡亥曰:“上崩, 無詔封王諸子而獨賜長子書. 長子至, 卽立爲皇帝, 而子無尺寸之地, 爲之奈何?” 사마천의『사기史記』「이사열전李斯列傳」가운데 환관 조고가 정변을 획책하는 부분만 떼어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부분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으며 으스스하다. 나에게는 이제 사춘기가 막 시작되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렇다, 내 나이 열세 살..

산문 마당 2022.08.01

은혜도 원수도 덕으로 갚은 사나이-한신韓信

1. 회음淮陰 소년 한신韓信을 괴롭힌 건달 사마천의 ‘열전’에는 같은 이름의 ‘한신韓信’이 둘이다. 고조 유방에게 등을 돌리고 흉노의 선우 묵돌과 손을 잡은 한신이 그 하나로서「한신·노관열전韓信·盧綰列傳」에서 그를 다루고 있다. 다른 하나는 뒷사람들에 의해 ‘병선兵仙’이니 ‘신수神帥’니 등으로 높여 불린 한나라의 개국공신 한신이다. 사마천은 작위 이름을 그대로 가져온「회음후열전」에서 그를 다룬다. 오늘, 이곳에서 이르는 한신은 ‘회음후 한신’이다. ‘회음후 한신은 회음 사람이다.’(淮陰侯韓信者, 淮陰人也.), 사마천은 이렇게 딱 한 문장으로 한신을 시작한다. 그의 가계에 대한 이야기는 뒤를 이은 여러 개의 긴 문장 중에서 단 한 줄도 찾을 수 없다. 진나라 말엽 농민 전쟁을 시작으로 초한전쟁을 거치며 유..

장자 부장莊子不葬

『장자』「잡편」〈열어구〉에서 만난 이야기 한 도막, 여기 가져온다 장자가 이제 세상을 떠나려고 하자 제자들이 그를 후하게 장사지내려고 했다. 이를 안 장자는 이렇게 일렀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곽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로 삼고, 별들을 아름다운 구슬로 삼고, 만물을 장례에 쓰는 증정품으로 삼을 터이다. 내 장례 도구가 어찌 갖추어진 셈이 아니겠는가? 여기에 뭘 더 보태리오!" 장자의 이 말에 제자들이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까마귀와 솔개가 선생님의 몸을 쪼아먹을세라 두렵습니다." 장자가 말했다. "땅 위에서는 까마귀와 솔개의 먹이가 되고, 땅 밑에서는 땅강아지와 개미의 먹이가 될 터인데, 저것들이 먹을 것을 앗아서 이것들에게 준다면 어찌 편벽되지 않으랴!" 莊子將死,弟子欲厚葬之。莊子曰:“..

백성이 곧 하늘

제齊 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에게 물었다. “임금이라면 무엇을 소중히 여겨야 할까요?” 관중이 이렇게 대답했다. “임금께서는 마땅히 하늘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환공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자 관중이 다시 말했다. “제가 말씀 올린 하늘은 가없이 넓고 넓은 하늘이 아닙니다. 임금께서 백성을 하늘로 삼으면, 백성은 임금을 지지하고 나라는 평안해지고, 임금께서 백성을 하늘로 삼으면, 백성은 임금을 도와주고 나라는 강대해집니다. 그러나 백성이 임금을 비난하면 나라는 위험에 빠지고, 백성이 임금을 배반하면 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유향劉向의『설원說苑』「건본建本」 가운데 한 부분이다. 군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내팽개친 채 주색에 빠졌던 제나라 양공襄公의 뒤를 이어 자리에 오른 환공이 춘추시대 첫 번..

하찮은 궁녀에서 황제가 된 여인-무측천

1. 아름다운 소녀의 첫 입궁 때는 정관貞觀 11년(637년) 동짓달, 당태종 이세민은 열네 살 난 무측천의 용모는 물론 행동거지가 아름답고 반듯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궁으로 불러들였다. 태종은 그녀를 재인才人에 봉하고 '무미武媚'라는 이름을 내렸다. 당나라 때 궁녀는 정1품 귀비貴妃에서부터 정8품 채녀采女까지 그 등급이 촘촘한데, 재인은 정5품, 중간에서 좀 아랫쪽에 위치한다. 그야말로 궁녀 중에서도 아랫쪽에 위치한 하찮은 궁녀였다. 이 하찮은 궁녀가 종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무측천은 입궁하기 전날, 홀로 된 그 어미 양씨에게 작별을 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진 천자를 모시는 일이 어찌 복이 아니겠습니까? 어찌 어린아이처럼 훌쩍훌쩍 우십니까?" 당태종 이세민이 황제의 자리에 있을 때, 무측천의 궁..

스스로 목숨 끊은 장군-이광李廣

1. 사마천이 만난 장군 이광 먼저 사마천이「태사공자서」에서 밝힌「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을 쓴 이유를 한 번 보자. 적을 대적함에 용감하였고, 병사들에게는 인자하고 정이 많았으며, 명령이 번거롭지 않았기에 부하들이 그를 진심으로 따랐다. 勇於當敵, 仁愛士卒, 號令不煩, 師徒鄕之. 여기에 더하여 ‘열전’ 일흔 편의 배치를 눈여겨 살피면 위청衛靑의 여러 부장 가운데 오로지 이광李廣만이 한 편을 넉넉히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큰 전공을 세우며 널리 이름을 날렸던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조차「위장군열전衛將軍列傳」뒤쪽에 자그마한 공간을 차지하며 단 몇 줄로 기술된 점과 비교하면 사마천이 장군 이광을 얼마나 중히 여겼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열전’ 말미에 붙인 ‘태사공왈’에는 또 이런 구절이 있다. 내가 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