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마당 50

법과 제도

군주의 자리에 있어도 명령이 통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온갖 기관이 이미 직분을 받았지만 상궤를 벗어나면 엉망이 된다. 법과 제도가 있지만 멋대로 마구 혜택을 베풀면 백성들은 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군주에게 존엄만 있으면 법은 널리 통할 수 있다. 또 관리가 맑고 깨끗하면 정치는 관례대로 움직일 수 있다. 법과 제도가 분명하면 백성은 형벌을 두려워한다. 법과 제도가 분명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법과 제도에 복종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백성이 법에 복종하지 않는데도 군주의 존엄을 바란다면, 군주가 요나 순처럼 지혜로워도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상군서商君書』「군신君臣」가운데 한 구절이다. 전국시대, 칠웅 가운데 서쪽 변방의 제후국 진秦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상앙商鞅이 마련한 변법이 결정적인 역할을..

산문 마당 2022.09.07

이런 순리循吏

어떤 행상이 재상에게 물고기를 올렸지만 재상은 이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행상이 이렇게 물었다. “어르신께서 물고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올리는데 무슨 까닭으로 받으려 하지 않으십니까?” 재상의 대답은 이러했다. “물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받지 않았소. 지금 이 사람은 재상으로서 물고기를 내 돈으로 살 수 있소이다. 하지만 지금 물고기를 받았다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누가 내게 물고기를 올리겠소? 그래서 받지 않았소. 사마천의 『사기史記』 「순리열전循吏列傳」에서 가져왔다. 이 글에서 재상은 춘추시대 노魯 나라에서 법을 받들어 지키기로 이름난 공의휴公儀休이다. 법을 잘 지키는 데다 백성들에게 항상 선량한 마음으로 다가갔던, 이른바 ‘순리循吏’들의 열전을 앞에 두고, 이와는 대립되어 짝을 이루는 ‘혹리..

산문 마당 2022.09.07

지신 모신 사당에 사는 쥐

지신을 모신 사당의 담은 나무막대기를 하나하나 줄 세워 엮은 뒤 진흙을 발라서 만든다. 이 안에 쥐들이 들어가서 지낸다. 불을 놓으려니 나무막대기에 불이 붙을세라 걱정이요, 물을 채우려니 진흙이 무너질세라 걱정이다. 쥐들을 없애지 못하는 건 지신을 모신 사당이기 때문이다. 『안자춘추晏子春秋』「내편內篇」에서 가져왔다. 지신 모신 사당에 사는 쥐를 잡으려니 이래저래 어렵다. 불을 태워 몰아내자니 나무막대기 하나하나 줄 세워 엮어 세운 사당의 담에 불붙을세라 걱정이요, 물을 채워 몰아내자니 진흙으로 발라 세운 담이 무너질세라 걱정이다. 머리 조아리고 꼬리 흔들며 군주의 환심 사기에 바쁜 소인배가 바로 사당에 사는 쥐와 다름없다. 이들 소인배는 온갖 아첨으로 군주의 눈을 가리며 충신들의 접근을 막을 뿐만 아니라..

산문 마당 2022.09.07

역할

예전에 어떤 이가 사냥 갈 준비를 했다. 이 양반은 송골매를 잘 몰랐기에 들오리를 한 마리 사서 들판으로 나아가서 토끼를 잡으려고 했다. 이 양반이 들오리를 공중으로 던지며 토끼를 잡도록 했으나, 들오리는 날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다시 잡아서 공중으로 던졌지만 역시 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 서너 차례 반복하자 들오리는 뒤뚱뒤뚱 이 양반 앞으로 걸어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저는 들오리입니다. 제 본분은 잡혀 먹히는 것입니다. 어찌 저를 마구 집어던져서 괴롭힌단 말입니까?” 이 말을 들은 사냥꾼 이 양반이 입을 열었다. “나는 자네가 토끼 잡을 줄 아는 송골매인 줄 알았는데, 그래, 들오리란 말인가?” 들오리는 제 발바닥을 들어 올려 보이며 사냥꾼에게 웃으며 말했다. “제 발을 보셔요, 토끼를 잡을 수..

산문 마당 2022.09.07

불상사不祥事

제齊 나라 경공景公이 사냥을 나갔다가 산에서는 호랑이를 만났고 늪지대에서는 뱀을 보았다. 사냥에서 돌아온 경공은 안자晏子를 불러 이렇게 물었다. “내 오늘 사냥을 나갔다가 산에서는 호랑이를 만났고, 산에서 내려와 늪지대를 지날 때는 뱀을 보았으니 이게 혹시 불길한 일이 아닌지 모르겠소.” 그러자 안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라에는 세 가지 불길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임금께서 방금 말씀하신 일은 여기에 없습니다. 무릇 현명한 인재가 있지만 찾을 줄 모르면, 이것이 첫 번째 불길한 일입니다. 그리고 현명한 인재인 줄 알면서도 쓰지 않으면, 이것이 두 번째 불길한 일입니다. 게다가 현명한 인재를 골라 쓰면서도 믿지 않으면, 이것이 세 번째 불길한 일입니다. 이른바 불길한 일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들입니다. ..

산문 마당 2022.09.07

죽은 천리마를 큰돈으로 산다면

소왕昭王이 이렇게 물었다. “누구를 먼저 방문해야 옳겠소?” 곽외郭隗가 입을 열었다. “신이 듣잡기로는 옛적에 어떤 임금께서 천금으로 천리마를 구하려고 했지만 세 해가 되도록 손에 넣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궁중에 시종 하나가 임금께 이렇게 아뢰었습니다. ‘저에게 사오도록 시키시기 바랍니다.’ 임금께서는 이 사람을 보냈습니다. 석 달 뒤, 이 사람이 마침내 오백 금으로 천리마를 손에 넣었습니다만, 이미 죽은 말이었습니다. 그것도 죽은 말의 머리를 오백 금이나 주고 사서 임금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임금께서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게 필요한 건 산 말이네. 죽은 말을 뭣에 쓰겠는가? 그것도 오백 금이나 주고 말일세.’ 그러나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은 말을 사면서 오백 금을 치..

산문 마당 2022.09.07

이런 사람 없어 걱정

세상에 유능한 신하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이 신하를 다루어 쓸 수 있는 군주가 없음을 걱정하라. 세상에 재화財貨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재화를 분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라. 『관자管子』「목민牧民」가운데 한 구절이다. 춘추시대, 제나라 군주 환공을 첫 번째 패자의 위치로 올려놓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관중도 신하보다는 군주에게 더 큰 책무가 있음을 앞세웠으며, ‘재화의 유무’보다는 ‘분배’가 경제에서 가장 중요함을 강조했다. 아랫사람을 골라 쓸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군주가 나라 망친 예는 우리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적잖이 찾을 수 있다. 군주가 어리석으면 잇속 차리기 바쁜 소인배들이 구린내에 파리 꾀듯 판을 친다. 이만큼 잘 사는데 불만이 들어설 틈이 어디 있느냐, 이런 물음을 던지는 이도 ..

산문 마당 2022.09.07

술맛이 좋아도 개가 무서우면

송宋 나라에 술을 빚어 파는 사람이 있었다. 술 되도 아주 공정하고 손님을 대하는 몸가짐도 조심스럽고 발랐을 뿐만 아니라 그가 빚은 술에서도 향기가 맑고 깨끗했다. 게다가 문간에 내달은 술집 광고 깃발의 위치도 자못 높았다. 그런데도 술이 팔리지 않고 오래되자 맛이 변하여 시어졌다. 까닭을 알 수 없어 갸우뚱하던 이 양반이 앞뒤를 알 만한 동네 어른 양천楊倩에게 물었다. “자네가 기르는 개가 사나운가?” 술을 빚어 파는 이 양반이 되물었다. “개가 사납다고 술이 팔리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사람들이 자네가 기르는 개를 두려워한다네. 아이에게 돈을 주고 주전자 들려 술을 사오라고 했을 때, 자네 개가 뛰어나와 깨물겠지. 이 때문에 술이 팔리지 않고 맛이 변하여 쉬는 걸세.” 『한비자韓非子』「외저설우상外..

산문 마당 2022.09.07

사람이다

잘 달리는 말 열 필을 얻는 것보다 백락伯樂 한 사람 곁에 두는 게 낫고, 보검 열 자루 손에 넣는 것보다 구야歐冶 한 사람 얻는 게 나으며, 천리 땅덩이 차지하는 것보다 성인 한 분 모시는 게 낫다. 『여씨춘추呂氏春秋』「불구론不苟論」에서 데려왔다. 백락은 춘추시대 진秦 나라 사람으로 말을 잘 보기로 이름을 날렸다. 나라의 인재를 골라 쓰는 데 지혜로운 안목을 가진 이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곧잘 백락의 이야기를 끌어오곤 한다. 구야는 춘추시대에 훌륭한 검을 주조하는 데 뛰어난 인물이었다. 순舜은 고요皐陶를 씀으로써 천하를 멋지게 이끌 수 있었고, 탕湯은 이윤伊尹을 곁에 둠으로써 하夏 나라 백성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주周의 문왕文王은 여망呂望을 얻었기에 은상殷商을 정복할 수 있었으니 성인 한 분 모시면 ..

산문 마당 2022.09.07

'경제'나 '안보'보다 앞서는 '신뢰'

초楚 나라 여왕厲王이 전선의 위급함을 알리는 북을 울려 백성들이 모두 방어에 나서도록 했다. 그가 술에 취한 뒤 잘못 북을 울렸기에 백성들이 매우 놀라서 허둥댔다. 여왕은 사람을 보내 백성들을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이 몸이 취하여 곁에 있던 측근과 농담하다가 장난삼아 북을 울리고 말았소.” 이리하여 백성들은 긴장을 늦추었다. 몇 달이 지나 전선의 위급함을 보고 받은 여왕이 북을 울렸지만 사람들은 전쟁 준비에 나서지 않았다. 여왕은 이제 명확한 경고로 바꾸어 명령을 내렸다. 그제야 백성들이 믿고 따랐다. 『한비자韓非子』「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가운데 한 부분이다. 이보다 불과 몇 십 년 전, 서주의 마지막 군주 유왕幽王이 포사褒姒의 미소 짓는 모습을 보려고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희롱한 이야기가 겹쳐서 떠오..

산문 마당 2022.09.07

물의 큰 힘

노魯 나라 애공哀公이 공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여인의 손에 자랐기에 이제껏 무엇이 슬픔인지 그리고 무엇이 근심인지 모릅니다. 게다가 무엇이 고생인지 또 무엇이 두려움인지 모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무엇이 위험인지도 모릅니다.” 공자가 대답했다. “임금께서 말씀하신 건 슬기롭고 영명한 군주께서도 물으시는 문제입니다. 저 같이 하찮은 인물이 어찌 그런 것들을 알 수 있겠습니까?” 애공이 다시 말했다. “선생이 아니면 어디 물어볼 데가 없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이렇게 일렀다. “임금께서 종묘의 큰문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향해 동편 계단으로 본채에 올라 고개를 들면 서까래와 용마루가 보이고 고개를 숙이면 위패가 보일 것입니다. 이런 기물은 여전히 거기 있지만 조상은 벌써 돌아가셨습니..

산문 마당 2022.09.07

참으로 귀한 것

송나라 어느 시골 사람이 박옥璞玉 한 덩어리를 손에 넣자 자한子罕에게 바쳤다. 자한이 받지 않자, 이 시골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진귀한 옥 덩어리를 어르신께서 가지셔야지 저희 같은 하찮은 사람이 쓸 수는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자한이 이렇게 일렀다. “그대는 이 옥 덩어리를 보배로 여기지만, 나는 그대가 보배로 여기는 이 옥 덩어리를 받지 않는 걸 보배로 여기오.” 『한비자韓非子』「유로」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이르는 송宋은 춘추시대 자그마한 제후국이다. 자한은 이 나라 조정에서 육경六卿 안에 들 만큼 높은 인물이었다. 이런 양반이 ‘옥 덩어리를 받지 않는 걸 보배로 여겼다’고 하니, 참으로 청렴결백한 관리였음이 분명하다. 이런 관리들이 있었으니, 이 나라 백성의 삶은 날이면 날마다..

산문 마당 2022.09.07

나의 소원은 '민주공화국'

조고趙高는 부소扶蘇에게 내리는 황제의 조서를 제 손에 쥐고 있었기에 공자 호해胡亥에게 이렇게 일렀다. “황제께서 세상을 떠나셨지만 왕으로 봉해진 여러 아들에게 내린 조서는 없고 오로지 맏아들에게 내린 조서만 있을 뿐입니다. 그가 오면 곧 자리에 올라 황제가 될 터인데, 그러면 그대에게는 한 뼘의 봉토도 없을 터이니, 이를 어쩌렵니까?” 趙高因留所賜扶蘇璽書, 而謂公子胡亥曰:“上崩, 無詔封王諸子而獨賜長子書. 長子至, 卽立爲皇帝, 而子無尺寸之地, 爲之奈何?” 사마천의『사기史記』「이사열전李斯列傳」가운데 환관 조고가 정변을 획책하는 부분만 떼어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부분을 읽으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으며 으스스하다. 나에게는 이제 사춘기가 막 시작되던 그때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그렇다, 내 나이 열세 살..

산문 마당 2022.08.01

국어의 모습-열 시 십 분과 열 시 열 분

우리말에서 시각을 나타낼 때, 시는 고유어로, 분은 한자어로 말하게 된다. 왜 그런가? 이유는 없다. 그러니까 그렇다. 이것을 언어가 가진 특징 중 자의성(恣意性)이라고 한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우리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도 않고 쓰고 있으며 틀리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이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닌 모양이다. 십 시 십 분이나 열 시 열 분이 속을 썩인다고 한다. 아! 나에겐 아름다운 우리 한국어! 나의 모국어!

산문 마당 2022.05.19

하느님과 하나님

기독교에서 신봉하는 유일신을 로마 가톨릭교(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개신교의 세력이 가톨릭교의 세력보다 더 큰 터라,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이 하느님을 점차 밀어내고 있는 듯하며, 이것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이들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문법에 관계없이 사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말할 나위 없이 둘 가운데 옳은 말은 하느님이다. 우리말의 수사 ‘하나’에 존칭 접미사 ‘님’을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애국가 중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부를 때는 주의할 일이다. 물론 개신교에서 저희들끼리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말릴 수 없지만.

산문 마당 2022.05.18

오리무중 五里霧中

옛적에 기린을 본 적이 없는 이가 일찍이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기린은 어떻게 생겼소?”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기린은 꼭 기린처럼 생겼소.” 물었던 이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기린을 진즉 보았더라면 그대에게 묻지도 않았을 거외다. 그런데 그대가 기린은 꼭 기린처럼 생겼다고 말하니, 어떻게 알 수 있겠소?” 그러자 기린을 본 적이 있는 이가 이렇게 일렀다. “기린은요, 몸은 사슴의 몸이요, 꼬리는 소의 꼬리이며, 발굽은 사슴의 발굽이고, 등은 말의 등입니다.” 물었던 이가 그제야 알아들었다. 모자牟子의 『모자 이혹론牟子理惑論』가운데 한 부분을 가져왔다. 기린을 본 적 없는 이에게 ‘기린은 꼭 기린처럼 생겼다.’는 설명은 듣는 이를 종잡을 수 없게 만든다. ..

산문 마당 2022.01.18

쟁공爭功

입과 코가 누가 더 지위가 높은지 쟁론을 벌였다. 입이 먼저 말했다. “나는 예와 지금의 시비를 논할 수 있는데, 네가 어떻게 나보다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어?” 이 말을 들은 코도 내받았다. “마실 것 먹을 것 모두 나 없으면 나누어 가를 수 없는데.” 그러자 눈이 코에게 말했다. “나는 가까이 솜털의 끝까지 가려내고 멀리 하늘 저 끝까지 살필 수 있으니 나를 제일 앞에 두어야지.” 또 눈썹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넨 무슨 공을 세웠다고 내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가?” 눈썹이 입을 열었다. “나는 비록 주인에 대한 손님처럼 아무 쓸모없다고는 하지만, 주인도 손님 없으면 예의를 차릴 수 없지. 만약 나 눈썹이 없다면 어떻게 얼굴 꼴을 갖추겠어?” 북송北宋의 왕당王讜이 엮은『당어림唐語林』에서 가져왔다. 조선..

산문 마당 2022.01.18

우리말의 속살

한국어를 모국어로 익힌 우리는 시각을 나타낼 때, '시'는 고유어와 짝을 이루고, '분'은 한자어와 짝을 짓는 데 아무런 저항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한, 두, 세, 네, 다섯...열'은 '시'와 결합하고 '일, 이, 삼, 사, 오...십'은 '분'과 결합한다. 우리말에는 수를 나타내는 말에도 고유어와 한자어가 서로 짝을 이룬다. '한, 두, 세, 네...'는 고유어이며 '일, 이, 삼, 사...'는 한자어이다. 양을 셈하든 차례를 나타내든 고유어와 한자어가 함께한다. 대체로 '한, 두, 세, 네...'와 만나는 의존명사는 고유어인 경우에, '일, 이 삼, 사...'와 만나는 의존명사는 한자어인 경우에 결합한다. 예컨대, '한 살, 두 살, 세 살, 네 살...'로, '일 세, 이 세, 삼 세, 사 ..

산문 마당 2021.10.07

'장님'의 높임말이 '시각 장애인'?

춘추시대 진晉 나라 악사 사광師曠은 날 때부터 앞을 못 보았다. 그는 앞을 못 보았지만 당시 이 나라 군주 평공平公 앞에서도 거침없이 시비를 따지며 바른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는 한 편의 글을 쓰기에 넉넉한 글감이었다. 그런데 나는 첫 문장부터 속앓이를 해야 했다. "사광은 앞 못 보는 장님이었다." 한 편의 글을 위해 맨 앞에 내세운 이 문장에서 낱말 하나가 옹근 하루 내 속을 태웠다. '장님' 때문이었다. '장님'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본 게 속앓이의 머리였다. 먼저 국립국어원에서 인터넷에 올린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았다. -'시각 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 올림말 '장님'에 대한 풀이였다. '어!', 깜짝 놀랐다. 그리고 '세상에!', 가볍게 몸이 떨렸다. '소경'이나 '봉사'라는 낱말과 똑같..

산문 마당 2021.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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