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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파국으로 이끈 군주의 난륜-위선공衛宣公

사마천은『사기』곳곳에 인륜을 어지럽히는 문란한 남녀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다. 게다가 군주가 맞아들인 서로 다른 빛깔의 여인들이 보이지 않게 벌이는 투쟁에다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들의 암투를 읽노라면 곧장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으로 우리를 이끈다. 위衛 나라 열다섯 번째 군주 선공宣公은 이 나라 열두 번째 군주 장공莊公의 아들이다. 이들을 둘러싸고 얽히고설킨 관계를 제대로 알려면 A4 용지를 가로로 펼친 채 가계도를 그린 뒤, 한 차례 더 정리해야만 실타래가 제대로 풀린다. ‘장공 5년,……’으로 시작되는「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의 이 단락은 제나라 여자, 진陳 나라 여자1, 진나라 여자2, 애첩, 이렇게 네 여자가 장공 곁에 등장한다. 게다가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 셋도 등장한다. 사마천이 무대에..

귀 닫은 군주의 최후-송宋 양공襄公

몇 백 년 이어오던 주周 왕실이 무너진 것도 또한 왕조가 바뀔 수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당장은 서북쪽 변방에 살던 이민족 견융족犬戎族의 공격 때문이었다. 이렇게 서주西周는 유왕幽王을 끝으로 막을 내리고 태자의 자리에서 내쳐졌던 의구宜臼가 제후들의 추대로 평왕平王으로 왕위에 오르니 바로 동주東周의 시작이다. 때는 기원전 770년, 바로 춘추전국시대는 이로써 비롯된다. 그 앞쪽,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이,『좌전左傳』에 따르면 14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니, 경계를 맞댄 이웃끼리 벌어졌을 다툼을 가히 상상할 만하다.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지 130년을 이제 막 지난 기원전 638년, 송宋 나라와 초楚 나라가 맞붙었다. 당시 송나라의 군주는 양공襄公, 초나라의 군주는 성왕成王이었다. 여기서 주周..

한무제 유철이 각별히 대우한 여인-젖어머니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무제 유철의 생모는 왕지王娡이다. 이 여인은 애초 금왕손金王孫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를 낳았지만 그녀의 어미를 따라 황태자 유계劉啓의 궁중에 들어와서 미인美人에 봉해진다. 유계는 서한의 여섯 번째 황제로 자리에 오르니, 이 곧 경제景帝이다. 왕미인이 경제에게 안긴 아들이 바로 유철이다. 유철은 왕미인에게는 첫 번째 아들이지만 경제에게는 열 번째 아들이다. 왕미인의 몸으로 낳은 유철에게는 유모가 따로 있었다. 유모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자못 특수한 여인’이었다. 자신의 몸에서 만들어진 따스한 젖을 받아먹으며 자란 아이가 귀족의 자제일 경우 이 여인의 신분도 따라서 현귀해질 수 있었다. 성인이 된 왕공 귀족의 자제는 그 아비의 신분을 그대로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어린 시절 ..

한무제 유철이 죽인 여인-구익부인鉤弋夫人

서한의 일곱 번째 황제 무제 유철은 열여섯에 등극하여 일흔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쉰다섯 해 동안 절대 왕권을 휘둘렀다. 재위 기간이 긴 만큼 역사에 남긴 업적도 적지 않지만 어두운 흔적도 또한 적지 않다. 중국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강대한 제국의 바탕을 마련하며 지구 서쪽 로마 제국에 결코 뒤지지 않는 문명을 이룩한 데는 무제 유철의 공로에 힘입은 바 크다. 오랫동안 제국의 안녕을 위협하던 북방의 흉노를 복속시킨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큰 업적이다. 반면 그는 늘그막에 이르러 궁중을 혼돈으로 밀어 넣은 ‘무고巫蠱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태자 유거劉据와 그의 어머니 위자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에 이르게 만들었다.『윤대죄기조輪臺罪己詔』는 무제 유철이 자신의 이런 허물을 뉘우치며 쓴 반성문이다...

한무제 유철의 추봉된 황후-이부인李夫人

위자부의 아름다운 용모도 나이를 먹어가자 스러지기 시작했다. 무제 유철의 시선은 다른 여인에게로 옮겨갔다. 조나라 출신의 왕부인王夫人이 바로 이 여인이었다. 그러나 왕부인은 아들 하나를 무제 유철에게 안기고 그만 일찍 세상을 버렸다. 이때 이부인李夫人이 때맞춰 등장한다. 이부인의 오라비 이연년李延年이 무제 유철 앞에서 부른 노래 한 곡이 이부인을 황제 곁으로 오게 만들었으니 역사는 우연이 만드는 필연처럼 극적이다.「영행열전佞幸列傳」은 황제의 총애를 받았던 아첨쟁이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이 가운데 세 번째 인물이 이연년이다. 이 부분을 먼저 보기로 한다. 이연년은 중산中山 사람이다. 그는 부모, 형제, 자매와 함께 모두 노래와 춤을 추던 배우였다. 이연년은 법을 어겨 궁형을 받은 뒤 황제의 사냥개를 담당하는..

한무제 유철의 두 번째 여인-위자부衛子夫

집안은 물론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마저 구차하고 변변치 못했던 위자부의 팔자가 백팔십도로 바뀐 건 오로지 황제의 느닷없는 굄 때문이었다. 기원전 139년, 자리에 오른 지 세 해째 되던 해 춘삼월, 열여덟 살 난 황제 유철은 복을 기원하고 재앙을 멀리하려는 마음으로 황궁 동남쪽 패상霸上으로 나아가서 선조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제사를 올리고 황궁으로 돌아오던 무제 유철이 손윗누이 평양공주의 집에 잠시 들른 게 위자부와의 첫 만남을 만들어냈다. 참으로 우연이었다. 당시 위자부는 평양공주의 한낱 가희였을 뿐이었다. 평양공주 집에는 공주의 시중을 드는 여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위자부도 이들 여러 미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날, 평양공주는 이들을 무제 유철에게 보였다. 그러나 무제 유철은 전혀 달가운 표정을 보..

한무제 유철의 첫 번째 여인-진아교陳阿嬌

사마천의 「외척세가」세 번째 인물 첫 번째 단락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 여태후는 자신이 득세할 때, 궁녀들을 각각 다섯 명씩 나누어 여러 제후 왕들에게 내려 보낸 일이 있었다. 당시 조나라 땅 두 씨 집안의 딸 하나가 여태후를 시중드는 직분을 받으며 입궁했었는데, 자기 뜻과는 달리 대代 땅으로 가게 되었다. 대 땅에 이른 이 여인 두 씨는 이곳 제후왕 유항의 굄을 받으며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대왕 유항에게 안긴다. 유항은 여태후 천하가 끝난 뒤, 여러 대신들의 추대를 받으며 서한의 다섯 번째 황제로 자리에 오르니 이가 곧 문제이다. 여태후의 시중을 들던 궁녀 두 씨는 두황후가 된다. 문제가 붕어하자 그녀의 몸으로 낳은 맏아들 유계가 자리를 이어 오르니 이가 곧 경제이다. 대 땅에서 유항의 굄을 받으며 ..

난륜亂倫이 만든 비극-위衛 선공宣公

사마천은『사기』곳곳에 인륜을 어지럽히는 문란한 남녀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다. 게다가 군주가 맞아들인 서로 다른 빛깔의 여인들이 보이지 않게 벌이는 투쟁에다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들의 암투를 읽노라면 곧장 나라가 무너질 것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힌다. 위衛 나라 열다섯 번째 군주 선공宣公은 이 나라 열두 번째 군주 장공莊公의 아들이다. 이들을 둘러싸고 얽히고설킨 관계를 제대로 알려면 A4 용지를 가로로 펼친 채 가계도를 그린 뒤, 한 차례 더 정리해야만 실타래가 제대로 풀린다. ‘장공 5년,……’으로 시작되는「위강숙세가衛康叔世家」의 이 단락은 제나라 여자, 진陳 나라 여자1, 진나라 여자2, 애첩, 이렇게 네 여자가 장공 곁에 등장한다. 게다가 이들이 낳은 배다른 형제 셋도 등장한다. 사마천이 무대에 올린..

최후의 승자-박희薄姬

여치呂雉와 척부인戚夫人의 화해 없는 갈등 1. 어귀 사마천은 기전체紀傳體라는 독특한 얼개로 3천여 년의 역사를 아울렀다. 역사의 지평을 한껏 밀어 올리며 황제黃帝를 비롯한 오제五帝의 시대부터 사마천 자신이 살았던 한무제漢武帝까지의 중국 고대사를 기록한 ‘본기’는 자신의 눈에 비친 제왕들의 이야기로서 편년체編年體로 되어 있다. 이 ‘본기’ 열두 편 가운데 보란 듯이 의젓하게 한 편장을 차지한 「여태후본기」를 두고 뒤의 여러 학자들이「항우본기」와 더불어 갑론을박을 이어오고 있다. 하지만「여태후본기」는『이십사사二十四史』로서『사기』의 바로 뒤를 이은『전한서前漢書』도「고후기高后紀」로써 황제의 역사에 편입시켜 사마천과 같은 시각으로 취급했다. 이는「항우본기」를『한서』에서는「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으로 한데 엮은 것..

백등산白登山에 갇힌/가둔 군주-유방劉邦 & 묵돌冒顿

백등산白登山은 지금의 마포산馬鋪山, 산시성山西省 북쪽 네이멍구 자치주와 접경을 이루는 다퉁시大同市 동쪽 5km 지점에 위치한다. 기원전 200년, 서한의 개국 황제 고조 유방이 이곳에서 흉노의 선우單于 묵돌冒頓에게 겹겹이 포위되어 곤욕을 치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찬찬히 짚어 보자. 더하여 잠시 찾아온 평화도 한번 셈해 보자. ▶ 머리 먼저「고조본기」부터 펼친다. 고조 7년, 흉노가 마읍馬邑에서 한왕韓王 신信을 공격했다. 한왕 신은 곧 흉노와 함께 태원太原에서 모반했다. (그의 부장) 백토만구신白土曼丘臣과 왕황王黃은 원래 조나라 장군이었던 조리趙利를 왕으로 세우고 한漢 나라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고조는 친히 나아가서 토벌했다. 七年, 匈奴攻韓王信馬邑, 信因與謀叛太原. 白土曼..

청루靑樓의 여인이 된 황후②-목야리穆邪利

후주의 황후 목씨穆氏의 이름은 야리邪利이다. 본시 (북제 후주의 첫 번째 황후) 곡률후斛律后의 여종이었다. 後主皇后穆氏, 名邪利, 本斛律后從婢也. 『북제서北齊書』 「열전제일列傳第一」 남북조 시대 북제의 역사를 보면, 그 넓은 땅덩어리를 차지하고 잇달아 자리에 오른 여섯 황제가 스물여덟 해나 통치했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이다. 여섯 황제가 거의 하나같이 잔혹한데다 황음무도했으며 변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형인 고징高澄의 정실부인을 간음까지 한 데다 술을 마시면 입었던 옷을 몽땅 벗어버리고 알몸 달리기를 했던 문선제 고양은 북제의 첫 번째 황제였으며, 열여섯 살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제법 민생에 관심을 두고 국력을 높이는 데 힘을 쏟았던 두 번째 황제 고은高殷은 이태도 채우지 못하고 열일곱 살 한창 나..

보석처럼 빛난 여인-우맹優孟의 아내

『공자가어孔子家語』에는 공자가 초楚 나라 장왕莊王을 가리켜 ‘어질고 착하구나, 초왕이여! 천승千乘의 나라를 가벼이 여기고 한 마디 말을 소중히 여겼구나.’, 이렇게 찬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장왕은 자그마한 제후국 진陳 나라 군주 영공을 시해한 하징서夏徵舒를 죽이고 이 나라를 초나라의 일개 현으로 만들었다. 그 뒤, 그는 신숙시申叔時의 ‘하징서가 그의 임금을 시해했다고 해서 여러 제후들의 군대를 모아 정의라는 이름으로 징벌하고 또 얼마 뒤에 그 땅까지 차지한다면 어떻게 천하를 호령할 수 있겠느냐?’는 간언에 귀를 기울여 진나라를 후손에 돌려주었다. 공자가 한 말은 바로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이렇게 초나라 장왕은 신하의 간언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초나라 장왕이 처음부터 이렇게 귀를 너그럽게 열지..

분수를 안 사나이-도양열屠羊說과 범려范蠡

초나라 소왕이 나라를 잃어버리자 도양열은 소왕을 따라 나라 밖으로 몸을 피했다. 소왕이 초나라로 돌아와 자기를 따른 이들에게 상을 내리려고 했다. 도양열에게도 상을 내리려고 했다. 그러자 도양열은 이렇게 아뢨다. “당시 대왕께서 나라를 잃으셨을 때, 저는 짐승 잡는 직업을 잃었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나라를 찾으시고 저 또한 제 직업을 되찾았는데 무슨 상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楚昭王失國, 屠羊說走而從于昭王. 昭王反國, 將賞從者, 及屠羊說. 屠羊說曰 : “大王失國, 說失屠羊 ; 大王反國, 說亦反屠羊. 臣之爵祿已復矣, 又何賞之有!” 『장자莊子』「양왕편讓王篇」 범려가 간언하여 말했다. “아니 되옵니다. 제가 듣기로 무기는 흉기이고, 전쟁은 덕을 거스르는 것이며, 다툼은 일 가운데 제일 못난 것입니다. 남몰래 ..

포악한 군주에게 희생된 장인-간장干將과 막야莫邪

간장과 막야가 진晉 나라 군주에게 올릴 검을 세 해 만에 만들었다. 자웅 한 쌍의 이 검은 이 세상에서 참으로 진귀한 기물이었다. 이 한 쌍의 검 가운데 자검雌劍은 군주에게 올리고 웅검雄劍은 남겨 두었다. 간장은 아내 막야에게 이렇게 일렀다. “내가 남은 검 하나를 남쪽 산의 북쪽이며 북쪽 산의 남쪽 돌 위에 소나무가 있는 곳에 감추어 두었소. 임금께서 이제 나를 죽일 것인즉, 그대가 사내를 낳으면 내 말을 들려주시구려.” 干將莫耶爲晉君作劍, 三年而成, 劍有雌雄, 天下名器也. 乃以雌劍獻君, 留其雄者. 謂其妻曰 : “吾藏劍南山之陰, 北山之陽, 松生石上, 劍在其中矣. 君若覺, 殺我. 爾生男以告之.” -유향劉向의『열사전列士傳』 간장과 막야 없애버리면, 이 세상 어둠 누가 물리치나. 요괴 다 베고 나니 온갖 귀..

난세가 만든 불행-채문희蔡文姬

한낮엔 울면서 걸음 옮겼고, 밤이면 슬픔으로 눈물 흘렸네. 죽으려 해도 죽지 못했고, 살려고 해도 한 점 희망 없었네. 하늘이여, 무슨 잘못 했기에, 이런 재앙 만나게 했나. 변경 거친 땅은 중원과 같지 않고, 인성은 거칠어 예의를 따지지 않네. 旦則號泣行, 夜則悲吟坐. 欲死不能得, 欲生無一可. 彼蒼者何辜, 乃遭此厄禍. 邊荒與華異, 人俗少義理. 채문희의 부분이다. 이런 고통을 견뎌야 했던 그녀의 피맺힌 한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역사가 만든 '소용돌이'는 재능 넘치는 그녀를 그냥 두지 않았던 것이다. 소용돌이. 국어사전은 이 낱말을 '바닥이 팬 자리에서 물이 빙빙 돌면서 흐르는 현상, 또는 그런 곳.'이라고 풀이했다. 그리고 '힘이 뒤엉켜 요란스러운 상태'를 비유한다고 덧붙였다. 동한 말엽에 태어나 삼국..

재상이 된 개백정-번쾌樊噲

1. 패현 땅의 개백정 무양후舞陽侯 번쾌樊噲는 패현沛縣 사람이다. 그는 개 잡는 일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고조와 함께 숨어 살기도 했다. 舞陽侯樊噲者, 沛人也. 以屠狗爲事, 與高祖俱隱. 「번·역·등·관열전樊酈滕灌列傳」의 첫 번째 단락 두 문장을 몽땅 가져왔다. 이 편은 고조 유방의 충성스러운 장수 번쾌, 역상酈商, 하후영夏侯嬰, 그리고 관영灌嬰, 이 네 사람의 합전으로서 초한전쟁을 거쳐 한나라를 여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들의 전기이다. 이들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었다. 신분으로 따지자면 철저히 ‘지체가 한껏 낮은 사람들’이었지만 난세가 만들어 낸 시대 변화 속에서 신분 상승을 스스로 이뤄낸 영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번쾌의 고향 패현은 곧 고조 유방의 고향이다. 이들 두 사람은 진나라 말엽에 재앙을 피하기..

세 치 혀의 해학-동방삭東方朔

한나라 무제 유철은 황제에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질고 착한 인재를 불러 쓰겠다고 널리 알렸다. 이때, 제나라 사람 동방삭東方朔이 장안으로 올라와서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는 글을 올렸다. 그것도 황제에게 상주할 때 쓰는 죽간 3천 장에 이르는 긴 글이었기에 한무제 유철이 이를 읽는 데만 두 달이 꼬박 걸렸다고 하니, 동방삭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때부터 예사롭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격이 익살스럽고 언사가 민첩한데다 재치까지 넘쳐서 무제 유철도 늘 그와 자리를 함께하며 담소하기를 즐겼다. 그러나 무제 유철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방삭을 익살과 재치 넘치는 광대로 취급하며 높여 쓰지 않았다. 사마천은 ‘열전’ 70편 가운데「골계열전滑稽列傳」의 여러 인물 가운데 동방삭을 넣어 그의 언행을 기록했다..

양수청풍兩袖淸風-왕이열王爾烈

맑은 개울 사슴이 건넜어도 이끼는 차분하네. 幽溪鹿過還苔靜. 어려서부터 어른들 곁에 기웃거리길 좋아하던 왕이열王爾烈이었다. 지방의 풍토와 특색을 이야깃거리로 삼았지만 마침내 나라의 큰일에 이르러 설왕설래할 때면 어린 왕이열은 귀를 쫑긋 세우고 온 마음을 다 기울였다. 어른들도 그의 비범함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시구 한 구절을 던지며 짝이 되는 구절을 읊도록 채근하는 일이 잦았다. 앞에 든 시구는 탁월한 안목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던 승려 한 분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다 마침 명사들을 초대하여 시회를 벌이던 이 집에 들러 왕이열을 특별히 지명하며 내놓은 시구이다. 여러 사람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며 왕이열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 시구에 짝이 될 대련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깊은 산에 구름이 덮였어도..

그 아버지에 그 아들-진만년陳萬年과 진함陳咸

진만년은 조정의 중신이었다. 일찍이 병이 들어 그 아들 진함을 침상 곁으로 불러 훈계했다. 삼경에 이르자 아들 진함이 잠이 들어 머리를 병풍에 부딪쳤다. 진만년은 크게 화를 내며 막대기로 치려고 했다. “아비가 지금 너를 훈계하고 있거늘, 너는 오히려 잠을 자며 아비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고?” 진함은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이렇게 아뢰었다. “다 듣고 있습니다. 요지는 그저 아첨하면 된다는 말씀이지요.” 진만년은 감히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陳萬年乃朝中重臣也, 嘗病, 召其子咸戒于床下. 語至三更, 咸睡, 頭觸屛風. 萬年大怒, 欲杖之, 曰 : “乃公戒汝, 汝反睡, 不聽吾言, 何也?” 咸叩頭謝曰 : “具曉所言, 大要敎咸諂也.” 萬年乃不敢復言. 『한서漢書』 「진만년전陳萬年傳」 관아 곡식..

중국 고대 10대 음악가

1. 백아伯牙 춘추시대 현악기 연주가. 편에 '백아가 칠현금을 연주하면 말도 머리 들고 귀기울였다'는 이야기가 있으니, 이로써 그의 연주 수준이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와 등이 있다. 2. 사광師曠 춘추시대 진晉의 연주가. 두 눈이 모두 멀었으나 청각이 대단히 예민하여 음률을 정확하게 판별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과 이 있다. 3. 이연년 서한 때의 궁정 음악가. 일찍이 음악을 관장하는 악부樂府에서 협률도위協律都尉를 지냈다. 대표작품으로는 장건張騫이 서역에서 가지고 온 을 바탕으로 28수의 새로은 곡조를 만들어서 의장대의 군악으로 사용했다. 4. 혜강嵇康 삼국시기 위魏 나라 말엽의 거문고 연주가, 문학가, 사상가. 깊은 학식에 시부에도 능했다. 음악을 그야말로 뜨겁..

국어의 모습-열 시 십 분과 열 시 열 분

우리말에서 시각을 나타낼 때, 시는 고유어로, 분은 한자어로 말하게 된다. 왜 그런가? 이유는 없다. 그러니까 그렇다. 이것을 언어가 가진 특징 중 자의성(恣意性)이라고 한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는 우리는 그 이유를 생각해 보지도 않고 쓰고 있으며 틀리게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이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닌 모양이다. 십 시 십 분이나 열 시 열 분이 속을 썩인다고 한다. 아! 나에겐 아름다운 우리 한국어! 나의 모국어!

산문 마당 2022.05.19

시대가 몰라본 천재 음악가-만보상萬寶常

만보상이 어느 곳 출신인지 알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 만대통萬大通은 양梁의 장군 왕림 王琳을 따라 북제北齊로 귀순했다. 뒷날 강남의 양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피살되었다. 이 때문에 만보상은 주악을 관장하는 악호樂戶로 유배되었다. 그가 음률에 정통한데다 갖가지 악기를 능속하게 다루었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옥경玉磬을 만들어 북제의 황제에게 바치기까지 했다. 萬寶常, 不知何許人也. 父大通, 從梁將王琳歸于齊. 後復謀還江南, 事泄, 伏誅. 由是寶常被配爲樂戶, 因而妙達鍾律, 遍工八音. 造玉磬以獻于齊. 『수서隋書』「만보상열전萬寶常列傳」 사수泗水 돌 잘라 경쇠를 만드니, 옛 음악 소박하다 듣는 이 적었다네. 악공이 천시 받아 백아伯牙 사광師曠 드물어지니, 사악한 소리 가리지 못하고 바른 소리 싫어했..

하느님과 하나님

기독교에서 신봉하는 유일신을 로마 가톨릭교(천주교)에서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에서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개신교의 세력이 가톨릭교의 세력보다 더 큰 터라,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하나님이 하느님을 점차 밀어내고 있는 듯하며, 이것은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이들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문법에 관계없이 사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말할 나위 없이 둘 가운데 옳은 말은 하느님이다. 우리말의 수사 ‘하나’에 존칭 접미사 ‘님’을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애국가 중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부를 때는 주의할 일이다. 물론 개신교에서 저희들끼리 ‘하나님’이라 부르는 것은 말릴 수 없지만.

산문 마당 2022.05.18

피를 토하고 죽은 참장군 - 주아부周亞夫

1. 관상 한나라 초기, 허부許負는 나라 안에 이름을 날리던 관상쟁이였다. 관상에 관한 저서까지 남길 정도였던 그녀는 사마천이「유협열전游俠列傳」에 데려온 협객 곽해郭解의 외할머니였다. 주아부周亞夫가 그녀를 불러 자기 관상을 맡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세상에 명성이 자자한 그녀에게 자기 얼굴을 보이며 앞날을 알고 싶은 이는 이미 주아부 혼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세 해 뒤 후에 봉해지고, 다시 여덟 해가 지나 장군과 승상이 되어 큰 권력을 잡을 것이라는 허부의 말에 주아부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버지 주발周勃에게 주아부는 맏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당연히 맏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며 맏아들이 죽더라도 그의 아들이 작위를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부가 내어놓은 그 다..

사마천의 외딸-사마영司馬英

『사기』는 우리를 한껏 압도하는 엄청나고 굉장한 무대이다. 등장인물의 숫자만 해도 4천여 명, 이들이 종횡무진 활동하는 범위도 그들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던 중원을 넘어 동서남북 주변 국가까지 포섭한다. 지난 네 해 동안, 내가 살고 있는 이곳 ‘00도서관’에서 학인들과 함께 사마천의 『사기』를 강독하면서 서로 많은 것들을 주고받으며 당시의 역사 인물을 되살리느라 자못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이 모임을 이끌면서 특별히 여인들의 삶에 눈길을 주었고, 그 결과 오늘 ‘00필 선생이 『사기』에서 만난 여인’을 쓰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 곁에 있었던 여인들이 궁금했지만 『사기』에서는 정작 찾을 수 없었다. ‘열전’ 마지막 편「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에서도 그의 가계와 아버지의 모습은..

항우를 파국으로 이끈 사나이-나이 지긋한 농부

사마천이 붓 들어 슬쩍 지나치듯이 한 차례 언급한 인물을 책장 덮고 다시 곰곰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인물이 바로 그 순간에 바로 저런 행동을 했기에 바로 이런 결과로 나타났구나, 이렇게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인물이 바로 그 순간에 바로 저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이렇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이렇게 생각하며 나름대로 정리하기도 한다. 지난 날 일어났던 수도 없이 많은 사건은 모두 역사가 될 수 있지만 그 많은 사건이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다 기록되는 일은 없다. 그 많은 사건 가운데 기록으로 남으려면 선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선택하는가? 역사를 기록하는 이가 선택한다. 어떻게 선택할까? 선택하는 이의 기준에 맞갖아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은 모..

전쟁의 도화선이 된 웃음-소동숙자蕭桐叔子

제齊 나라에 사신으로 온 각극卻克은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그는 당시 진晉 나라의 집정 대신으로서 군사상 최고지휘관을 겸하고 있었다. 사달은 제나라 군주 경공頃公의 잘못된 판단과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터뜨린 그의 어머니의 경솔함이 합하여 크게 번지고 말았다. 선왕 혜공惠公의 정실 소씨蕭氏는 제나라에 예속된 자그마한 나라 소국蕭國의 군주 동숙桐叔의 딸이었다. 역사는 그녀를 ‘소동숙蕭桐叔의 딸’이라 일컫는다. 그녀는 혜공에게 시집온 뒤 아들 무야無野를 낳았다. 혜공이 군주의 자리에 오른 지 십 년째 되는 해 세상을 떠나자 무야가 자리를 이었다. 이 곧 경공이다. 소부인은 남편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주 눈물을 흘렸다.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경공은 홀로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밖에서 들은 ..

세 치 혀가 살린 목숨-괴통蒯通

고조 유방의 반응 기원전 191년, 이 해는 한나라 고조 11년, 나라를 연 지 이제 겨우 10년을 넘겼지만 나라 안팎의 형세는 태평성세가 아니었다. 스스로 ‘대왕代王’을 자처하던 진희陳豨가 지금의 허베이河北 땅에서 획책한 모반도 이때였다. 당시 그는 꽤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휘하에는 뛰어난 인재들도 여럿이었다. 진희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며 모반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조 유방은 치솟는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유방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희를 평정하는 길에 나섰다. 바로 이때, 한신은 병을 핑계로 고조 유방의 출정에 따르지 않고 도성에 남아 진희의 모반에 호응할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을 진희에게 은근한 방법으로 알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한신은 먼저 도성 안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풀어 이..

거열車裂된 밑돌-상앙商鞅

재능이 넘치는 젊은이 위衛 나라 서얼 공자 상앙商鞅이 위魏 나라로 가서 그 나라 재상 공숙좌公叔痤를 섬긴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품은 욕망이 남달랐던 그에게 위魏 나라는 그의 뜻을 널리 펼치는 데 더없이 좋은 나라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위나라는 전국시대 여러 나라 가운데 강국이었다. 이 나라 재상 공숙좌는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관장하는 집사의 자리에 상앙을 앉혔다. 이는 그의 능력에 대한 큰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처사였다. 당시 위나라 군주는 혜왕, 도읍을 대량大梁으로 옮겼기에 흔히 양혜왕梁惠王으로 불리는 그는 춘추시대 군주처럼 패자를 꿈꾸는 야심만만한 임금이었다. 어느 날, 혜왕은 깊은 병으로 일어날 가망이 없는 재상 공숙좌를 찾아 이 나라를 이끌 재상으로 적합한 인물의 천거를 요청했다..